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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hibition of Chateau de Versailles From Louis XIV To Marie Antoinette
Portrait of Louis XV of France
by 알렉시 시몽 벨(Alexis-Simon Belle:1674~1734)
2. 루이 15세(Louis XV):프랑스 예술의 절정기(Un moment de perferction de l'artfrancais)
루이 15세(Louis XV:1710~1774)에 이르러 베르사이유 궁을 중심으로 발전한 장식 예술은 유럽 최고의 수준에 이
르게 되었다. 이렇듯 화려한 장식 예술은 프랑스 예술의 전형이 되었으며, 이는 '로코코'라는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풍성한 색채와 섬세함, 그리고 우아함을 특징으로 하는 로코코 양식은 당시 프랑스 왕실의 분위기를 대
변한다. 개인의 감성적 경험이 점차 중요시되고,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의 발전과 더불어 프
랑스의 예술은 이 시기에 비로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State Portrait of Louis XV(대관식 복장을 입은 어린 루이 15세), 1715
by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French Baroque Era Painter, 1659-1743)
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이 유명한 초상화는 루이 15세가 아주 어렸을 때의 모습을 담은 첫 공식 초상화이다.
이 작품은 1715년에 루이 14세가 자신의 손자인 루이 15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남겨 놓고 서거한 바로 다음날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1717년에 완성되어 루이 15세 및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프랑스의 섭정을 맡았던 숙부 오
를레앙 공 필립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이 초상화는 리고에 의해 복제화와 판화로 제작되어 프랑스 전역에 널리
배포되었기 때문에, 어린 루이 15세를 표현한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작품이 제작될 당시의 루이 15세는 아직 대관식을 치르기 전이었지만, 작품 속에서 그는 대관식용 복장인 담비
털을 덧댄 백합꽃 무늬의 망토에 성령 기사단의 목걸이를 걸고, 손에는 왕홀을 들고 있다. 왕권의 상징물인 왕관
과 '정의의 손'은 그의 곁에 있는 방석 위에 놓여 있다. 또한 왼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듯한 그의 자세는 왕
의 지휘권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표현 방법이다. 리고는 1701년에 제작된 유명한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모델로
하여 이 작품을 제작했지만, 작품 속의 어린 루이 15세가 커다란 망토에 압도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를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또한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은 비단을 덧대고 주름을 잡은 붉은 천이 왕좌
주변에 마치 닫집처럼 펼쳐져 있는데, 이 붉은 천은 초상화의 공식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루이 15세의 어린 아이다운 매력과 우아함으로 인해 위압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져 있는
느낌이다. 이렇듯 리고가 비슷한 느낌으로 루이 14세와 루이 15세를 그린 각각의 초상화는 군주가 육체적으로 죽
음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후계자가 그 뒤를 계승함으로써 프랑스 왕실의 영속성이 유지된다는 의미를 내포
하고 있다.
Louis XV and Infanta Mariana Victoria of Spain(루이 15세에게 약혼녀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큐피드), 1724
by 알렉시 시몽 벨(Alexis-Simon Belle:1674~1734)
프랑스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아이의 혼인 문제가 가장 큰 화두이자 가장 뜨거운 정치
적 이슈였다. 따라서 1715년에 루이 14세이 뒤를 이어 불과 다섯 살의 아이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혼인과 관련
된 문제에 왕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721년 스페인과 가족 협정을 맺게 된 프랑스 왕실은,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당시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5세와 엘리자베타 파르네세 사이에서 태언 막 세 살이 된
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보르본을 루이 15세와 혼인시키고, 또한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 필립의 딸들
중 한 명을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인 아스투리아스 왕자와 혼인시킴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간의 관계를 더
욱 공고히 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22년, 루이 15세와 결혼할 때까지 왕실 교육을 받기 위
해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가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공주는 베르사이유 궁정에서 '왕비 공주님'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루이 14세와 마드무아젤 드 라 발리에르 사이에서 태어나 적자로 인정받았던 콩티 공주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724년에 스페인의 아스투 리아스 왕자가 사망하여 오를레앙 공의 딸
과의 결혼 계획이 무산되고, 왕실 내에서 루이 15세가 아직 어린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가 아닌, 결혼 적령기에
든 다른 여인과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됨에 따라, 이중 결혼으로 스페인의 관계를 공고히
하겠다는 프랑스 왕실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는 1725년 4월에 스페인
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루이 15세는 그 해를 넘기지 않고 곧바로 일곱 살 연상의 폴란드 공주인 마리 레슈친스키
와 혼인했다. 이 작품 속에서 오른쪽에 붓과 팔레트를 든 화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큐 피드는 방금 완성된
듯한 여섯 살의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초상화를 그녀의 약혼자인 열네 살의 루이 15세에게 선보이고 있는데, 혼인
이 결정되면 서로 초상화를 주고 받았던 당시 왕실의 관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약혼자가 취
하고 있는 관례적인 자세나,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호화로운 의상을 보면 이 작품이 공식 초상화
임을 알 수 있으나, 작품의 매력적인 연출 방식이나 주인공들의 앳된 얼굴들로 인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훨씬 부
드럽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1724년에 궁전 관리부의 주문으로 제작되었고, 원래는 루이 15세의 전신을 모두 표
현한 그림이었으나 후에 타원형으로 잘라내어 그 형태를 다시 잡은 것이다.
Portrait of Marie Leczinska(프랑스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1725년경
by 프랑수아 알베르 스티에마르(Francois Albert Stiemart:1680-1740)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간의 이중 결혼 계획이 무산되어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가 1725년 4월에 자국으로 돌아간
지 몇 달 후, 루이 15세는 폐위된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1세의 딸인 마리 레슈친스카 공주와 혼례를 올렸다.
