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3 펜싱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사브르 64강전에서 우크라이나의 올가 하를란(Ольга Харлан)이 러시아 출신인 중립국 소속 선수 안나 스미르노바를 15-7로 이겼다.
이후 해프닝이 벌어졌다. 경기를 마친 두 선수가 마주 선 뒤 스미르노바가 악수를 하기 위해 하를란 쪽으로 다가가자, 하를란이 자신의 검을 내밀어 접근을 막은 것. 검을 서로 터치함으로써 악수를 대신하자는 제스추어였다. 그러나 스미르노바는 수십 분간 경기대(피스트)을 떠나지 않고, 상대의 명백한 악수 거부에 항의했다.
다가오는 상대 선수에게 검을 내밀어 악수를 거부하는 하를란(왼쪽)/현지 매체 영상 캡처
올가 하를란 선수/사진출처:페북
하를란은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에서 4차례나 우승하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여자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한 우크라이나 여자 펜싱의 간판이다.
펜싱 경기장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같은 장면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올해 들어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이 2024 파리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대회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을 터주면서 생겼다. 국제펜싱연맹(FIE)은 지난 5월 러시아 출신 선수 17명에게 출전 자격을 부여했고, 6월 유럽선수권대회에 이어 이번 대회에도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중립국 소속의 개인 자격이다.
FIE는 하를란에게 '스포츠맨쉽에 어긋난 행동을 한' 이유로 실격패를 선언하고, 경기에도 더이상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FIE 경기 규정에 따르면 출전 선수는 경기 결과가 나온 뒤 서로 악수를 해야 한다.
하를란은 그러나 외신 인터뷰에서 에마누엘 카치아다키스 FIE 회장(그리스)이 악수 대신 검을 터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SNS를 통해 "하를란은 공정하게 경쟁해 승리했다"며 "FIE가 그녀의 권리를 회복하고, 계속 경기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상황은 또 우스워졌다. IOC가 하를란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할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올림픽 출전 티켓을 주겠다고 밝혔고, FIE는 실격 조치를 자격 정지로 바꿨다.
이탈리아 '라 레푸블리카'의 실격 취소 보도/사진출처:스트라나.ua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8일 이탈리아 신문 '라 레푸블리카'를 인용, FIE 집행위원회가 올가 하를란의 실격을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 프로토콜에 의해 하를란에게도 상대와 악수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다소 어색한 이유를 들었다.
FIE 집행위원회는 이날 저녁 늦게 긴급 회의를 열고 하를란에 대한 '블랙카드'(즉, 실격)를 정지시킨 뒤, 선수권대회에 계속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다만, 이번 대회가 끝난 뒤 2개월간 자격을 정지시켰다.
스트라나.ua는 FIE 집행위원회가 하를란에게 2024년 올림픽 출전권을 보장해 준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의 항의 편지를 받은 뒤 결정을 변경했다고 전했다. 또 FIE은 경기 종료 후 선수들이 악수하는 대신 멀리서 인사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꿀 계획으로 알려졌다(라 레푸블리카 보도).
하를란/사진출처:인스타그램
하를란은 이번 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FIE는 권위와 신뢰를 잃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를란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여자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할 때 주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