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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전과웅 (55세/정선)
서운재 중수기(瑞雲齋 重修記)
천도(天道)가 좋게 돌아오는 이치를 보고 모든 인간사(人間事)를 징험(徵驗)하여 많이 겪어봐도 어긋남이 없었다.
나의 동쪽 한(韓)나라의 정선전공(旌善全公)공의 가승(家乘)이 깊고 장구(長久)하여 그 근원(根源)이 멀고 흐름이 깊어서 적선여경(積善餘慶)이 지금까지 더욱 나타남에 깊이 감탄(感歎)하였다.
살펴보니 전씨성(全氏姓)은 하우씨(夏禹氏)의 후예(後裔)로 기자(箕子)가 동천(東遷)할 때 따라왔으며 그 뒤 홍농후(弘農候) 휘(諱) 반(槃)에 이르려 한(漢)나라에서 벼슬하여 공훈(功勳)을 세운 탓으로 승상(丞相)의 자리에 이르렀고 이어서 승상(丞相)의 발자취가 있더니 그 뒤 정선군(旌善君)에 이르러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모시고 본국(本國)에 돌아와 군(君)에 봉(封)해지니 지금 그 후손(後孫)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계속하여 명성(名聲)이 모든 조정(朝廷)에 자자하여 명공석덕(名公碩德)과 구국공훈(救國功勳)을 가히 다 기록할 수 없다.
국파(菊坡)공(公)같은 도덕문장가(道德文章家)가 원나라에 들어가 한림(翰林)이 되었고 채미헌(採薇軒)공(公)은 려조말(麗朝末)에 태학사(太學士)로 절개(節槪)를 지켜 굴하지 않고 드디어 서운산(瑞雲山)에 숨어서 홀로 충절(忠節)을 지켰으니 가히 백대(百代)에 교화(敎化)될 것이며 진실로 탁월(卓越)한 분이다.
서운(瑞雲)은 그 산의 이름이고 정선(旌善)공(公)의 묘(墓)가 이 산(山)에 있으므로 인하여 그 재실(齋室)을 일러 「서운재(瑞雲齋)」라 하였다.
창건(創建)한지가 오래되어 퇴락(頹落)되고 이지러지니 제종족(諸宗族)이 힘을 모아 중수(重修)하고 마침 종족(宗族)들이 종약(宗約)을 세워 모여서 돈목(敦睦)하고 서로 도우니 가히 그 종족(宗族)에 현인(賢人)들이 많음을 깨닫게 한다.
그 종족(宗族)들이 병훈(秉薰)에게 부탁하여 기문(記文)을 나에게 청(請)하니 오호(嗚呼)라! 병훈(秉薰)군이 비록 한(韓)나라 사람이지만 그 선조(先祖)인즉 우리 중화(中華)의 한겨레이며 그가 중국(中國)에 와서 나와 서로 의지하여 예서(禮書)와 예복(禮服)을 증정(贈呈)하고 우리나라(中國)를 예(禮)로서 다스릴 것을 진언(進言)하였다.
또 그가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과 제설(諸說)을 저작(著作)한 바 있으니 사대부(士大夫)가 홍범구주(洪範九疇)에 이어 추중(推重)되고 비길만하다.
그 길이 멀리 미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나라 백성의 복(福)됨이며 이에 가히 그 학술(學術)이 장차 온 천하(天下)에 고루 알려져 세계(世界)를 놀래게 하리라.
그 원류(源流)를 거슬러 본즉 어찌 그 선조의 음덕(蔭德)이 호환(互換)하여 천양(闡揚)함이 아니겠는가?
세 경신 사평(1920년)
(歲 庚申 蜡平)
중국 전 광록대부 양강총독 풍윤 장인준 식
(中國 前 光祿大夫 兩江總督 豐潤 張人駿 識)
중국 전 한림원수찬 숙녕 유춘림 서
(中國 前 翰林院修撰 肅寗 劉春霖 書)
◎ 적선지가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餘慶]
요약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라는 뜻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에게까지 복이 미친다는 말이다. 《주역(周易)》의 〈문언전(文言傳)〉에 실려 있는 한 구절이다.