이 초상화는 오랫동안 장 바티스트 반 루 또는 피에르 고베르가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실제로는 이 두 화가들보다 비교적 덜 알려진 프랑수아 스티에마르가 그린 작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1726년에 제
작된 이 작품은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레슈친스카의 모습을 담은 초기 공식 초상화들 중 한 점이다.
작품 속의 마리 레슈친스카는 베르사이유 궁의 정원으로 보이는 장소를 거닐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의 앞에 있는 작은 큐피드는 백합꽃 무늬가 수놓아진 방석 위에 곱게 포장한 왕관을 들고 앞길을 인도하고
있고, 동양풍의 복장을 한 시종이 백합꽃 무늬로 장식하고 담비 털을 덧댄 망토를 받쳐 들고 왕비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왕비의 실물을 볼 수 없었던 스티에마르는 장 바티스트 반 루가 그린 왕비의 초상화
를 보고 얼굴을 따라 그렸다. 마리 레슈친스카의 자세는 장 바티스트 상테르가 1709년에 그린 루이 15세의 어머
니, 부르고뉴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본 따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스티에마르는 기존에 있던 다른 공식 초상화를
단순히 모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일찍 세상을 떠난 부르고뉴 공작부인에 대한 자신의 경의를 담으려 했던 것으
로 보인다.
Portrait of Louis XV, 1730
by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French Baroque Era Painter, 1659-1743)
Louis XV en armure(갑옷을 입은 루이 15세), 1751년경
by 카를 반 루(Carle van Loo:French Painter, 1705-1765)
카를 반 루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1748년에 루이 15세의 새로운 공식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 당시 그는 출전을 앞두고 천막 안
에서 말에 오르려는 루이 15세의 모습을 초상화 속에 표현했는데, 전통적인 공식 초상화를 기대했던 왕실의 요구
에는 부합되지 않는 작품이었다. 하여 이후 1750년에 왕실에서는 반 루에게 또 다른 왕의 공식 초상화를 한 점 더
그릴 것을 주문했으며, 그는 보다 전통적인 왕의 이미지를 담은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1751년 살롱에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후에 베르사이유 궁의《그랑 아파르트망》으로 옮겨져 이야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 맞은편에 놓여졌다. 그 후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게 된 이 작품은 루이 15세의 전성기인
이후 10년 동안 왕의 공식 초상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현재 베르사이유에 소장되어 있는 이 초상화는 매우 정
교하게 만들어진 복제품으로, 카를 반 루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것이 원본 작품이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망토와 갑옷을 걸친 루이 15세를 표현한 전신 초상화로, 마치 전쟁터의
막사를 연상시키는 듯한 주름 잡힌 천 장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이 15세는 한 손은 허리춤에, 다른 손은 투구 위에 올려 놓은 관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투구 아래에는
백합꽃 무늬가 새겨진 사령봉이 놓여 있다. 그 주위로 볼 수 있는 안락의자와 접이식 의자, 그리고 화려한 직물로
덮인 호화로운 가구들은 베르사이유 궁에 있는 가구만큼이나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루이 15세를 '전쟁의 왕'으로 묘사한 수작으로, 루이 14세의 다른 수많은 초상화들은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 스타일의 화려한 갑옷을 통하여 중세 시대의 전설적인 정쟁 영웅이었던 왕실의
선조들 및 프랑스 왕실의 수호 성인인 성 루이를 루이 15세의 이미지 속에 담고자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Allegory on Birth of Marie-Zephyrine of France(1750-1755), 1750
Daughter of Louis, Dauphin of France
1750년 마리 제피린 드 프랑스의 탄생에 대한 우의화
by 샤를 조제프 나투아르(Charles-Joseph Natoire:French Rococo Era Painter, 1700-1777)
루이 15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는 1745년, 자신의 사촌이자 스페인의 공주인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와 혼인했
다. 하지만 이듬해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1747년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딸 마리 조
제프 드 삭스 공주와 재혼했다. 새로운 왕세자비는 몇 차례의 유산 끝에 1750년 아이를 출산했지만, 모두가 바
라던 왕자가 아니라 딸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마리 제피린은 궁정에서 '마담 프티트'라고 불렸지만 생후 5년 만
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실에서 고대하던 아기가 태어나면 당연히 이를 기념하는 작품을 주문 받게 될 것이
라고 예상했던 화가 샤를 조제프 나투아르는 마리 제피린 공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탄생과 관련된 역사화는 우의화로 제작하는 전통에 따라 이 작품 역시 우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프
랑스를 상징하는 여성이 백합꽃 무늬가 수놓아진 망토를 두른 채 결혼의 신 히멘의 팔에서 어린 공주를 건네받고
있으며, 출산의 여신 주노(헤라)와 그녀의 전령사인 여신 이리스가 그 모습을 따스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한편, 소문의 여신 파마는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트럼펫을 불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프랑스의
용맹한 기상을 상징하는 기사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전경에는 센 강을 상징하는 여성이 항아리에 기대고 누워
강이 지나는 지역에서 수확된 듯한 과일을 선물하고 있으며, 그 곁에는 마른(Marne) 강을 상징하는 여성의 모습
도 보인다.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으며, 그 왼편의 두 정령은 프랑스와 폴란드의 연합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후경의 오른쪽에는 왕국의 수도를 상징하는 튈르리 궁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프랑스 국민들이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며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다. 나투아르는 왕실에서 태
어날 아기가 왕자일 것이라 속단하고 그림 속의 아이를 남자아이로 표현했다가 공주의 탄생 소식을 듣고 여자아
이로 수정했고, 1750년 9월 2일 이 작품을 베르사이유 궁에 선보였다.
