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李泰馥ㆍ51) 신임 복지노동수석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겠다'는 사명감 속에서 모진 고문과 오랜 투옥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한때 공권력으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던 그가 이제 '최고 권부(權府)'인 청와대로 들어섰다.
이 수석은 성동고 재학시절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에 눈을 떴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한 뒤 첫 취업은 용산시장 지게꾼. 전국에서 노동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광민사를 설립, 출판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출간된 '한국노동문제의 구조' '노동의 역사' 등 사회과학 서적들은 한때 낯익었던 대학가의 스터디셀러들이다.
하지만 3년여의 현장운동은 "작은 운동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겼다. 학생운동출신과 합류한 그는 70년대말 전국민주노동자연맹, 80년대초 전국민주학생연맹을 결성, 노학연대와 적극투쟁론을 펴며 5공화국의 강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당시 이 수석에게 핍박은 친구와도 같았다. 81년에는 전민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에게 칠성판 위에 뉘어진채 관절뽑기 등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형이 구형됐다가 재판부로부터 무기형을 언도 받았다.
국제 앰네스티 본부로부터 '세계의 양심수'로 지정받은 끝에 석방된 이 수석은 89년 주간노동자신문을 창간하고 99년에는 노동일보를 창간했다. 그는 투쟁 일변도의 방식을 바꿔 비정규직 보호 문제를 제기하는 등 정부의 정책에 노동계 주장을 반영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 무의탁 노인 지원단체인 '인간의 대지' 대표를 맡으면서 사회복지분야로도 관심의 폭을 넓혀갔다.
"어디에 가도 나는 변함이 없습니다. 청와대에서 노동자를 위해 일했다는 평가를 받고 물러나겠습니다." 파란 많은 삶을 살아온 이 수석이 생애 최대의 전기를 맞으며 되풀이한 다짐이다.
프로필
충남 보령 /성동고, 국민대 법대(72학번으로 추정됨), 도서출판 광민사 대표, 노동일보 발행인 겸 회장, 청와대 복지노동수석, 보건복지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