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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2-17)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첫번째 말씀은 세례 요한이 외쳤던 것과 같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짧은 말씀이지만, 복음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예루살렘 거리에 첫 메세지로 "회개"를 설교하였고, 사도 바울 역시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촉구했습니다. 바울은 회개란 생명얻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회개는 천국의 문으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고, 진정한 믿음의 첫 발걸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복음을 받아들인 가정과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맨 먼저 회개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어야 하는데, 복음을 믿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중요한 것입니다. 회개란 우리가 자기 죄를 슬퍼하며 뉘우칠 뿐 아니라, 죄된 생활을 청산하고 생각과 말과 행실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가 없이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1. 회개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회개해야 한단 말이냐?”라고 반문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면 우리의 영적, 도덕적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에 대하여 (롬 7:7)에 보시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범한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사사시대처럼 왕이 없음으로 각기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주인됨을 인정하고 내가 주인된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주목하고 그 뜻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숭배의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이 아니더라도 우상숭배의 죄를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은 성경에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속에 있는 욕심을 따라 살면 죄를 범하고 자기가 주인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전부인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6:8).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시며 죄의 결과로 받게 될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회개로 이끄십니다. (렘 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불같이, 방망이같습니다. 추하고 바위처럼 완고한 우리 마음을 태우고 부수어 겸손하게 만들어 회개의 기회를 갖게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믿지 않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 회개의 기회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불신자들이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요 13:10)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목욕한 자와 같아서 온몸이 깨끗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욕을 했더라도 외출하고 돌아오면 발이 더러워지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더라도, 때때로 죄를 짓고 실수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번 발을 씻듯이 매일같이 자신을 살펴서 그날의 허물과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를 지적받았을 때 솔직히 자기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죄를 마음으로 인정하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 뿐 아니라, 양심을 속인 죄, 부모를 거역한 죄, 남을 미워한 죄, 정욕을 따라서 산 죄, 거짓을 말한 죄, 등등 이제까지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기 죄를 알면서도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고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처럼 죄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때 죄를 깨달은 사람은 지체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인정하고 자복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지적받고서도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해서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전도를 받고서 성령의 감화에 의해 마음에 찔림을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완고함은 믿다가 타락한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자신도 이와 같은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보세요. 두 사람은 다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였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전도단의 재정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둘 다 예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대제사장에게서 은 삼십 냥을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저택 뜰에서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의 목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중에 마지막은 맹세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주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의 죄가 큰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베드로의 죄도 결코 적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 두 사람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마침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그때 그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죄를 통분히 여기고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적들에게 넘겨주고 나서 무참하게 고난받고 정죄받으시는 것을 보고서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하니, 저들이 말하기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쳤고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회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죄를 후회하는 것이 회개라고 속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이 곧 회개라면 아벨을 죽인 가인도 회개한 사람이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도 회개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짜 회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위험한 생각은 "자신은 성령으로 철저히 변화됨이 없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으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파놓은 가짜 회개에 속아 넘어가 나중에 죽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는 꾸지람을 들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사는 자들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어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은 마땅한 형벌이지만, 예수 믿다가 가짜 회개에 속아 넘어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진짜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사도들이 설교한 진짜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고, 마음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를 뜻한다" 즉, 죄를 끊고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온전히 예수님께로 확 돌아서고 철저한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닭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눈물로 자복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같은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을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셔서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배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변명하지 말고 솔직히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대로, 회개하는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3. 회개한 사람은 삶 속에 근본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합니다.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은 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합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생각과 행동이 이전과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다면 진정으로 회개하였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이르기를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더니 “예, 아버지, 가지요.”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더니, “싫어요.”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한 것, 이것이 곧 회개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된 생각을 바꾸고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180도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가출한 아이가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던 사람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생활의 근본적인 변화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세상 즐거움을 찾아다녔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즐겁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고, 전도하는 것이 즐겁고, 봉사하는 것이 즐겁게 됩니다.
자기만 알던 사람이 이웃을 배려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탐욕을 버리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원망, 불평하던 입에서 감사와 찬송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세상이 이처럼 사악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내 멋대로 살아왔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그분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으로 철저히 변화되어 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고 회개하였어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 죄성이 있어서 우리를 끌고 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났지만, 죄를 또다시 지을 수 있는 죄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구원인 영화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한 자도 때로는 죄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습관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속에 있는 죄성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는 것이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죄와 싸우며 성령님께 의지하여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회개한 자는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의를 배설물처럼 여기고 쓰레기 더미에 과감히 던져 버립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주시는 "의"로 갈아입기를 갈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진짜 회개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자신의 영이신 성령으로 그 사람안에 내주하시어 그 사람을 거듭나도록 이끄시고, 새로 태어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또한 예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예수님의 의로 새로 갈아입히고 내적 변화를 일으켜 거룩, 성화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성령으로 회개하여 거듭날 때 비로소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주시는 진짜 회개는 낡은 건물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건물을 새로 짓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날마다 영적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4.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1)죄사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받게 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는 죄사함입니다. 죄책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십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였고, 이사야서 55장에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추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정하게 해 주십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으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나 죄인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한없는 자비와 은혜와 인자를 베풀어 주시며, 회개할 때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도 않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회개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2)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부자였습니다. 부자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무슨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백성들의 세금 징수를 도급제로 운영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당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세금을 징수해서 정해진 액수를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가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과도한 세금을 매겨서 착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삭개오도 이런 죄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보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볼 수 없자 예수님이 지나가실 방향으로 앞질러 가서 길가의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러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말씀드리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눅19:9,10)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부당하게 징수한 것은 네 배나 갚겠다고 한 것은, 그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물질만능주의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이처럼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3) 말과 행동이 거룩해집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디 일곱 귀신 들렸던 가련한 여자였습니다. 정신이 병들면 생활이 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성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 이름 앞에 성스러울 성(聖) 자가 붙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말과 행동이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해서 덕을 세우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엡 4:29). (엡 5:3,4)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생활이 규모가 있고 경건하게 바뀝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가 필수적인 과정임을 말해 줍니다. 그와 동시에,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은 지금이 종말론적인 때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끝이 가깝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다스리실 그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사람들만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적당히 회개한 것처럼 살지 말고 철저하게 회개하여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주권을 주님앞에 내어 드립시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시다.
아직도 죄 가운데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으나 회개하라”고 전재주어서 저들을 구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는 천국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고 진정한 믿음의 첫 발걸음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 모든 죄, 내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진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