Louix XV en manteau du sacre(1710~1774), 1763
대관식 복장을 입은 루이 15세
by 장 마르샬 프레두(Jean-Martial Fredou:1711~1795)
1759년, 궁전 관리부 총감은 카를 반 루가 1750년에 그렸던 루이 15세의 초상화를 교체하기 위하여 그의 조카인
루이 미셸 반 루(Louis-Michel van Loo:French Painter, 1707-1771)에게 새로운 초상화를 의뢰하였다.
당시 7년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새로운 초상화에서는 전쟁을 진
두 지휘하는 왕의 모습 대신, 대례복을 입고 군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는 모습을 담기로 했다.
반 루는 1701년에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대형 초상화의 기본이 되었던 전통적 양식을 차용하여 루이 15세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작품 속에서 궁전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실내장식을 배경으로 위엄 있는 왕좌 앞에 서 있
는 루이 15세는 백합꽃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망토를 두르고 있으며, 이 망토 속에는 전통적으로 랭스 대성당에
서 거행되는 대관식 후에 프랑스 왕에게 수여되는 성령 기사단의 견습 기사 복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목에는 성령 기사단의 목걸이와 1760년에 스페인의 왕으로부터 받은 황금 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걸고
있다. 또한 그의 옆에는 왕관과 '정의의 손'이 놓여 있고 손에는 왕홀을 들고 있으며, 샤를마뉴 대제의 검이자
프랑스 왕들에게 대대로 물려지는 검인 '주아예즈(Joyeuse)'를 허리에 차고 있다.
이와 같은 왕가의 상징물들은 원래 생 드니 수도원에서 보관되는 것들이지만, 초상화의 제작을 위하여 루이 15세
가 직접 명령하여 반 루에게 전해진 것이다. 루이 15세에게 여러 번 자세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로 반
루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이 작품이 1761년의 살롱에서 소개되었을 때, 루이 15세와 거의 흡사하게 그려진 초
상화 속 얼굴과 위엄있고 웅장한 화면의 구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공식 초상화라는 용도에 따라, 이 작품은 반 루 본인뿐만 아니라 왕실 회화 아틀리에에 소속된 여러 화가들에 의
해 다량으로 복제되어, 국가의 주요 행정 기관들 및 대사관, 그리고 이웃 국가들의 왕들에게 전달되었다.
지금 전시되어 있는 이 작품 역시 반 루의 원작을 바탕으로 장 마르샬 프레두가 복제한 것이기는 하나, 당시 이
작품은 다른 곳으로 보내지지 않은 채 왕실에 소장되어 있다가 이후 베르사이유 궁으로 옮겨졌다.
루이즈 엘리자베스 드 프랑스와 앙리에트 드 프랑스, 1730~1732년경
Elisabeth de France(1727~1759) et Henriette de France(1727~1752)
by 피에르 고베르(Pierre Gobert:French Painter, 1662~1744)
루이 15세는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첫째가 1727년 8월 14일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 루이즈 엘리자베스와 안 앙이레트였다. 둘 중에서 언니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르네시오 왕비의 막내 아들이자 엘리자베스 본인과는 오촌 지간이 되는 파르마 공
펠리페 데 보르본과 1739년에 결혼했다.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여러 딸들 중에서 유일
하게 결혼을 했던 그녀는 1749년부터 파르마에서 살다가 1757년에 베르사이유로 돌아왔는데, 결국 파르마 공국
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2년 후이 1759년 12월에 베르사이유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한편,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지만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앙리에트 공주는 1752년 2월에 베르사이유에서
눈을 감았고, 궁정 전체가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매력적인 초상화는 이 둘의 여동생이자 '마담 트루아지
엠(셋째 공주)'로 불렸던 마리 루이즈의 초상화와 한 쌍을 이루는 작품으로 루이 14세 통치 말기와 루이 15세
통치 초기에 궁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초상화가인 피에르 고베르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똑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서로 대비를 이루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두 어린 공주들은 드레스의 파니에 위에 레이
스로 짠 덧옷을 입고 있으며,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아이들의 유희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한 마리 안고 있다.
후경의 오른쪽에 있는 조각상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를 보면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 베르사이유의 정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Marie Adelaide of France as Diana, 1745년 이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아델라이드 공주(Madame Marie Adelaide:1732~1800)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마리 아델라이드는 1732년에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다. 루이 15세와 마리 레
슈친스카는 여덟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델라이드 공주의 여자 형제들은 1727년에 태어난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
는데, 아델라이드 공주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아버지 루이 15세와 함께 베르사이유에서 생활했으며, 루이 15
세가 서거하고 조카인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도 궁전을 떠나지 않았다.
1745년, 루이 15세는 슈아지 성의 침실 문 위쪽 벽을 장식하기 위하여 장 마르크 나티에로 하여금 그때까지 자
신과 함께 베르사이유에 살고 있었던 두 딸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는데, 그때 제작된 초상화가 바로 엘리자베
스 공주의 쌍둥이 자매인 앙리에트와 아델라이드 공주의 초상화이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1739년에 스페인의 펠
리페 왕자와 결혼하여 프랑스를 떠났고, 다른 자매들은 1738년부터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베르사이유에 남아 있었던 루이 15세의 딸들은 이 두 사람뿐이었다.
나티에는 과거의 작품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던 당시의 관행대로 1742년에 그렸던 다른
초상화를 바탕으로 앙리에트 공주의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그 작품에서 앙리에트를 꽃의 여신 플로라의 모습으
로 표현했다. 이 초상화는 앙리에트 공주의 초상화와 쌍을 이루는 작품으로, 황혼을 배경으로 비스듬한 자세를
하고 있는 아델라이드 공주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 속의 아델라이드 공주는 동물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한
쪽 어깨를 드러낸 채 한 손에는 활을 들고, 또 다른 손으로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뽑아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상징들을 갖추고 있다.
