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둘레길/靑石 전성훈
세밑이 되자 문득 둘레길 생각이 난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갑진년 묵은해가 가기 전에 왠지 모르게 꼭 둘레길을 가보고 싶다. 주변에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둘레길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걷기 편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북한산 둘레길 도봉산 구간이다. 전날 저녁부터 눈이 내린다. 동짓날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신문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전 10시 반이 지나서 큰마음을 먹고 산행 준비를 한다. 장롱을 뒤져서 겨울용 방한모자와 장갑을 찾아내고, 뜨거운 물에 매실차를 타서 보온병에 담는다.
집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고 방학동에 내려, 간송 전형필선생 옛집 방향으로 걸어간다. 길거리는 대부분 눈이 녹았지만 여기저기 살짝 얼어붙은 빙판길이 있어서 조심하며 천천히 걷는다. 간송 부부 묘소는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찾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묘역이 쓸쓸해 보이지만, 길을 가는 나그네가 선생의 크나큰 뜻을 잠시나마 떠올려 본다. 묘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혼자 걸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다. 뒤에서 남성 두 사람이 걸어오더니 성큼성큼 앞질러 지나간다. 걷는 모습이 상당히 가볍고 경쾌하다. 오전 시간이 꽤 흐른 탓인지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했던 것 같다. 원통사와 우이암으로 올라가는 방향과 북한산 둘레길로 가는 갈림길에서 잠시 이정표를 바라본다. 눈길이라서 조심하며 걸으려면 산으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둘레길 쪽이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다. 간간이 햇볕이 비치기도 하지만,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분다. 햇살이 비치는 양지바른 곳에는 눈이 녹았지만, 그늘진 곳에는 눈이 제법 쌓여있다. 생각 밖으로 눈 내린 겨울 둘레길을 찾는 이들이 많다. 그들도 나처럼 눈 쌓인 둘레길이 눈에 선하여 집을 나섰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많은 사람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일행이 많은 사람들이 편편한 곳에서 과일을 먹는다. 어떤 이들은 종이컵에 막걸리와 소주를 따라서 마시며 왁자지껄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니까 정겨운 생각이 든다.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는 한 잔의 술이 몸의 체온도 올려주고 추위를 견디게 하는 보약이 될 것 같다. ‘이야기와 벽화가 있는 마을’ 앞을 지나 방학동 옛길을 걷는다. 쌍둥이 전망대는 올라가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가 주위 경치를 바라보는 것도 좋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즐겨 찾는 쉼터가 있는 무수골에 도착한다. 예전에 텃밭이 있던 곳인데 언제부터인지 텃밭이 없어지고 캠프장이 들어서 있다. 텃밭을 빌려주고 올리는 수익보다는 캠프장을 운영하여 올리는 수입이 훨씬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수골 쉼터에서 뜨거운 매실차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는다. 옆에 혼자서 맨몸에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서있는 내 또래 같은 분에게 초콜릿을 드시라고 권하니 고맙다고 한다. 배낭에서 노트를 꺼내어 몇 자 적는데 손이 곱아서 글을 쓸 수 없다. 떠오르는 생각을 머리에 담아 두고 다시 배낭을 메고 걷는다. 방학 옛길을 빠져나와 넓은 길을 걷는다. 천년 사찰 도봉사와 능원사를 지나면서 보니까 여성 불자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 오늘이 동짓날이구나. 붉은색의 팥이 악귀를 막아준다는 우리나라 토속신앙과 불교가 결합하여, 절에서는 동짓날 팥죽을 쑤어 신도들에게 공양을 베푸는 게 오래된 전통이라고 한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북한산 탐방 지원센터 앞이다. 평소에는 의정부 호원동 다락원 방향으로 둘레길을 계속 걷지만, 오늘은 더 이상 걷지 않고 도봉산역으로 간다.
춥다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나가서 맑은 공기를 들이마셔야 세상 모습을 볼 수 있다. 차가운 날씨 탓에 콧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때때로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런대로 겨울 둘레길을 걸을 만하다. 갑진년 산행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건강하게 지내다가 남녘에서 봄이 온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면 다시 둘레길을 걸고 싶다. (2025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