積:쌓을 적
善:착할 선
之:어조사 지
家:집 가
必:반드시 필
有:있을 유
餘:남을 여
慶:경사 경
줄여서 적선여경(積善餘慶)이라고도 한다. 《주역》의 〈문언전〉은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에 대한 해설서이다. 곤괘를 해설하는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은 하루 아침과 하루 저녁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유래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변론하여야 할 일을 변론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辯之不早辯也)."
여경(餘慶)은 선한 일을 많이 행한 보답으로서 그의 자손들이 받는 경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음덕(蔭德:조상의 덕)과 비슷한 의미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남향집에 살려면 3대가 적선(積善)하여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취하기 어려운 일에 대하여 흔히 '3대가 적선하여야 한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 말과 관련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적선지가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餘慶] (두산백과)
◎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 원나라 괴과(魁科)에 급제
전원발(?~?)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
현서 달지(縣西 達池: 聞慶 永順) 출생으로 1315년(충숙 2) 원나라의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金紫光祿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이르렀다.
고려로 돌아올 때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를 하직하면서 ‘고려에서 거두는 세공을 대폭 줄여 달라 청하니 순제는 이를 허락하고, 공복(公服) 한 벌을 하사하며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한다.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阮君)에 봉해지고, 조선건국 후 명나라에서도 이 예(例)에 따르니 이 공을 치하하여 태조(太祖)는 다시 축산부원군에 봉하였다. 그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인 용주서성화천(龍州西省火川)으로 내려와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자적(自適)하였다.
또한 명필이었으니 법주사에 있는 자정국존보명탑비문(慈淨國尊普明塔碑文)이 지금도 남아 있다.
1698년(숙종 24)에 ‘고려 명신으로 원에서 조공의 폐됨을 아뢰어 생령(生靈)을 편찬하게 했다‘하여 고향의 성화천을 소천(蘇川)으로 고치게 하였고,
1701년(숙종 2)에 숭덕사(崇德祠)와 전교당(典敎堂)을 짓고 애국심을 기리니 곧 소천서원(蘇川書院)이다.
출처: 재단법인 한국국학진흥원
자정국존보명탑비문(慈淨國尊普明塔碑文)
◎ 전원발 과거급제 기록
人事篇 / 治道類
科擧
[0412]東人參中國榜眼辨證說
全元發、
【號菊坡。登文科。又登制科第三人。官翰林學士。壽城人。在于光下。】
출처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 治道類 > 科擧
◎ 전오륜[Jeon Ohryun, 全五倫]
1373년(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년(공양왕 4)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조선 태조에 의하여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이때 본향안치된 인물이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정희(鄭熙) 등인데, 이들 중 성석린과 같이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인물들도 있었다. 뒤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 강원도 정선 소재)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安義)에 소재한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전오륜의 유고(遺稿)와 행적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책이 『채미헌실기(採薇軒實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Jeon Ohryun, 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병훈(全秉薰, 1857년 – 1927년)
구한말의 사상가이다. 호는 성암(成庵)이고, 본관은 정선이다. 평안남도에서 출생했다.
조선 철종 9년(1857)에 태어나, 고종 29년(1892)에 의금부 도사,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며, 순종이 즉위하던 해(1907)에 관직을 버리고 중국 광동으로 건너가 정신연구에 몰두하였다. 자는 서우(曙宇),호는 성암(成菴)외에도 취당(醉堂)이 있으며 도호는 현빈도인(玄牝道人)이다. 1920년에 저서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이 출간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
요약
구한말기의 학자 전병훈(全秉薰)의 철학 저술. 자신이 수립한 정신철학(精神哲學) 체계를 담은 것으로 1920년 중국 북경에서 간행되었다.
1857년 철종 5년에 태어나 의금부 도사, 중추원 의관 등을 역임한 사상가로 어려서는 유학을 배웠고 1907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중국 광동으로 건너가 도교에 매진하였다. 중국 유학 기간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 사상을 망라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인 ‘정신철학(精神哲學)’을 수립하였는데, 이를 총 정리하여 펴낸 것이 바로 그의 일생의 저작인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이다. 그는 단군의 천부경(天符經)이라는 경전을 중심으로 도교, 유학, 서양사상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철학체계를 고안해 내는 한편, 이를 다시 정신철학, 심리철학, 도덕철학, 정치철학의 4개 분과로 나누어 각각의 측면에서 당시 시대가 처한 문제점들을 고찰해 나가고자 하였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상호보완적인 시각에서 종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책의 주된 목표라 할 수 있다.