이 작품과 앙리에트 공주의 초상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7세기 후반에는 모델을 신화 속의 인물로 표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화려한 초상화가 등장했다. 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성품이나 개성과 비슷한 특
징을 가지고 있는 신의 모습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
했으며, 서로 상당히 유사한 구성을 지닌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되기도 했다.
모델을 신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처음에는 우의적인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인물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초상화를 그릴 당시 겨우 13살에 불과했던 어
린 아델라이드 공주를 독립적이고 대담한 이미지를 가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녀
의 미모뿐만 아니라 확고한 성격 또한 잘 드러내고 있다.
Henriette of France as Flora, 1742
꽃의 여신 플로라로 표현된 앙리에트 공주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Portrait of Madame Maria Leszczynska(1703-68)(마리 레슈친스카 왕비의 1748년 초상), 1762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1725년에 루이 15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 마리 레슈친스카는 42세가 되던 해인 1748년에 장 마르크 나티에에게
자신의 초상화를주문했다. 당시에나티에는 국왕 부처 및 공주들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하면서 그 실력을 인정
받았던 대표적 화가였다. 1748년에 살롱에 전시된 이 초상화에서 레슈친스카 왕비는 대례복이 아닌 평범한 복장
을 한 모습으로 수수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가 직접 요청한 것이었다고 한다.
부산스러운 궁정을 벗어나서 조용한 곳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을 이런 방식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이 왕비의 실제 모습과 대단히 닮았다는 점을 폰이 평가했으면서도, 왕비의 모습을 너무
소박하게 그렸다는 점에 대해서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왕비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
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왕비는 모피로 가장자리를 두른 붉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레이스 모자를 쓴 채 부드
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복음서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든 것 같은 모습은 그녀의 독실한 신앙심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녀가 왕실 사람임을 알려주는 모티프는 안락의자와 등받이에 보일 듯 말 듯하게 그려진 몇 개의 백합
문양뿐이다. 나티에가 그린 이 초상화는 훨씬 더 공식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왕비의 다른 초상화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비는 이 작품에 대단히 만족했고 이후부터는 나티에가 아닌 다른 어떤 화가에게도
초상화를 의뢰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티에에게 이와 동일한 작품을 여러 점 복제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렇게 복
제된 작품들을 궁정 대신들의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로 선물하기도 했으며, 판화로 제작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1769년에 고블랭 왕립 제조소에서는 나티에가 그린 왕비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태피스트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퐁트브로 수도원의 루이즈 공주(Madame Louise), 1748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 사이에는 딸이 여덟 명이나 있어서 1738년 국왕 부처는 제일 어린 네 명의
딸들을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보내기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당시 다섯 살이었던 빅투아르 공주와 네 살인 소피
공주, 그리고 두 살인 펠리시테 공주와 아직 첫돌도 지나지 않았던 루이즈 공주가 궁을 떠나게 되었다.
국무장관 플뢰리 추기경은 공주들이 베르사이유 궁에 머무르며 지출하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여겼는데, 실제로
공주들은 각자 여러 명의 하인들을 두어야먄 했던 것이다. 네 명의 공주가 떠난 이듬해에는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가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와 결혼을 하여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고, 베르사이유 궁에는 앙리에트 공주와
아델라이드 공주 만이 남게 되었다. 풍트브로 수도원의 수녀원장에게 맡겨진 어린 공주들은 무용과 음악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국왕 부처는 단 한번도 공주들을 찾아오지 않았고, 빅투아르 공주는 열 살, 소피와
루이즈 공주는 열 두 살이 되어서야 부모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펠리시테 공주는 끝내 부모를 다시 보
지 못하고 174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음으로는 늘 딸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루이 15세는 1747년에 장
마르크 나티에를 수도원으로 보내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특히 성장한 딸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로 아내 레슈친스카를 기쁘게 해 주고자 했던 그는 이 일을 모두 비밀리
에 진행했다. 이렇게 새서 나티에는 당시 궁정에 그 모습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어린 공주들의 첫 공식 초상화
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가 그린 딸들의 초상화를 보고 매료되었던 왕비는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도 그려줄 것을
주문했을 정도였다. 이 작품은 나티에가 그린 그림 중에서도 가장 아니가 어린 루이즈 공주를 그린 것으로,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그녀는 겨우 열 살이었다. 상상 속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녀는 실제로 퐁트브로
수도원에서는 입지 않았을 호화로운 궁정 복장을 하고 손에는 작은 꽃바구니를 들고 있다.
이 초상화를 특히 마음에 들어했던 레슈친스카 왕비는 친구인 뤼인 공작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아이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슬픔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특별한 아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 무척 다정한 아이이지요." 루이즈 공주는 열세 살 때 베르사이유로 돌아왔고, 1770년 이후부터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종교 활동에만 매진했다.
Infanta Isabelle de Bourbon-Parme(이사벨라 드 보르본 파르마 공주, 1741~1763), 1749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1741년 12월 31일 스페인 궁정에서 태어난 이사벨라 드 보르본 파르마는 루이 15세의 손녀이다.
1727년에 루이 15세의 장녀로 태어난 엘리자베스 공주는 열두 살 때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스페인의 왕으로 등극
한 펠리페 5세의 아들인 펠리페 드 보르본 왕자와 결혼하여 인판타, 즉 스페인의 공녀8가 되었고 불과 열네 살의
나이에 이사벨라를 낳았다. 1748년에 펠리페 왕자는 파르마 공작이 되었고, 가족들과 함께 모두 이탈리아로 이주
했다. 이 작품은 이사벨라와 엘리자베스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베르사이유에서 지낸 몇 달 동안 장 마르크 나
티에가 그린 것이다. 당시 나티에는 루이 15세의 딸들과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작품 속의 파르마 공주는 당시 일곱살이었지만, 붉은 명주실과 금실로 자수가 놓여 있고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흰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어 아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드레스 밑에 입은 '파니에'로 인해 한껏
부풀어진 드레스 덕분에 그녀의 태도는 사뭇 딱딱해 보인다.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게 묘사되어 있는 것은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얼굴뿐이다. 공주의 뒤쪽에는 무거운 분위기의 주름진 직물 장식이 그려져 있고, 그 뒤
로는 상상 속의 풍경이 표현되어 있는데, 나티에는 이후 어린 부르고뉴 공작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배경을 처리했다. 이사벨라는 1760년에 오스트리아 제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자이자 마리 앙투아네트
의 오빠이며 훗날 요제프 2세로 황제에 등극하는 요제프 황태자와 결혼했으나, 비엔나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
아 1763년에 요절했기 때문에 왕후가 되지는 못했다.
