20050605 주일낮설교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행 2:1-4 / 믿음의 선배 길선주 목사님이 가진 신앙의 역동성을 배우자!
(01 오순절(五旬節)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0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0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0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믿음의 선배 - 웨슬리, 김익두 목사를 소개하였고, 오늘은 오순절 성령운동같은 한국대부흥운동의 중심에 있는 길선주 목사님을 소개하면서, 그분의 변화와 이룬 역사를 말씀드리려 한다.
* 길선주 (1869 평남 안주~1935 평남 고창) / 장로교 목사
자는 윤열(潤悅), 호 영계(靈溪).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 성내 후장동에서 길봉순의 아들로 출생. - 고려말 유학자 야은 길재의 19대손.
1884년 15살에 신성행과 결혼함.
그의 모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정숙 온화하였으나 자녀 교육에는 엄격하였다. 선주는 4세 무렵부터 가정에서 어머니에게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7세 무렵엔 당시의 이름 높은 어느 한학자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선주는 막내였던 고로 어머니의 교훈을 많이 받고 자랐으며, 그 나이 또래에 비해서 총명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하여 이웃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는 아이로 자랐다.
선주가 12세 되던 무렵의 일이다. 한문 사숙에서 공부할 때, 서동書童들이 오언 한시를 제각기 지었는데, 그 가운데서 선주의 시 세 귀三句가 관주를 맞고 장원을 했다. 번역해 보면 이렇다.
농부의 아내 되게 하지 마라
해마다 고생이 이 같으니
옥같은 손에는 고초가 끊임없고
꽃다운 마음에는 한이 쌓이는구나
청루에 그 뉘 댁 규수였던고
이제 밤마다 끌리는 옷 닳는 소리 뿐이로고.
* 생生의 회한과 선도仙道 입문
안주가 속한 관서 지역은 대대로 중앙 정부의 견제를 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아울러 1811년의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고, 또 좌절되면서 민심은 더더욱 흉흉해지고 사회는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1885년, 선주의 나이 17세 무렵,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혀 집으로 난입한 모리배(공익이나 상도의(商道義)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 또는 그러한 무리.)들의 폭행에 선주가 거의 죽다시피 할 정도로 상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선주의 부친은 복수의 일념으로 평양으로 이주하게 된다. 수년간에 걸쳐 한에 사무친 앙갚음의 칼을 갈아오는데, 그 모리배 일당이 예기치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되었다.
이 무렵 선주는 우주 공리의 엄연히 살아있음과, 선과 공의가 인생사의 주초가 되고 있음을 느껴가고 있었으나, 워낙 깊은 심신의 상처를 입은 터라 세상은 허무하고 인생은 무상하기만 하였던 것 같다. 이로 인한 염세적인 생각들은 선주로 하여금 장차 영계靈界를 더듬게 했고, 영원 세계에의 탐구로 몰아 갔는지도 모른다.
인생사에 대한 환멸과 병약한 몸으로 심신이 기울던 19세 무렵, 선주는 관우 장군을 섬기는 관성교의 제문 몇 가지를 정성 들여 외우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다. 관우와 어느 중이 논쟁하고 있길래, "승속僧俗이 유별하거늘 어찌 감히 관공을 희롱하는가?" 했더니, 곁에 있던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보정대사保精大師를 몰라 뵈는가?" 하더란다. 선주는 깜짝 놀라면서, "만일 그 대사님이라면, 관공과도 논쟁할 자격이 있겠습니다" 했더니, 바로 그 사람이 말하기를, "대동강변의 을밀대로 가거라" 하더란다. 이윽고 꿈이 깨었다. → 귀신도 역사한다.