구성 및 형식
형식상 2책[상책(上冊)·하책(下冊)] 3편[상편(上編)·중편(中編)·하편(下編)]의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을 다시 장절(章節)로 나누어 서술하는 근대적인 체계를 따르고 있다. 내용상 천부경 주해·정신철학·심리철학·도덕철학·정치철학의 5개 범주로 구분되나 형식적 편제와 그 구분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본래는 정신·심리·도덕·정치의 네 영역으로 기획된 것이었지만 책의 출판을 앞둔 1918년에 《천부경》을 입수하고 이를 정신철학의 정수가 되는 것으로 여겨 주해를 달아 책의 앞머리에 붙이면서 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내용 및 주요 사상
내용상의 범주로 구분하여 그 주요 사상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천부경》 주해
《천부경》 81자에 대한 주석과 추가적인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천부경》을 도교, 유교, 주역 등의 동양철학 사상을 망라한 경전으로 본 것이 특징이며, 천지 변화와 내단 수련의 원리를 바탕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해설하였다.
정신철학
도교의 내단 사상을 기본으로 정신 수양에 관한 철학을 전개하였다. 전병훈은 정신(精神)과 심리(心理)라는 용어를 구분하여 정신을 개인 수양에 관련된 것으로, 심리를 인간의 일상적 정신활동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정신철학 편에서는 주로 개인 측면에서의 수양에 관해 고찰하였다. 특히 정기신(精氣神)과 정신(精神)이라는 도교의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내단 수련법에 관해 자세히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심리철학
유교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성품 수양 및 심성론 일반의 문제에 관해 폭넓게 논하였다. 주로 공자와 맹자의 심법(心法)을 바탕으로 극기복례의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유교 외에도 도교, 불교 그리고 서양의 심리철학을 수용하여 다양한 심성론을 전개하였다. 특히 서양 근대 과학과 심리학의 성과를 인용하여 동양 심성론과 종합적 이해를 펼치고 있는 점이 책의 독창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도덕철학
유교에서부터 서양의 도덕철학에까지 다양한 도덕 이론을 망라한 편으로 동서양의 도덕철학을 종합하여 당면한 시대적 윤리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도덕 전통은 공(公)과 사(私)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지만 서양의 도덕철학이 동양에 유입되면서 공과 사의 조화를 모색하는 시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시도가 궁극적으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공(公)을 강조하는 전통을 중심으로 도덕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치철학
도덕철학의 고찰을 토대로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정치제도와 이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우선 그는 동양의 전통적 정치이념인 인치(仁治)와 덕치(德治)가 지나치게 한 개인의 덕성에 의존하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제도적 정비를 통해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정치제도 측면에서는 서양의 제도가 동양의 제도보다 우수하다고 여겨 민주, 공화 등의 체제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보완할 이념으로서 주나라의 정전제와 예치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신철학통편 [精神哲學通編] (두산백과)
◎ 홍범구주[洪範九疇]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남겼다는 정치 이념.
[네이버 지식백과] 홍범구주 [洪範九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인준[張人駿, Zhāng Rénjùn]
중국 근대혁명에 저항했던 청나라 말의 관리
시대 청나라 말 ~ 중화민국 초
출생 - 사망 1846년 ~ 1927년
1. 관리로 승승장구하다
자는 천리(千裏), 건암(建庵)이고, 호는 안포(安圃)다. 직예(直隶) 풍윤(豊潤,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탕산 시(唐山市) 펑룬 구(豊潤區)) 출신이다.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관리인 장패륜의 조카이다.
어려서 영민하고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동치(同治) 4년인 1865년에 19세의 나이로 거인이 되고 동치 7년인 1868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후 한림원 서길사와 편수(編修, 편찬직)가 되었다. 그다음 급사중1), 감찰어사를 거치고, 광서(光緖) 중엽에 광시계평염도(廣西桂平鹽道)가 되었다. 이후 광시(廣西)·광둥(廣東)·산둥(山東)포정사를 거쳐 조운총독(漕運總督), 산둥(山東) 순무(巡撫, 지방장관), 광시순무 등의 직책을 맡았다.