Dauphine Marie-Josephe de Saxe(왕세자비 마리 조제프 드 삭스, 1731~1767), 1751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루이 15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는 1745년 2월에 스페인의 마리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와 결혼했으나, 그 이듬해
인 1746년 7월에 아내가 첫 딸을 낳고 며칠 후에 숨을 거뒀고 이때 태어난 딸마저 두 돌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왕실의 영속을 위해서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1747년 2월에 마리 조제프 드 삭
스와 재혼을 했다.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마리 조제프 드 삭스는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트 3세
의 딸로, 열여섯의 나이에 베르사이유 궁에 입성했다. 드레스덴 궁정에 있던 프랑스 대사는 그녀가 프랑스로 오
기 얼마 전에 그녀의 용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녀는 금발머리와 생기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크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재기 발랄한 느낌을 주는 외모이죠.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귀여운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리하고 재치있었던 그녀는 전처를 잃은 슬픔에 크게 상심하고 있던 남편으로
부터 점차 사랑을 받게 되었다. 장 마르크 나티에가 스무 살의 왕세자비를 담아낸 이 작품은 왕세자비의 공식
초상화가 갖춰야 할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그녀는 자수가 놓인 화려한 궁정 예복을 입고 손에는 부채
를 들고 있으며, 담비 털이 둘러져 있고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백합꽃으로 장식이 된 푸른 벨벳 망토를 둘러 왕
실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의 유행에 따라 머리에는 화장 가무를 뿌렸고, 뺨에는 붉은 연지를
발랐다. 1765년에 남편인 왕세자 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녀는 늘 이렇게 단장을 했다. 작품 속의 왕세
자비는 위엄에 찬 모습이며, 배경에는 나티에가 상상으로 표현한 기둥과 주름 장식이 그려져 있다.
그 뒤로는 <레토의 분수>가 있는 베르사이유 궁의 실제 정원 풍경이 펼쳐져 있다. 이렇듯 나티에는 그녀가 베르
사이유 궁안에 있는 모습을 통해 '미래의 왕비'에게 어울릴 만한 초상화를 완성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왕세
자가 숨을 거둔 후 1767년에 세상을 떠나 결국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 초상화는 1751년 살롱에 전시
되었는데, 당시는 그녀가 새로운 왕위 계승자인 부르고뉴 공작을 낳아 궁정에서의 지위가 확고해진 시기였다.
그녀 본인은 이 초상화가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러 차
례 모사가 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매듭을 만들고 있는 아델라이드 공주(Madame Adelaide), 1756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1750년대에 들어서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의 넷째 딸인 아델라이드 공주는 그녀가 평소 바랐던 대로
국왕인 아버지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녀는 베르사이유 궁 2층에
있는 왕의 침실과 매우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왕세자인
오빠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뿐만 아니라 왕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된 그녀는 궁에서 공식적인 실세가
되었다. 장 마르크 나티에는 이 작품에서 매듭 짓기를 하고 있는 스물 네 살의 아델라이드 공주를 담아냈다.
18세기 중반에 궁정에서 크게 유행했던 매듭 짓기는 베틀 따위에 쓰는 북을 이용해서 대마나 아마 또는 비단으
로 된 끈으로 최대한 단단한 매듭을 짓는 놀이로, 여인들이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 즐기는 소일거리였다.
그 외에 궁정의 여인들이 즐겼던 놀이로는 천의 올을 풀어서 금실을 빼내거나, 북을 이용해서 한오라기의 실로
작은 꽃들을 만드는 놀이 등이 있었다. 이 작품 속에서 공주는 평범한 놀이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모습에서는
전체적으로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실을 팽팽하게 잡아 당기면서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
보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강인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왕실에서 주문하여 제작된 이 작품은 공식 초상
화처럼 널리 보급하기 위해 만든 작품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가 분홍색의 화려한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기는 하지만, 배경의 주름 잡힌 천에 그려져 있는 백합 무늬 외에는 그녀가 왕실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다른
요소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왕실의 다른 초상화들과 달리 살롱에 전시되지 않았고 베르사이유
궁 1층에 있는 그녀의 여동생인 빅투아르 공주의 방을 장식하게 되었다.
Louis Joseph Xavier de France Duke of Burgundy , 1754
루이 조제프 자비에 드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1731~1761)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루이 조제프 자비에 드 프랑스는 1751년 9월 13일, 루이 15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
조제프 드 삭스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왕권은 오로지 남자만이 계승할 수 있었기에, 그의 탄생은 왕실의
영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751년에 이미 그의 어머니인 마리 조제프 드 삭스 왕세자비와 1750년에 태어난 공
주의 초상화를 그려 그 실력을 인정 받았던 장 마르크 나티에는 왕세자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1754년
에 이 작품의 제작을 의뢰 받게 되었다. 나티에는 1749년에 그린 이사벨라 드 보르본 파르마 공주의 초상화에
사용했던 방식을 차용하여 작품 속의 장소는 궁전으로, 그 뒤로 펼쳐진 배경에는 상상 속의 풍경을 담았다.