을밀대의 경치에 취해 오르던 그 이튿날의 산행에서, 선주는 우연히도 창일倉日 선생이라는 도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얻게된 그는 며칠 뒤 대성산 두타사에서 밤낮으로 주문을 송독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정신을 주문에 집중하자, 마음에 서려 있던 잡념이 점차 사라지고 무아경에 이르게 되면서, 삼일 째에 이르자 접신이 되면서 몸이 떨리고 기력이 되살아나며 힘이 솟기 시작하였다. 선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창일 선생이 일러 준대로 7일의 정성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신이 상쾌해 지고 몸에 힘이 났다. 입맛이 되살아나고, 소화력이 왕성해 졌으며, 그 동안의 중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비로소 삶의 비결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쁨이 솟아올랐다. 이로써 선주는 선도仙道를 수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입산수도入山修道
선주는 그 이후 장 선생이란 도인으로부터 구령삼정주송법九靈三精呪誦法을 얻어 심산 유암에 들어가 몇십만 번을 외우고 또 외웠다. 몇 해 동안 육경신일六庚申日마다 밤을 새워 송독하였다. 선주는 19세 무렵부터의 관성교 연구에 이어서, 21세 무렵부터는 이처럼 입산 수련에 정력을 기울였다. 해마다 서너 번씩 심산 유벽 깊고 외진 산사에 가서 옥경玉經을 연구하고 주송하기를 21일, 혹은 49일, 혹은 백일을 지새웠다. 대성산의 두타사, 상원의 백운암 등이 그의 치성 제단이 세워지던 곳이었다.
선도의 수련 기도라는 것은 묵상과 송독을 겸한 것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고행이었다. 이 기도는 신통력을 얻고 신통神通이 되어야 하므로 심혈을 기울여야 했으며, 사邪가 단 한 순간의 틈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예정한 기일 동안에 집중된 정신을 적은 틈이라도 해이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과 낮을 불구하고 기도를 쉴 사이 없이 계속하며, 심신의 피로로 잠이 올 때는 삼동 대한을 가리지 않고, 반석 위에 서서 얼음물로 목욕하여 잠을 깨우기도 하고, 밀 심지에 불을 붙여 손가락 사이를 지지기도 하며 공부에 진력하였다. 이처럼 진력하는데, 방안에서 진동하는 옥 피리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하며, 간혹 옆에서 총소리처럼 폭발하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선도 공부가 무르익으며, 선주는 그토록 갈구하던 진리를 발견했다는 기쁨이 한없이 솟구쳐 올랐다.
예수교로의 전향
예수교 전도지를 내미는 평양 거리에서 예수교인과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이 있은 후, 이렇게 기도하기를 몇 날이 지나자, 자신이 신봉하던 선도를 영생불사 도리로 알고 있던 선주의 마음에 점차로 의심이 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환영이 보였다.
"아래로는 만경창파요, 위로는 층암절벽이 솟았는데, 이편과 저편에 각기 동아줄이 드리워 있는지라, 내가 이편 줄을 잡고 오르는데 보아하니 위가 썩은 줄이로고. 하여서, 잡았던 줄을 놓고 저편의 것으로 옮겨가려 하니, 이제는 그 줄마저 튼튼한 것인가 의심이 먼저 나는지라..."
"삼령신군三靈神君이시여! 현 세계를 움직이는 예수교가 참 도道이오니까? 거짓이오니까? 밝히 가르쳐 주옵소서!"
이제 다시 선주는 번민에 휩싸였다. 10여 년을 매진해 온 선도仙道에의 회의와 아울러, 예수교에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다시 그를 병고의 길로 내 몰았다. 이내 심신은 다시 쇠약해 갔다.
선주는 전도자가 주고 간 천로역정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그 책 중 인물의 역정에 자신의 지난 생이 투영되어 눈물이 책장을 적시었다. 그러나, 하나님에의 깨달음은 물론, 예수에 대한 조그마한 신뢰감마저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다. 전도자가 다시 일러 준대로 선주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방식대로 천부天父를 상제上帝라 부르며, 깊은 밤이며 이른 새벽마다 기도하고 기도했다.
"상제님이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여러 해 정성을 다한 선도仙道는 이제 의심이 생기고, 저 예수교 도리는 영생의 진리인지 아직 확신치 못하고 있사오니, 저는 실로 민망하여 죽을 지경이오니이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심령에 안식을 주시옵소서!"
마치 어거스틴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깊은 번민에 빠졌던 것과 같았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내 가슴속을 찢어대는 고뇌에 밀려 정원까지 피해 나오고 말았습니다. 나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주먹으로 이마를 쳤습니다."
