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가을호 신인상 김정아
따뜻한 저녁
십리길 우산을 들고 걸어오신 할머니가
흐르기를 멈춘 열다섯 살 빗물窓을
노크한다
해를 쫒던 칸나
고개 숙인 사벌중학교 꽃밭에는
그 날 이후 부끄러움이 자라기 시작했다
쑥쑥 더 자라야 뒷줄에 설 수 있다던
할머니 말씀은 몽기몽기 물안개
피어오르며 손 흔드는 당신은
떠난 뒤에도 남긴 떨림으로
소낙비 오는 날이면
나를 달큰한 호박죽으로 끓게 했다
채송화 꼬물꼬물 기어드는 기억의 마당
우산 밖으로 발등을 내밀고 싶어
수직의 추락으로 빗물이 피운 물꽂을
쿡쿡 걷어차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손상되었다 복구된 램RAM 메모리인 듯
바글바글 끓이던 마음을
발등의 허공에 슬며시 내려놓는다
너무 일찍 알아버린 부끄러움이
마른 바닥을 두드리는 빗물 앞에서
점차 따뜻해지고 있었다
나무의 악보樂譜
밤 산책길에서 만난 사시나무
가지는 가지끼리 잎은 잎끼리
몸 부비며 하나의 악기가 되는 줄 알았다
인적 드문 숲길에 발을 들여놓을 때
포르르 날아가던 풀벌레들
나는 그들이 놀라 달아나는 줄 알았다
누구나 머물다 떠나간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참을 수 없는 적요에
한 점 쓸쓸함을 보태는 것이라고 믿었던 생각을
등줄기 땀으로 흘려보낸다
이쯤에서 새는 새끼리 벌레는 벌레끼리
이슬은 이슬끼리 나를 위해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행여 밤길을 홀로 걸어왔다고 말하지만
살랑이는 바람의 동행을 알지 못한 건
당신이 미련하기 때문
애잔히 파고드는 밤의 따순 포옹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간다한들
나는 당신을 붙잡지 않겠다
외로움의 반경을 벗어났다 할 순 없으니
잠자코 걷던 운동화 안창에
무심코 뛰어든 모래 한 알이 그러하듯
어설픈 발길질에서 통증은 시작되리라
나무 커다란 악기가 되기까지
다녀간 새와 이슬과 벌레에게 먼저
웅웅거리는 조곡弔哭이다
여름이 벌린 모세혈관이
흐려지는 별의 눈자위를 문질러 주고 있다
유혹의 마스카라
일렬로 누워있는 마스카라들
백화점 화려한 쇼케이스 안에서
누군가의 눈썹을 들어올리기 위해 대기중이다
길 고 풍 성 하 게 진 하 고 볼 륨 있 게 화 사 하 고 아 찔 하 게
어느 것을 골라야 나는 모래먼지 불어오는 사막의 낙타처럼
당당히 눈뜨고 걸어갈 수 있을까
번쩍 들어 올려진 눈썹에 구름과 별빛을 얹고
터벅터벅 걸어가다 오아시스에 이르게 될까
고인 물을 만나면 거울인 듯
천천히 얼굴을 들여다 볼 거야
나는 쨍쨍한 먼지의 햇볕 속을 걸어왔으므로
눈가에 얼룩을 남기지 않는 마스카라를 원해
어쩌다 만난 전갈조차도 내 눈을 올려다보며
아찔한 듯 뒷걸음질 칠 때도 있을 꺼야
내 눈썹은 슬픔이 미끄러지는 지붕을 잇댄 처마인 듯
나보다 더 먼 길을 걸어온 쓸쓸한 그대에게
잠시 쉬어갈 그늘이 되어주었으면 해
여기 좀 보셔요, 상큼한 아가씨
“그런 마스카라도 있나요?”
잘가라, 봄
앙증맞은 품으로 복사꽃에 앉았다가
배시시 안기는 햇살을
무안 주지 않고 밀치고 떠나는 봄
그의 쓸쓸해진 후미를
낡은 버스 배기통이 따라가며 흐려놓는다
물오르는 능수버들의 우듬지에게나
술술 빠져나가는 눈부신 처세술을 걸어주고
건너뛰기 전 인고의 슬픔은
얼었다 풀리는 강가에 슬쩍 내려놓고서는
문양驛 쪽으로 지팡이 짚고 걸어간다
이때 길가의 꽃들은 자못 궁금한 속내의 바퀴
번갈아 살랑거리는 춤사위로 꼬드겨도
떠날 때의 뒷모습만큼은 누추함 보이기 싫은지
그는 돌아앉아 백발로 자라는 머리를 다 빗었다
뒤통수가 더 이상 단정할 수 없을 때
부르릉 부르릉 배차 시간에 맞춰
떠나라 당신, 나의 몸은 뜨거워졌으니
심사평
한 송이 포도를 따먹으며 심사평을 쓴다. 그것도 계간 <文章>의 가을號에 신인으로 등단을 하기 위에 많은 밤을 지새웠을 투고한 원고 들을 드려다 보면서 심사평을 쓴다. 나도 시를 쓰는 한 사람으로써 등단한지 언 24년에 이르고 보니, 기분이 묘하다. 낡았다는 표현을 쓰고 싶으나 스스로 좀 비참해지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하고 아무튼 싱싱한 열정이 시 쓰기에서 얼마나 독자들한테도 감동이 되던가에 새삼 반성도 하게 된다. 이때 신선하다는 것은 발상과 표현 그리고 구조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물론 바탕에 깔린 시정신의 치열성과 고민 깊은 사유를 만났을 때 그 신선함은 잘 익은 포도일 것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많은 시창작교실, 문화센터, 심지어는 동네 도서관에서도 요즘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의 한 분야로 시 쓰기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시를 보급한다는 차원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시인으로 등단까지의 시적수준이 끌어올려지기에는 허송세월이 될 수도 있다. 교수자의 능력도 문제다. 한 송이 포도를 둥근 알로 만 지도해서도 안 된다. 포도 알을 다 따먹고 보니, 알마다 뭔가 다른 햇볕의 맛이 들었더라, 수백갈래 다른 길들의 막다름이 열매를 붙드느라 근력이 생겼더라, 등등의 포도를 둘러싼 상상력들을 즉석에서 학습자에게 첨삭의 능력으로 보여줄 수 있을 때서야 초보자들에게 빠른 길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그 많던 송이에 붙어있던 포도의 탱탱한 알들이 떼어져 목구멍으로 넘어갔으니 나도 이젠 포도다. 싱싱한 눈으로 여러 편의 응모작들을 보니, 시인이 되기 위한 수련이 그나마 잘되어있는 김정아씨에게 눈길이 간다. 패기가 돋보인다. 이 가을에 문장이 그나마 추수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드는 시인을 만나서 즐겁다.
2014. 09. 04
심사평 : 박윤배(글), 안윤하. 김석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