약간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향해 서 있는 왕자는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을 때까지 남자 아이에게 여자 아이의 옷
을 입혔던 당시 궁정의 관례에 따라 담비 털로 장식된 푸른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당시에 일곱 살이 되
지 않은 남자 아이들의 양육은 전적으로 여자들에게 맡겨졌으며, 특히 베르사이유 궁에서는 왕실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왕실 아이들의 거처>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어머니로부터 '사랑스러운 귀염둥이'라고 불렸던
루이 조제프는 7살이 되던 날, '부르고뉴 공작'이라는 정식 칭호를 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자신의 성별에 맞는
남자 옷을 입기 시작했으며, 교육을 담당할 가정교사를 배정 받게 되었다. 왕위 계승자로 태어난 부르고뉴 공
작은 이 작품 속에서 설령 기사단의 십자가가 붉은 비단 끝에 달린 황금 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착용한 모습
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 기사단은 프랑스 왕정에서 가장 명망 높은 기사단으로 세례를 받을 때 왕의 아들이
나 손자만이 기사단의 상징인 십자가를 부여 받을 수 있었고, 황금 양모 기사단 또한 대단히 저명한 기사단이
었다. 이처럼 작품에 표현된 궁전이라는 배경과 기사단을 상징하는 장신구들, 그리고 화려한 의상과 위엄 있는
태도 등을 보면, 작품 속의 주인공이 장차 왕이 될 인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공식 초상화로서 손색
이 없는 이 작품은 1755년 살롱에 출품되었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은 불과 아홉 살 때 나무로 만든 장난감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따라서 왕위는 그의 동생인 베리 공작이 계승하게 되었고 후일 그가 왕위에 올라
루이 16세가 되었다.
Charles-Philippe and his sister Marie Adelaide Clotilde Xaviere, 1763
루이 15세의 손자 샤를 필립 드 프랑스, 아르투아 백작(1757~1836)과 그의 누이 마리
아델라이드 클로틸드 드 프랑스(1759~1802)
by 프랑수아 위베르 드루에(Francois-Hubert Drouais:French Neoclassical Painter, 1727-1775)
1757년, 루이 15세의 아들인 루이 페르낭 왕세자 부부의 셋째와 넷째 아들이자 훗날 각각 루이 16세와 루이 18세
가 되는 베리 공작과 프로방스 백작을 하나의 화폭에 담은 초상화를 제작했던 프랑수아 위베르 드루에는 그로
부터 5년 후에는 그 두 왕자의 동생이자 훗날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 그리고 누이들 중 가장 맏이이
자 후에 피에몬테-사르데냐의 왕비가 되는 클로틸드 공주를 담은 초상화도 제작하게 되었다.
1763년에 살롱에 출품된 이 작 품은, 아이들의 고모인 아델라이드 공주의 요청에 따라 그 이듬해에 복제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작품 속의 어린 왕자와 공주는 목에 리본을 단 숫염소를 타고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궁정 예복으로 인해 제법 격식을 갖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게다가 아르투아 백작의 목에
걸려 있는 설령 기사단과 황금 양모 기사단의 리본 두 개를 통해 이 아이가 프랑스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인물
중 한 명이자 '프랑스의 왕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의 초상화를 자주 그렸던 드루에는 선배 화가인 알
렉시 시몽 벨이나 장 바티스트 반 루, 혹은 장 마르크 나티에가 발전시켰던 작품 양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
시켰는데, 이 작품 속의 사실적이면서 시적인 정취가 풍기는 배경의 표현이 특히 드루에의 새로운 시도를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베르사이유 궁에서는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름답게 정원을
조경하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러한 유행은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1770년부터 178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트리
아농 궁전 주변의 정원을 대대적으로 조경하면서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Louis of France, The Dauphin, in the uniform of Colonel General of the Dragoons in 1765, 1767
왕세자 루이 드 프랑스(1729~1765)
by 알렉상드르 로슬랭(Alexandre Roslin:Swedish Painter, 1718-1793)
왕세자 루이 드 프랑스는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성년이 될 때
까지 생존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르네시오 사이에서 태어난 마리아 테
레사 라파엘라 공주와 1745년에 결혼했지만, 아내는 이듬해에 딸을 낳은 후 숨을 거두고 말았고 그때 태어난
딸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1747년에 폴란드의 왕이자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인 작센의
공주 마리 조제프 드 삭스와 재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게 되었는데 그 중 아들 셋은 훗날
루이 16세(재위 1774년~1792년), 루이 18세(재위 1814/1815년~1824년), 그리고 샤를 10세(재위 1824년~1830년)
가 되어 프랑스를 통치하게 됐다. 파리에서 활동한 스웨덴 출신의 화가 알렉상드르 로슬랭은 1760년대에 들어
왕세자 루이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여러 번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176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왕세자
루이를 프랑스 기병대 중 하나인 용기병의 제복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한 초상화이다.
로슬랭은 원래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가 파스텔화로 제작했던 초상화를 토대로 하여 왕세자의 얼굴을 그릴 예
정이었지만, 당시 왕세자가 폐병 때문에 캉탱 드 라 투르의 초상화 속 얼굴과 달리 무척 수척해지게 되었고,
이에 왕세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기 위하여 로슬랭에게 다시금 포즈를 취해 주었다.