이 같은 내용의 기도가 수삼일 지속되던 어느 날 밤, 오고가는 인적은 끊기고 사방은 어둠에 잠겨 고요했다. 선주는 홀로 꿇어 엎드려 간곡히, 예수가 과연 인류의 참 구주인지를 기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방안에서 예의 그 청아한 옥 피리 소리가 진동하며, 요란한 총소리가 사방을 뒤흔드는 듯 하더니, 이윽고 공중에서 "선주야, 선주야, 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음성에 놀라 두려움에 몸을 떨며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엎드린 그 자세로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비로소 마음이 터지고 입이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 대곡하였다. 몸은 불덩이 마냥 펄펄 끓었고, 선주는 하염없이 흐르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가운데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해가 1897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었다.
- 예수를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습니다. → 우린 예수를 믿은 후 성경읽기와 기도에 힘써 본적 있나?
* 세례를 받은 후
1897년 8월 15일 29세에 선교사 이길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그의 열심은 대단한 열기로 치솟았다. 남보다 먼저 자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 1897년 29세로 세례를 받은 그는 금식과 철야기도에 힘쓰고, 손에 한번 성경을 쥐면 놓을 줄 모를 정도로 열중했다고 한다. 당시 외국 선교사는 우리말에 능숙하지 않아 주로 그가 집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 기독교로 귀의한 뒤 40년 교역생활 중 2만 번 이상의 설교를 통해 , 380여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가 세운 교회는 60여 개에 이르고, 이를 통해 배출된 목사 전도사 장로 교사가 800여명, 세례를 받은 성도는 3000여명, 개종자 7만여 명에 달한다. - 설교의 주된 내용은 말세와 재림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주로 선포함. → 나로 인해 예수 믿게된 사람있는가?
그 다음해인 1898년에 널다리골교회의 영수(領袖 / 장로교에서, 조직이 아직 잡히지 아니한 교회를 인도하는 직분을 말함)로 임명되었다.
그는 영수가 되어 강단에서 설교도 하며,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그는 일찍이 배워둔 침술과 한약에 대한 상식을 토대로 하여 한약방을 경영하게 되었다. 장사가 잘되어 양약까지 겸하여 운영하였다. 한약방의 월수입은 80원이었다. 조사(전도사)로 활동할 때, 생활비로 6원을 받았다. 길선주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 전도자가 되기를 결심하여 80원을 버리고 6원을 선택하였다. 각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고, 교회에서 설교하였다.
- 조사가 된 후부터 그는 돈과 부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현 평생 청빈의 생활을 했습니다. 사모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01년 33세에는 당시 유명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다.
1903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입학하였다.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국에서도 그 같은 역사가 일어나길,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다.
(참고 ;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4년의 웨일즈 부흥, 1905년의 인도 카시아 부흥, 1906년의 미국 아주사 거리의 부흥, 1907년의 평양의 부흥, 1908년의 중국 호난성 부흥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 영국의 웨슬리안과 케직 Keswick성결운동-1875년에 영국에서 시작된 케직(Keswick)사경회(査經會)도 미국의 오순절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으로 세계적 부흥과 선교 급물살, 우리나라에 온 많은 선교사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도 그 흐름. 언더우드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성결파인 구세군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열정적인 신앙형태를 좋아했기 때문에 “고함지르는 감리교도”라는 별명을 가졌다. 원래 독일개혁파 신자였던 아펜젤러는 감리교의 집회에서 중생을 경험하고, 감리교인이 되었다. '왜 칼빈주의자가 감리교인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아펜젤러는 “나는 장로교에서는 할렐루야를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렇게 뜨거운 신앙으로 와서 선교하게 된 것이다.)
몇몇 사람들(박치록 장로 포함)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과거 선도수련을 할 때 길선주는 매일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교인이 된 뒤에도 기도대상만 바뀌었을 뿐 형태는 계속되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
평양대부흥과 관련,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새벽기도의 시작이었다.
-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의 토착적 신앙형태로 1907년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 믿음의 습관이 있는가? 새벽기도도 해보자. 한국 20대교회안에 들어가는 서울명성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새벽기도....우리도 청주복음화 위해 기도에 힘써보자.
