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6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14. 자력으로는 죄에서 못 벗어남을 믿습니다 》
행 4:12
〈 토끼의 명판결 〉
옛날 옛적,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있었는데 사람이 지나갑니다.
호랑이는 사람에게 꺼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딱하게 여긴 사람이 꺼내주었습니다.
호랑이는 함정에 빠져 굶주렸기 때문에 사람을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자기를 구해 준 은인을 잡아먹는 법이 어딨냐?”하고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잡아먹는 것이 옳은지 나무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나무는 “사람은 나무를 잘라 땔감, 건축, 심지어 관을 짜기도 하니 잡아먹어도 싸다!”
사람이 애원했습니다. “저기 있는 바위에게도 물어보자!”
바위는 “사람들은 애먼 바위를 쪼아서 비석을 만드니 잡아먹어도 된다!”
그때 마침 토끼가 지나갑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토끼에게 물어보자!”
이때 토끼가 대답합니다. “당초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내가 알아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호랑이는 다시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람이 구해 준 것이 맞습니까?”
호랑이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맞습니다!” 그러자 토끼가 판결합니다.
“호랑이 너는 거기 그대로 있고, 사람은 가던 길을 가라!”
토끼의 명판결입니다. 이 우화 속에서 호랑이는 함정에서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동물 중의 왕이지만, 깊이 빠진 함정에서 스스로 기어 나오지 못합니다.
누군가 밧줄을 내려 꺼내주지 않으면, 호랑이는 꼼짝없이 굶어죽습니다.
이 호랑이와 똑같은 신세인 존재가 있습니다.
토끼의 잔꾀로 당장은 목숨을 구한 ‘사람’입니다.
호랑이가 빠진 함정은 아니지만, 사람은 ‘죄’라는 함정에 빠져있는 존재입니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가 언젠가는 죽어야 하듯이 사람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생로병사’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은, 욕심에서 시작하여 죄를 짓고,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사람이 빠진 함정은 욕심과 죄라는 함정입니다.
☞ 호랑이가 함정에서 죽듯, 사람은 욕심과 죄의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 사람이 피해갈 수 없는 2가지 〉
야고보 사도가 선포했듯이 죄는 욕심에서 출발합니다.
욕심에서 죄가 시작됩니다.
욕심이 작동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나는 어느 때 욕심이 발동하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욕심은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그 순간 작동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때 욕심이 발동합니다.
“선택하고 결정할 때” 그때 욕심이 작용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다!” 바로 이때 욕심이 개입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지을 때, 선택과 결정을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택하고 결정할 때 반드시 욕심이 작동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욕심이 작동하면 그것은 ‘죄’로 연결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선택할테니 너는 나만 따르라!”
갓난 아이에게는 선택권,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해 주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자의식을 갖게 되면 선택권, 결정권을 자신이 가져갑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결정할 때, 어떤 것이 따라붙는다고요?
“욕심!” 그렇습니다. 욕심이 반드시 따라붙습니다.
그 욕심이 잉태하여 무엇을 낳는다고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는 결국, 죄인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호랑이도 참 죄많은 호랑이입니다. 그렇지요?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을 잡아먹으려 했으니 말입니다.
생명의 은인을 잡아먹으려다가 다시 함정에 빠져 호랑이는 쫄쫄 굶어죽어야 합니다.
구해 준 사람은 토끼의 조언 “가던 길 가라”하여 자기 삶을 살겠지만,
그 사람 역시 욕심, 죄, 사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중 피해 갈 수 없는 것, 두 가지는 ‘죽음’ 그리고 ‘선택’입니다.
죽음과 선택은 묘한 상관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해학적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 선택이 욕심을 낳는다 〉
선택에는 욕심이 묻어있습니다.
욕심에는 죄악이 묻어있습니다.
죄악에는 죽음이 묻어있습니다. <① 선택- ② 욕심- ③ 죄악- ④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선택은 내가 하마!”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과 악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아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시겠다는 선포입니다.
‘너희가 선과 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선악을 안다”고 자처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그러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보에 쌓여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면 되는 어린아이이기를 바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능히 우리에게 그 삶을 주셨을 겁니다.
그러나 아담 하와는 끝내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을 자기들이 결정합니다.
“선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선택에는 욕심이 묻어있습니다.
욕심에는 죄악이 묻어있습니다.
죄악에는 죽음이 묻어있습니다.
선택하지 않고 생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욕심이 기준이 됩니다.
욕심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악은 필연입니다.
죄에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 대가가 죽음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빠져 있는 함정입니다. “죄의 함정”입니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는 자기 힘으로는 그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① 선택- ② 욕심- ③ 죄악- ④ 사망> 이 싸이클에서 누구도 이탈하지 못합니다.
