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성(城),
나고야 성(城)과 함께
일본 3대
성(城)의 하나로 알려진
구마모토 성(城)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1607년에 완성 되었다.
성내(城內)
우물이 120여개 이였으며
성(城) 주위를
살피기 위해 곳곳에
튼튼하게 세워 놓은 구축물
성루(城壘)가 49개와
성루문(城壘門) 18개
성문(城門) 29개 이였으나,
1877년 세이난 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천수각은
1960년에 재건 되었으며,
성(城)의 중심부에는
중국 왕소군이 그려져 있는
비밀의 방이 있는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는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은덕을
잊지 못하는
가토 기요마사 충의를 엿볼 수 있다.
특이한 경사와
특유한 견고함으로
천해의 요새(要塞)로
알려져 있으며
식량으로 대용할 수 있는
은행나무를 심었고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 선정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유명한 일본의 장수이다.
본명은
야샤와카(夜叉若) 인데
동향(同鄕)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혈연으로
인연이 닿게 되고
가신(家臣)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포착하게 된
야샤와카는
성인식을 마치기 전에
각종 전투에서
승전보(勝戰譜)를 올리자
가토 도라노스케 기요마사 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실제
그가 맡은 보직들은
후방을 지원하는
행정관의 그것이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死後)
도요토미 가(家)에
의리와
충성을 지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家臣)이 되어
구마모토 성(城)으로
히데요리를 모실 계획을 세웠고,
구마모토에서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성(城)까지
3일만에 갈 수 있는
바닷길까지 정비를 하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회견할 때는
가슴에 단도를 품고서
무사히 회견을 마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하지만,
그는 이것으로
주군(主君)인 히데요시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고
판단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서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의 적장(敵將)이라서
그를
비하하기 위해
배신자라고 하지만
일본 자국 시각은 다르다.
가토 기요마사를 옹호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등에 없고
권력을 전횡하는
간신(奸臣) 미츠나리를
제거하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군에
편입 하였을 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인데...
드디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 미츠나리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군 간에 벌어진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이다.
결국,
가토 기요마사는
후방을 지원하는 행정관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군이
승리를 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나
1611년 득병하여
향년 49세로 병사(病死)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중
조선의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일화로 유명하고
그가 쌓고 실제 주둔했던
울산 왜성(학성)과
서생포 왜성은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관광지로
많은 일본인들이 찾으며,
과거 구마모토시에는
울산정 이라는
행정구역이 존재 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
울산역 이름만 남아있는 상태이고
구마모토시와 울산시가
자매결연한 밀접한 관계이다.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 나네의 주인공이
가토 기요마사 라는
설이 있다.
가토 기요마사를
한국식 발음으로 하면
가등청정(加藤淸正) 이다.
일본으로 퇴군하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보고
쾌지나 칭칭 나네 는
쾌재라 청정(淸正)이 나가네 라는 뜻으로
이때 가토 기요마사가
포로들을 엄청나게 끌고 갔는데
구마모토 성(城)을 지은
조선인 포로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또한,
의도치 않게
숭례문을 지켜 준 인물이다.
대한제국 시기
교통 편의상 숭례문을 헐려고 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을 통해
입성하였기 때문에
경성에 살던 일본인들이
승전 기념물처럼
숭례문 철거를 극렬 반대한 이유로
결국
보존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년에는
붉은 먹을 묻힌 붓으로
논어를 밑줄을 쳐가며
읽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기르는 원숭이가
자신의 논어 책에
붓으로
낙서를 하는 것을 보고는
너도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은 거냐 라며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야
그냥 적장(敵將)에 불과 하지만,
오늘날,
일본 구마모토에서는
지역 대스타다.
말도 안통하고 단순하며
무식한 일면도 있지만
전쟁시 후방을 지원했던
행정관 출신답게
황폐한 구마모토를
치수(治水)와 개간으로
지역 특성을 잘 다스려
평야를 이루고
농산물의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
지역 발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어느 도시 보다
구마모토에
가장 먼저
가고 싶은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풍부한 사무라이 유산과
나의 전생(前生)과
깊은 관련이 있는듯 하여
나의 전생(前生)
사주(四柱)를 열어 보았다.
역시,
지금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생(前生)을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고
수십 억년을 진화해온
바로 지금의 자신이기 때문에
부모 복이 박하다면
전생에 효도하지 않았음이요.
형제 복이 박하다면
전생에 화목하지 않았음이요.
어려운 고비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있다면
바로 전생에
많이 베풀었을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원(願)을 세우고
좋은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해야 하며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甲辰年
六月 第一十四天
寓居泗川 灑落堂
律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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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前生)은...
律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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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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