1906년 신학 재학 중이면서 새벽기도회를 처음으로 인도하였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로 유명한 분이다. 성경 66권을 거의 암송하다시피 하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 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은 1만 독을 했다고 한다.
- 신학생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앞장서서 복음을 전했으며 통회하고 자복하는 기도 속에서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때의 부흥집회는 ‘사경회’라는 말처럼 성경을 읽고 목사가 그 뜻을 풀이하는 형태였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군중심리에 의한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깊은 통회와 회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길목사는 이미 그 당시에 자주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양적인 팽창에만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사랑이 없는 교회는 지탱할 수 없다”며 신앙의 성숙을 강조했다.
드디어 1906년부터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 두 번째 토요일(주일이라고도 한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리고 있던 사경회가 열리고 있었는데(1500명 참석), 이 해의 사경회는 시작 전부터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날 설교를 맡은 목사 안수를 앞두고있는 평양신학교 졸업반 39세의 길선주 장로의 얼굴은 위엄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가 일어났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미화 100달러 상당의 금액을 사취(詐取)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길장로의 회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는 주님안에 한 지체인 형제들을 질시했습니다. 특히 방위량(Blair)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습니다”
길장로는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 초기 한국교회에는 선교사와 한국인 성도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고 특히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선교사들도 좌절과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길목사의 회개가 있자 곧바로 방위량(Blair) 선교사도 “신자와 신자 사이, 특히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 교인 사이에 그 동안 사랑의 결핍 때문에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고 고백하며 회중 앞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지체"(고전 12:27)라는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대로 그간의 반목과 갈등은 순식간에 화해와 사랑으로 승화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부끄러운 죄를 고백하고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장로는 설교를 마친 후 긴 끈으로 자기 허리를 묶었다. 한 청중에게 그 끈의 끝을 "꼭 붙들라"라고 말한 후 그는 강단 저쪽에 있는 매큔선교사를 향해 기를 쓰고 가려고 했다. 팽팽한 끈을 가리키며 "우리가 죄에 매여있는 형편이 이와 같다"고 외쳤다.
끈이 끊어지는 순간 그는 내달려 그때까지 팔을 벌리고 있던 매큔을 얼싸 안았다.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더니 서로 죄를 회개하며 몸부림쳤다.
한 교인이 또 일어나 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구박하고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계속 남을 속여 폭리를 취한 일, 도둑질한 일, 처자 부모를 미워한 일, 거짓말한 일, 달걀 값을 속여 선교사 돈을 갈취한 일 뿐 아니라 강도 강간 살인죄까지 고백되었다.
각종 미제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가 교회에 몰래 들어와 자백현장에서 교인을 체포해가기도 했다. 오히려 기꺼이 연행되었다.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날 사경회는 새벽 2시가 지나서도 끝나지 않았다.
첫날밤 집회에 참석했던 정익호 장로의 후일 증언이다.(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그는 눈이 멀어 나를 보지 못했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피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두려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곧 되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며 울부짖었다"
(길진경, '영계 길선주) - "마지막 집회가 끝나고도 7백여 명이 기도를 하려고 남았다… 순간 길장로가 일어나 자신은 블레어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며 바닥에 굴렀다 … 또 한 교인은 자신의 방탕함을 자복했다. 그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그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느꼈다"
죄의 고백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웃에게 과거의 잘못을 비는 행동도 뒤따랐다. 금전적 물질적 손해배상을 하고 뉘우침과 사과가 뒤따랐다. 또 운동의 물결은 숭실 광성 등 미션계 학교 학생들을 통해 전도운동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여자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숱하게 교회로 인도했다. 부흥열기는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 중국에까지 파급 돼 그곳에서 부흥회가 열리기도 했다.