☞ 사람이 이 싸이클에서 이탈할 수 있겠습니까?
〈 선택의 죄된 속성 〉
오늘 설교 제목이 《 14. 자력으로는 죄에서 못 벗어남을 믿습니다 》입니다.
<① 선택- ② 욕심- ③ 죄악- ④ 사망>의 싸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피해가지 못하는 두 가지’가 선택과 사망입니다.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선택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선택’이 사실은 죄의 올무입니다.
의식이 있는 한, 선택해야 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의식이 있는 한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더 나은 선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나에게 더 유익한가?’
세상의 지식과 지혜, 세상의 학문과 사상, 철학과 종교까지, ‘더 나은 선택’을 가르칩니다.
‘더 나은 선택’이란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을 택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왜 죄입니까?
‘너에게 더 유익한 것’을 박탈하기 때문에 죄입니다.
너에게 유익한 것보다 나에게 유익한 것을 나의 욕심으로 선택하기에 죄가 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여기서 벗어나는 길로써 ‘무소유’를 내세웁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말자는 이야깁니다.
자기 삶에서 ‘욕심’을 제거해보겠다는 취지입니다.
잠깐만 생각해 봐도 ‘무소유’는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 마흔에 ‘무소유’의 길을 선택했다칩시다.
마흔에 이르도록 소유한 것은 어찌 됩니까? 그것을 버린다고 버려집니까?
가정도 있을 것이고, 자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책임도 있습니다.
자칫 무소유는 책임의 방기이고, 현실로부터의 도피입니다. 달아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 상황에서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만 못한 선택입니다.
여기서 선택이 또 튀어나왔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선택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 구렁텅이에 빠진 호랑이가 스스로 나올 수 없듯이 죄의 수렁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 믿음의 출발점 〉
《 자력으로는 죄에서 못 벗어남을 믿습니다 》
오늘 설교제목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믿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지은 죄에서, 나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서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겨자씨 보다도 작지만 믿음을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 오늘 본문을 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
내가, 내 죄로부터, 내 힘으로써,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은, 나를 구원하실 분을 예고합니다.
내가 못하니,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온고을교회 수요설교에서 “믿습니다”로 끝나는 25가지 단문 신앙고백으로 설교중입니다.
오늘이 14번째 《 자력으로는 죄에서 못 벗어남을 믿습니다 》입니다.
다음 주에는 “15. 구원은 죄 없는 희생제물로 대속함을 믿습니다.”
이어서 “16. 예수께서 구원을 위한 제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또 “17. 예수는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No 18. 예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이 완성됨을 믿습니다.
19. 예수 십자가 죽음은 내 죄를 대신함을 믿습니다.
20. 십자가 속량을 믿음으로써 나의 의인 됨을 믿습니다.
오늘부터 무려 7차례에 걸쳐서 구원을 주제로 설교하게 됩니다.
☞ 구원에 대한 설교를 앞으로 이어갈 예정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에 구원 이야기를 다 하면 다음 주부터는 빈손입니다.
조금씩 나누는 것도 지혜입니다.
☞ 오늘 설교 《 자력으로는 죄에서 못 벗어남을 믿습니다 》는 서론격입니다.
〈 치명적 아름다움, 치명적 추함 〉
오늘 교회 앞 화분에 아름다운 꽃이 만개한 것을 보았습니다.
크고 작은 나비 서너마리가 꽃 위에 앉아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노닐었습니다.
나비의 날개를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색깔이 너무너무 고왔습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비의 날개를 왜 이렇게 빨깡 노랑 파랑으로 치명적 아름다움으로 지으셨을까?
제가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비의 날개를 아름다운 빛깔로 하신 뜻이 무엇일까를 묵상했습니다.
아름다움이 치명적이라면, 반대의 개념도 있어야 합니다.
‘치명적인 추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추하고 더러운 것 중에 아주 치명적인 것, 그것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나비의 날개 빛깔 반대 편에 어떤 추함이 대칭적으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가장 추함은 바로 ‘죄’라고 생각합니다.
죄는 피조물 중에서 오직 사람만이 범하는 악입니다.
사람을 제외한 다른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외의 피조물에게는 ‘본능’만으로 생존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능만으로 사는 한 ‘죄’와는 상관없습니다.
만일 개가 사람을 물었다칩시다. 그 개가 죄를 지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개는 그저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를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물의 영장 품격을 팽개치고 죄에 빠졌습니다.
죄에 빠져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그 죄 문제를 누가 해결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어떤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예수 이름으로 구원하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