결국 왕세자 루이는 폐병을 이기지 못하고 같은 해 말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작품에서는 왕세자가 입고
있는 용기병 대장의 제복이나 그가 착용하고 있는 온갖 장신구들이 차가운 색조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무척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 왕세자가 가진 군인으로서의 자질, 즉 지휘관으로서의 재능과 용맹함을
찬미하고자 했던 작품의 주제가 잘 드러나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왕세자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표
현해 낸 수작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
프랑스 왕실 문장이 들어 있는 새로운 휘장(두 번째 모델), 1732-1740년경
양모와 명주로 짠 태피스트리, 355x275cm
샤를 르 브룅이 밑그림을 그리고 고블랭 왕립 제조소에서 제작한 프랑스 왕실의 이 휘장은 무려 70년이나 사용
되었다. 이후 1727년에는 이를 교체하기 위하여 프랑스 황실 문장이 담긴 새로운 휘장의 모델 제작이 시작되었
다. 이에 피에르 조스 페로는 1732년에 트롱프뢰유 효과가 강조된 새로운 휘장의 밑그림을 그렸으며, 이를 바탕
으로 프랑스 왕실의 두 번째 휘장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휘장의 디자인은 르 브룅의 것에 비해 단순해졌
다. 가운데 있는 방패 문양 안에는 프랑스 왕실의 문장인 백합 무늬만을 그려 넣고 인물상은 최대한 배제하여
여백을 살렸는데, 이는 훗날 '루이 15세 양식'으로 불리게 되는 새로운 유행을 따른 구성 방식이었다.
또한 기사단의 목걸이 두 개가 프랑스 왕실의 문장이 담긴 방패 문양 주의를 둘러싸고 있고, 이 전체가 금 도금
된 청동으로 만든 타원형의 받침 장식에 고정되어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왕관이 올려져 있고 그 아래 쪽에는
왕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백합꽃으로 장식된 '왕홀'(정치적 권력)과 '정의의 손'(사법권)이 그려져 있다.
작품의 아래 쪽에 그려져 있는 투구는 왕이 군사를 통솔권을 가진 수장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구성들의 바탕에는 전체 장식이 두드러져 보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데, 가장 아래
쪽에 깔려 있는 것은 담비 털을 덧대고 백합꽃 무늬로 장식한 왕의 망토이며, 이 망토를 활짝 펼쳐 걸어 둔 금
으로 도금된 청동 벽감은 마치 왕좌의 등받이 부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또한 당시 17세였던 젊은 루이 15세는 자기만의 상징이 없었기 때문에 작품의 제일 꼭대기 부분에 선왕 루이
14세의 상징인 태양빛으로 둘러싸인 로도스의 아폴론 얼굴을 그려 넣었고, 이를 통해 대를 이어가는 정치의 연
속성을 표현하려 했다. 이렇듯 새로 제작된 휘장은 매우 다채로우면서도 명료한 구성 속에 왕실의 다양한 상징
물들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요소들은 왕실의 초상화에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
진 액자틀로 감싸져 있다. 전체적으로 왕의 공식 초상화 양식과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또한 다양한 건축적
요소들을 감싸고 있는 꽃 넝쿨 장식을 사용함으로써 왕실의 문양과 상징물들이 갖는 엄격한 정치적 느낌을 순화
하고 있다. 이 밑그림을 사용한 휘장은 모두 스물여덟 점이 제작되었고, 프랑스 왕실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으
로서 왕실의 여러 거처나 대사관에 배치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앙티샹브르드 뢰유- 드-뵈프(둥근 천장창이 있는 대기실)>에도 이 휘장 세 점이 걸려 있었다.
Cerf aux abois assailli par sept ou huit chiens, 1729
일곱, 여덟 마리의 사냥개들에 포획된 사슴
by 알렉상드로 프랑수아 데포르트(Alexandre Francois Desportes:French Baroque Era Painter, 1661-1743)
1729년, 궁전 관리부의 총감이었던 앙탱 공작은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루이 15세를 위한 개인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사슴 정원》이 있는 궁전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는 공간의 대대적인 보수를 지시했다.
그곳은 1726년에 오래된 '망사르드 지붕(프랑스의 건축가 프랑수아 망사르가 고안한 지붕으로, 경사가 완만하다
가 급하게 꺾인 지붕. 아래 지붕에 채광창을 내어 다락방으로 쓰게 되어 있다.)'을 개조하여 궁정 요리 연구실
로 사용되었다가 1728년에는 다시 간단한 보수를 통해 조류 사육장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이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통하여, 그곳은 목제에 금 도금을 한 내장재와 새로운 벽난로, 그리고 프랑수아 데 포
르트와 장 바티스트 우드리가 사냥을 주제로 그린 여섯 점의 회화 작품 덕분에 아름다운 금장식이 있는 방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특히 이 방의 장식을 위하여 데포르트는 <두 마리의 개들에 사로잡힌 멧돼지>,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 <여섯 마리의 개에게 공격 당한 늑대>, 그리고 지금 이 작품인 <일곱 여덟 마리의 사냥개들에 포 획된 사슴> 등 네 점의 작품을 제작했고, 우드리는 <여우 사냥>과 <붉은 사슴>이라는 두 작품을 제작했다.
이렇듯 이 공간이 '사냥'을 주제로 한 회화 작품으로 채워졌던 이유는 당시 루이 15세가 통치 초기에 사냥개들
을 몰고 사냥을 나가는 것을 무척 즐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1736년에 루이 15세의 정부인 마이 부인
의 처소로 바뀌었다가 후에 퐁파두르 부인의 욕실로 개조되었고, 루이 16세 때에는 대포 보관실로 사용되었다.
하여 이곳에 걸려 있던 작품들 역시 주인을 잃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그 중 일부 작품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현재는 이 작품과 우드리의 두 작품 등 여섯 점 중 총 세 점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루이 15세가 베르사이유에 있던 자신의 거처를 얼마나 세련되고 섬세하게 장식했
는지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Madame de Pompadour avec les attributs de Diane, 1746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퐁파두르 부인
by 장 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French Rococo Era Painter, 1685-1766)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잔 앙투아네트 르 노르망 데티올은 자신의 가족과 가까이 지내던 부유한 농장주의 조카인
샤를 프랑수아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1741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후인 1745년 2월에 스물 셋의
나이로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관례에 따라 입궁 자격을 얻기 위해 귀족 직위를 받았으며,
마침내 9월에 베르사이유의 한 공간에 거처를 마련하게 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후작부
인이 된 자신의 정부를 위해 궁정 초상화가인 장 마르크 나티에에게 공식 초상화를 주문했다.