감리교선교사인 노블 부인은 이 대부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슬프게도 대부분의 한국 신자들이 머리의 회개(head conversion)는 이루었으나 마음의 회개(heart conversion)는 이루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마음의 회개를 이루었고, 이것을 이룬 사람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자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부흥 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한국 특유의 신앙양태 뿌리 내림 - 신앙에 대한 체험적 이해 △교회 가정 사회에 도덕성을 기초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 △성령체험을 통한 일체감 고양 - 한국개신교의 공동체의식 구체화, 한국신자와 선교사간의 이해가 크게 증진 △성경공부 기도회 강화로 교회 급성장 계기 마련 - 1905년에는 321개였던 교회가 1907년에는 642개로 늘어났으며, 9,761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 또한 1만 8,964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백만명 구령운동으로 연결됨 등이다. 특히 조선 봉건체제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받아 그만큼 배타의식이 강했던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그 뜨거운 열기가 비록 서울까지 널리 파급되지는 못했지만 나라 전역에 '하나되자'는 일치감을 확산시켜 정치로 풀 수 없는 지역감정이 해소될 가능성을 보여 줬으며 이후 교파연합운동 활성화 토대도 마련케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안창호 등이 비판했듯이 교회의 비정치화, 몰역사성이라는 부정적 결과도 초래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적잖은 민족지도자급 신자들의 이탈현상을 감내해야 했다.
* 1907년 9월 제1기로 졸업한 후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 길선주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 때에는 회개의 역사와 병 낫는 일이 많았다. 그의 성령운동의 특색은 말씀에 기초한 기도와 회개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또한 말씀읽기를 강조하며, 말세론을 통하여 내세의 희망과 현실 극복의 용기를 주었으며, 새벽기도회의 시작을 주도하여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의 전통으로 흘러오게 하였다.
→ 회개, 기도와 말씀!!
* 길 목사님은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 · 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또한 경제자립과 국산 장려, 농촌 개발, 금주운동과 같은 사회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 1910년에는 일백만 구령운동(救靈運動)을 제창하여 부흥사로 활약했고,
* 1912년 105인 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다.
* 1919년 길선주 목사는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루었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 감옥에서 요한 계시록을 800독을 하고 완전히 외워버렸다. 감옥에서 나올 땐 시력이 약해져서 글을 읽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는 성경을 대부분 암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일에 어려움은 없었다. (참고 ; 길 목사님의 계시록 강해 유명했다.)
*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1924년 하반기서부터 1935년 상반기 동안에 평양을 중심한 근방 지역과 평안북도 일부 지역을 순회하면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사명에 불타는 선생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휴양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오로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복음을 온 국민에게 전달하기에 정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1935년 8월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 월곡동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을 일으켜 강단에서 쓰러졌다. 선천읍 내에 있는 기독병원에서 13일간의 치료를 받은 뒤 저으기 회복되어 평양에 돌아와 정양하고 있었다.
정양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지만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집안 식구들과 교회 친지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서노회 부흥 도사경회을 인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아드렸다.
1935년 11월 20-26일 평남 강서군 잉차면 고창교회에서 평서노회 부흥 도사경회를 인도하던 선생은 집회 마지막날 집회 새벽기도회의 폐회 축도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길진경, 「영계 길선주), pp.319,320).
그리고 그날 오전 9시3분에 소천하여 향년 67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길목사의 장례식에서는 평소에 그가 즐겨 불렀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가 364장)이 울려퍼졌다.
그의 마지막 임종 길에 들려지던,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라는 찬송과 함께, 그의 운구가 마지막으로 장대재를 떠날 때 한 조객이 이런 글을 남긴 바가 있다.
"선생이 나심에 근세조선에 위인이 있었고, 선생이 기독교회에 개종하심에 조선교회의 반석이 섰으며, 선생이 1906년 새벽기도를 시작하심에 세계에 새벽 기도가 시작되었고, 선생이 1907년 성신의 불을 드시매 (조선)천지에 대 부흥이 시작되었다... 선생이 최초로 한인韓人 목사가 되시매 조선에 노회老會가 조직되었고, 선생이 계시록을 일만독一萬讀하시매 무궁세계의 길이 만인 앞에 밝아 지도다... 선생의 손에 직접 세례 받은 자 삼천 인 이상이요, 구도자가 칠만 인이라 하니, 기실은 사십만 조선교인 중에 선생의 감화 받지 않은 자 심히 적고 적으리라."
→ 청주복음화 9%로 미미, 복음화 위한 일에 관심갖고 기도하고, 복음화를 위한 주역이 되길 소원하자!
⇒ 믿음의 선배 길선주 목사님이 가진 신앙의 역동성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