衲子가 묻습니다. 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답합니다. 庭前栢樹子. (뜰앞의 측백 나무니라)
만약에 衲子가 덕산스님이나 임제스님 이였으면 어떻게 받아드렸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덕산은 몽둥이를 날리고 임제가 버럭 고함을 칠 일입니다. 깜깜이들 한테는 그것이 양약이라 하네요. 깜깜이 자체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냥 한심이 일뿐입니다. 현재의 禪종 역사에서 경허스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 분이 해인사 조실로 계실때 술과 개고기와 여자등 온갖 잡돌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나온 얘기가 깨달은 마음엔 잡티가 묻지 않으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글쎄요? 깨달은 마음에 잡티가 묻고 안묻고는 알수 없지만 그 행동 자체로서 주위의 눈은 피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주위를 생각했다면 다른 모습으로 행동 했을 수도 있겠죠. 물론 개념치 않았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왔겠죠. 아무런 걸림없는 마음이었는지는 본인 만이 알수 있는 일입니다. 그 후로도 그 전에도 몹쓸 중(僧)들도 있었겠지만 깨닫지도 못한 주제에 술과 여자와 온갖 잡도리를 하면서도 마음에 걸림 없으면 돼, 하는식의 꼴사나운 짓을 하는 땡땡이들을 많이 봅니다. 시근머리없는 인간이 보이는데로 따라하면서 잘난체 하는 것은 꼴 볼견이죠. 가끔은 우리는 껍데기만 보고서 상대를 판단하고는 합니다. 사실 껍데기는 포장지일 뿐이고 그 내용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포장지가 그 내용물과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포장은 단지 포장용으로서의 의미가 많습니다. 포장용의 의미는 겉과 속이다르다는 것입니다. 겉치레는 인간의 속성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보는 기준이 보다 넓어질 것입니다. 그 기준이 미치지 못하면 결국엔 우물안 개구리 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無石"
(衲子란 사람들이 쓰다버린 헝겊을 모아 조각조각 기워서 만든 옷을 납의라 한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떠도는 구름같이, 흐르는 물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雲水납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