광서 30년인 1907년에 잠춘훤의 뒤를 이어 양광총독2)이 되었다. 선통(宣統) 원년인 1909년 5월에 양강총독(兩江總督, 강소성(江蘇省)·안휘성(安微省)·강서성(江西省) 3성을 관할하는 최고위 관리) 겸 남양대신(南洋大臣)을 겸하게 된다.
1910년 6월 남양권업회(南洋勸業會)가 강녕(江寧, 지금의 장쑤 성 난징 시(南京市))에서 개막되자 그가 대회를 주관했다. 남양권업회는 관·상(官商)이 합동으로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였는데, 당시 각지에서 보내온 제품은 100만 건이 넘었다. 전람회는 6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찾아온 외국 상인은 10만 명이 넘었으며, 교역액은 1천만 은원(銀元)에 달했다. 또한 그는 영국 회사와 계약하여 수도를 개설하기도 했다.
2. 근대 혁명에 저항하다
이처럼 그는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혁명적 진보에는 반대했다. 당시 대부분의 총독과 순무가 국회와 책임 내각이 성립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강력히 반대했다.
선통 3년인 1911년에 우창 봉기3)가 발발하자 혁명당에 적대적이었던 장인준과 장훈완(張勳頑) 등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중국혁명동맹회의 연합 공격에도 장인준은 강녕을 떠나지 않고 숨어 있다가 기회를 틈타 정박해 있던 일본 함선으로 도망갔다.
같은 해 12월 1일 상하이(上海)를 거쳐 산둥성 칭다오(靑島)에 몸을 숨긴 그는, 이후 82세 되던 1927년에 톈진(天津)에서 사망했다.
참고문헌
『청사고(淸史稿)』
『만청중신―장인준고략(晩淸重臣―張人駿考略)』, 하북성박물관편찬(河北省博物館編纂)
각주
1)
급사중(給事中) : 황제의 조칙(詔勅)에 관한 심의를 맡아보던 관직.
[네이버 지식백과] 장인준 [張人駿, Zhāng Rénjùn] - 중국 근대혁명에 저항했던 청나라 말의 관리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유춘림[劉春霖, liú chūn lín]
출생 – 사망 1872년 ~ 1944년
숙녕(肅寧) 사람으로 자는 윤금(潤琴)이고, 호는 석운(石雲)이다. 청말민초(淸末民初) 시기의 관리이자 정치인이다.
광서(光緖) 30년(1904)의 진사(進士) 출신으로 청(淸)나라 조정에 최후의 장원급제자이며 벼슬은 한림원수찬(翰林院修撰)을 지냈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법정대학(東京法政大學) 보수과(補修科)를 다녔다. 귀국 후에 복건제학사(福建提學使), 직례법정학교(直隷法政學校) 제조(提調), 북양여자사범학교(北洋女子師範學校) 감독(監督), 순직자의국(順直諮議局) 의원, 자정원(資政院)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11년에 헌우회(憲友會)가 성립될 때에 직례지부(直隷支部) 발기인으로 추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춘림 [劉春霖, liú chūn lín]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유춘림(劉春霖): 마지막 장원 역사
https://blog.naver.com/shanghaicrab/20169193981
글: 유계흥(劉繼興)
중국은 수나라 때부터 과거제를 실시하여, 1905년 청나라에서 과거제를 폐지할 때까지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기나긴 세월동안 수백명의 장원이 탄생했다. 그럼다면, 누가 중국역사상 마지막 장원일까?
많은 책에서는 장건(張謇)을 "마지막 장원" 혹은 "최후의 장원"이라고 부른다. 기실 장건이 장원급제한 것은 1894년이다. 그 후에 과거시험은 3번이나 더 시행되었다. 마지막은 1904년 서태후의 70세 기념으로 증가한 은과(恩科)였고, 장원으로 합격한 사람은 유춘림이었다.
과거제는 청나라 때가 되어 날로 몰락했고, 폐단이 갈수록 많이 나타났다. 1905년 청나라정부는 원세개 등 총독순무들의 주청으로 과거제를 정지시킨다. 그리고 병오과(1906년)부터 모든 향시, 회시와 각성의 세과고시는 일률적으로 정지했다. 이렇게 하여, 천년을 이어오던 과거제도는 그 목숨을 다하게 된다.