나티에는 자신이 1743년에서 1745년 사이에 그렸던 수많은 여성 초상화에 사용했던 방식대로, 퐁파두르 부인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 당시에는 작품의 모델을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의 모습으
로 표현하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 작품에서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들고 있는 활과 화살이 가득 들어 있는 화살통,
그리고 상체에 두르고 있는 동물 가죽을 통해 그녀가 사냥의 여신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곧 크게 인기를 얻었으며, 복제화와 모사작이 여러 점 제작되었다. 국왕의 정부로 실세를 누리게 된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1751년에 자신의 동생을 궁전 관리부의 총감으로 임명하여 왕의 예술 관련 정책들을 일임
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 작품을 동생에게 선물했다. 또한 궁정 내에서 미술 후원가이자 수집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루이 15세의 예술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연인 관계는
1752년에 끝났지만, 그녀는 1764년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루이 15세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 남아 있었다. 이 초상화는 오랫동안 소실된 것으로 여겨져 오다가 1970년에 한 경매장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2003년에 베르사이유 궁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근위병들이 있는 국왕 근위연대의 훈련장, 1744
by 샤를 파로셀(Charles Parrocel:1688~1752)
1729년에 태어난 왕세자 루이는 여섯 살까지 베르사이유 궁전 남쪽 날개관에 있는《왕실 아이들의 거처》에서 왕
비를 비롯한 궁정 여인들의 보살핌을 받다가, 일곱 살이 되던 1736년부터는 궁전 중앙 건물의 1층, 왕비의 처소
바로 아래에 위치한 왕의 장남만이 사용할 수 있는 거처로 옮겨, 장관 대신들로부터 왕세자로서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새로운 왕세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궁정에서는 오래된 이 거처의 정비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1744년에는 화가 샤를 파로셀에게 출입문의 상단부를 장식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때 제작된 작품은 마치 미
래에 주어질 책무에 대한 왕세자의 마음가짐을 다져두기라도 하려는 듯 군사적인 주제를 담게 되었는데, 실제로
왕세자 루이는 그 이듬해에 아버지 루이 15세와 함께 퐁트누아 전투에 참가함으로서 첫 전투를 경험하게 되었다.
파로셀은 루이 14세를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 및 마를리 성에서 일했던 화가 조제프 파로셀의 아들이었으며, 화
가가 되기 전에 군에서 복무했던 경험을 살려 전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게 되었다.
왕세자의 방을 장식할 작품을 주문 받앗던 1744년에 그는 전쟁을 주제로 하는 또 다른 작품 의뢰를 받게 되었다.
루이 15세가 고모인 콩티 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소유였던 슈아지 성을 사들이면서 성의 실내를 새롭게
장식할 작품들을 주문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작된 이 두 작품은 전쟁터의 야영지와 말들을 훌륭히 표현해
내는 파로셀의 솜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장군과 여러 명의 장교들이 참여한 군사 회의, 1744
by 샤를 파로셀(Charles Parrocel:1688~1752)
Bacchus in the Midst of his Court(포도 수확 또는 바쿠스 신의 승리), 1768
by 장 바티스트 마리 피에르(Jean-Baptiste-Marie Pierre:1714-1789)
루이 15세가 정부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위하여 짓기 시작한 프티 트리아농이 완성되어 갈 무렵인 1768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소속의 화가들은 오비디우스의『변신 이야기』속 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프티 트리아
농의 여러 방과 식당을 장식할 작품 제작을 의뢰받게 되었다. 왕의 수석 화가였던 장 바티스트 마리 피에르는 이
때 들어온 여러 개의 주문을 동료 화가들에게 적절히 배분하고, 작업의 진행 상황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
다. 특히 식당은 땅과 바다에서 나는 갖가지 과일, 야채, 해산물 등을 연상시키는 그림들로 꾸며야 했기 때문에,
피에르는 가브리엘 프랑수아 두아양에게 <포도 수확>을, 마리 조제프 비앵에게 <사냥>을, 루이 장 프랑수아 라그
르네에게는 <수확>을 각각 주제로 맡겼으며, 자신은 <낚시>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맡았다.
그러나 작업 도중 몇몇 화가들이 아카데미를 탈퇴하게 되었고, 남은 화가들은 이 작업과 더불어 밀려드는 다른
주문 역시 떠안아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은 화가들 중 피에르와 두아양은 상황에 맞추어 각자 맡은 주제
를 바꾸기까지 해야 했다. 작업은 장기간 지체되었고, 결국 이 작품들은 1774년에 루이 15세가 서거하고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른 후에야 완성되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두아양이 바꾸어 맡았던 <낚시>라는 작품은
끝내 완성이 되지 못했고, 대신 노엘 알레가 그린 또 다른 <포도 수확>이라는 작품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루이 16세로부터 프티 트리아농을 선물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그곳을 장식하고 있던 작품들 중 인물
들의 노출이 지나치다고 생각된 몇몇 작품을 떼어내기도 했다. 피에르가 그린 이 작품은 다행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원래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1830년에 진행된 프티 트리아농 궁의 복원 작업 과정에서 그
자리를 알레의 작품들에 내어주고, 베르사이유 궁의 수장고로 옮겨지게 되었다. 첫 포도 수확 및 포도주의 발명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의 전경에는 관능미가 물씬 풍기는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이 사티로스가 수확해 온
포도를 받아 즙을 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에르의 예술 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로코코 양식
의 우아함과 당시 새롭게 대두된 고전주의 양식의 엄격함이 어우러져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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