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이 현 정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201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2024년 서울문화재단 첫 책
발간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withyouhj@naver.com
시인의 말
고운 체로 가득 쳐서
결국 남은 낱말과
덜어내고 덜어내어
끝내 지킨 문장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놓지 못해
글이 된
마음
2025년 2월
이현정
지구를 돌리며 왔다 · 1
대체 어떤 질량으로
묶어두고 있길래
나는 그저 두 발이
가없이 닳도록
지구를 돌리며 왔다
네가 환한 곳으로
베텔게우스에게 아니어
오리온 별자리 왼편 어깻죽지에는
검붉게 부풀며 요동치는 별이 있지
날마다 몸을 사르며 울부짖는 별이 있지
왼쪽 가슴이 죽어가던 엄마도
부푼 림프선으로 사투를 벌였지
모질고 뜨거운 멍울 날마다 짓눌렀지
별은 죽을 때면 산산이 빛나는데
그날의 엄마도 반짝하고 빛이 났지
왼편 몸 가득히 흩어진
별 조각들
사무쳤지
종이를 찢다가
글자와 글자 사이 날랜 금이 지나갔다
태곳적 모습이 된 닿소리와 홀소리 틈
목이 긴 낯익은 얼굴 희미하게 비쳤다가
큼직한 눈동자 점점이 흩날리다가
업고서 걸었던 오솔길이 깔리다가
밤하늘 맞잡고 우러른 미리내로 흐르다가
별안간 의미를 소멸한 기호가
제각기 흩어져 뭇별이 된 낱말이
서늘한 손바닥 위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뒤로 나는 새는 없다
중력도 거슬러 박차고 올랐다
한 치를 가더라도 걸음 삼지 않았다
뒤로도
가지 않았다
돌아보지 못하기에
물빛 하늘 가르며 비수처럼 날아들어도
할퀸 자국 매듭지을 마음자리 하나 없이
앞으로
오직 앞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풀칠하는 입술에 집 지을 진흙 물고도
내 새끼 먹이 찾느라 눈 한 번 감지 못하는
허기진
가장의 날갯짓
높새바람 가른다
메트로 프리즘
메트로 한복판 창이 가장 큰 카페
방금 전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는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한 번에 들이켰다
"일거리 찾습니다 밤낮 가리지 않아요"
보이는 게시판마다 구직 글을 올리던
남자는 테이블 아래 꼰 다리를 떨고 있다
쪽잠을 자다 깬 노숙인의 시야에
창 안쪽 세상은 무지갯빛 결계 친 곳
통유리 사이에 두고 굴절된 각자의 생
어디에도 둘 곳 없어 적막만 가득한
서로는 보지 못할 똑 닮은 표정으로
도시는 광각의 무채색
가시광을
분사 중
시인의 산문
'ㅅ'
그중에서도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은 더욱 각별합니다. 시간을 나누는 대상은 가족이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반려동물이 될 수도, 연인이 될 수도, 동료가 될 수도, 유명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아득한 유한함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아주 큰 의미로 '사랑'이라 부릅니다. 시간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를 수도 흐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는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없었던, 내가 몰랐던 시간이 생기고 또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굳이 의식하여 쓴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 글의 주요 키워드는 초성 'ㅅ'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ㅅ은 사람(人)을 뜻하는 한자와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습니다. 사람. 읽어주고 소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글은 생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 당신의 귀한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섬세하고 집요한 상상과 생각의 산물을 읽어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이 책에 실린 글은 나의 손을 떠났습니다. 나를 떠난 글들이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붙잡는다면, 그래서 혹여 오래도록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곧 영원과 견줄 '사랑'이 될 것입니다.
-시인의 <산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