그래서, 청나라 광서 30년(1904년) 갑진과 장원인 유춘림이 역사상 마지막 장원이 되었다. 소위 "제일인중 최후인"이 된 것이다.
유춘림(1872-1944)의 자는 윤금(潤琴), 호는 석운(石雲)이며, 직예 숙녕 사람이다. 그는 집안이 빈한하며, 수입이 보잘것없는 하급관리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제남, 보정부에서 일을 했고, 모친도 지부의 집안에서 여종으로 있었다. 유춘림은 어려서 부모를 따라 제남에 살았는데, 집안에는 자주 곡식이 떨어지곤 했다. 6살때는 고향으로 보내져서 백부백모가 기른다. 8살 때는 사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며, 한번 보면 잊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사숙의 스승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 나중에 부모는 그를 보정으로 데리고 가서 연지서원(蓮池書院)에 입학시키고, 여기서 십여 년간 공부한다. 그의 학업은 진보가 빨랐고, 원장인 오여륜(吳汝綸)은 그를 높이 평가한다.
오여륜은 "동성파(桐城派)" 후기의 아주 중요한 작가이고, 중국근대에 공로가 큰 교육가이다. 그는 일생동안 쓴 책이 자신의 키만큼 되었고, 영향력이 아주 컸다. 오여륜은 동치4년에 진사가 되고 증국번, 이홍장의 막부에서 일한다. 직예심주, 기주의 지주를 지낸다. 광서15년(1889년)부터 보정의 연지서원의 원장을 맡는다. 여러해동안 교육하면서 제자가 아주 많았다. 오여륜이 죽은 후, 그의 친구인 엄복(嚴復)은 대련을 써서 그를 아주 높게 평가했다: "평생풍의겸사우(平生風義兼師友), 천하영웅유사군(天下英雄惟使君)" 오여륜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유춘림이 당시 학업성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은과는 송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명청시기에도 이 제도를 이어받았고, 청나라는 정기적인 과거이외에 조정의 경사가 있으면 특별히 과거시험을 치렀다. 이를 "은과"라 한다. 정과와 은과를 합쳐서 거행하는 경우에는 은정병과(恩正幷科)라고 불렀다. 광서29년(1903년)은 정과이다. 광서 30년(1904년)은 서태후의 70세 탄신을 기념하여 치른 은과이다. 이 해의 은과는 중국최후의 과거였고, 유춘림은 운이 좋게도 장원이 된다.
유춘림이 운 좋게 장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막후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 해의 전시에서, 주시험관은 진지하게 검토한 후 뽑힌 시험지를 등수에 따라 배열해서, 서태후에게 올려 결정하게 하였다. 관례에 따라 전삼갑(前三甲, 1,2,3위)은 최고지도자가 결정한다.
당시는 시국이 어지러워 내우외환이 있었다. 서태후는 오늘 아침에 술이 있으면 먹고 마셔서 취한다는 식으로 70세 생일잔치를 준비했다. 과거시험에서 길조를 얻기를 바란다. 그녀는 우선 주시험관이 정산 순서대로 시험지를 본다. 글씨도 예쁘고 문장도 화려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문장의 작자를 본 순간 즉시 노기를 띈다. 왜냐하면 작자는 광동의 응시생인 주여진(朱汝珍)이었기 때문이다. '주'는 명나라의 국성이다. 서태후가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珍)'자를 보고는 서태후는 진비(珍妃)를 떠올린다. 진비는 광서제의 측비인데, 광서제의총애를 받아 광서제의 유신을 지지하고 자신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가려했다. 그리하여 분노한 서태후는 진비를 우물에 넣어 죽여 버린다. 그래서 '진'자를 보자 다시 분노가 솟았다; 게다가 주여진은 광동사람이다. 그것은 서태후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홍수전, 강유위, 양계초, 손중산....이들 대청왕조의 '수역(首逆, 역적의 우두머리)"은 모조리 광동출신이다. 서태후가 보기에 광동사람이 가장 나빴다. 광동인에 대하여는 뼛속까지 한을 품었다. 그래서 주여진의 답안지를 한 켠에 미뤄놓는다. 그리하여 그는 장원을 얻지 못하고 만다.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서태후는 다시 두 번째 시험답안지를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조금 전의 노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시험답안지는 직예(지금의 하북성) 숙녕사람인 유춘림이 쓴 것이었다. "춘림" 두 글자는 봄바람에 비가 내려 대지를 촉촉이 적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 해는 가뭄이 들어, 봄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직예는 북경의 주변이고, "숙녕"은 정숙하고 안정된 태평성세를 의미한다. 당시 전쟁과 위기에 시달리던 청왕조로서는 자연히 길상의 징조이다. 그리하여 행운의 별은 유춘림에게 떨어진다. 원래의 2등에서 일약 장원이 된 것이다.
유춘림은 시서화에 모두 높은 조예를 지녔다. 특히 소해(小楷)에 뛰어났다. 그의 소해서법은 당시 최고였고, 후학들이 그를 종사로 모실 정도이다. 지금까지도 서예계에는 여전히, "대해는 안(진경)을 배우고, 소해는 유(춘림)을 배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장원 급제후, 그는 한림원 수찬이 된다. 그리고 일본으로 파견되어, 동경법정대학에서 공부한다. 광서33년(1907년) 귀국하여 자정원 의원이 되고, 기명복건제학사, 직예법정학교제조, 북양여자사범학교감독등의 직을 맡는다. 신해혁명후 한때 집안에 은거하였다가, 원세개 대총통부내사를 맡는다. 1917년 12월, 중앙농사시험장 장장을 맡는다. 서세창, 조곤이 대총통으로 있을 때, 총통부비서방판 겸 비서청 대리청장이 된다. 나중에 직예성 교육청 청장, 직예자치주비처 처장등의 직을 맡는다. 일찌기 두번에 걸쳐 서세창을 대표하여 산동 곡부로 가서 공자대성절 전례를 주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명성을 떨친다. 1928년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상해, 북경에서 시를 쓰고 글을 쓰며 보낸다.
유춘림의 민족기개는 특히 인정할 만하다. "9.18"사변후, 장개석은 동북군대에 싸우지 말고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유춘림은 이에 대하여 분개한다. 나중에 "만주국"을 설립한 후 부의의 명의로 유춘림을 부르고 그에게 만주국 교욱부 부장의 직을 약속한다. 그러나 유춘림은 거절한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침략군은 화북지방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화북일본점령지역에 친일정권을 수립하려 한다. 1937년 7월말, 북평(북경)에 북양군벌의 잔여세력인 매국노 강조종(江朝宗)을 주석으로 하는 "북평지방치안유지회"가 성립된다. 8월초, 천진에는 직계군벌, 정객, 매국노인 고릉울(高綾蔚)을 우두머리로 하는 "천진지방치안유지회"가 성립된다. 10월, 일본정부는 희다성일을 북평특무기관장으로 임명하여 매국노를 부추겨서 통일된 화북친일정권을 건립하고자 한다. 왕극민, 동강, 탕이화, 주심, 왕집당, 제섭원등이 친일 "정부주비처"의 구성원이 된다. 12월 14일, 북평에 "중화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된다. 왕극민이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탕이화가 의정위원장이 되며, 동강이 사법위원장이 된다. 왕극민, 왕집당, 제섭원, 임시정부위원이 된다. 친일정부는 6부를 두는데, 행정부총장은 왕극민, 치안부총장은 제섭원, 교육부총장은 탕이화, 진제부총장은 왕집당, 실업부총장은 왕음태, 사법부총장은 주심이 된다.
당시 친일"중화민국인민정부"의 진제부총장인 매국노 왕집당은 유춘림과 같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일본유학도 같이 갔다. 그는 유춘림 장원의 명성을 빌리고자 한다. 그래서 유춘림에게 북경시 시장의 요직을 맡기고자 여러 가지로 설득한다. 그러나 유춘림은 모두 거절한다. 일본군은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유춘림의 집을 쳐들어가서 총칼로 온 집안사람들을 쫓아내버린다. 나중에서야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갈 수있게 해주고, 빼앗아간 재물도 돌려준다.
이처럼 유춘림은 두 번이나 친일정권의 관직을 거절하고 말년의 절개를 지켰다.
1942년 유춘림은 심장병이 발작하여 북경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이다.
[출처] 유춘림(劉春霖): 마지막 장원|작성자 shanghaicr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