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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하까이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지난 호, 유다의 멸망을 배경으로 삼았던 오바드야서에서는 시대를 짐작할 만한 구체적인 날짜 언급이 없었던 것과 달리 하까이 예언서는 시대 배경을 상세히 표현해 줍니다. “다리우스 임금 제이 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1,1) 다리우스 임금 제2년은 현대 달력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520년이 됩니다. 이 시기는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키루스의 칙령으로 유배 중이었던 유다 백성이 본국으로 귀환한 이후입니다.
키루스의 귀환 조치를 유다 왕조의 회복과 백성의 자유라는 구원의 메시지로 여기며 들뜬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바빌론에 머물던 유다인들 모두가 귀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고국으로 반드시 돌아가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라는 권고에 가까운 허락이 칙령의 주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49년이란 시간을 바빌론에서 보낸 유다인들 가운데서는 정착한 유배지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이어간 사람도 있었기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폐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루살렘의 상황이 더 암담해 보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세스바차르가 이끈 1차 귀향 공동체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후 기원전 520-518년 다윗 왕실의 후손인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를 지도자로 세운 집단이 2차로 귀환합니다. 이 두 번째 집단이 귀환했던 시기가 바로 하까이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대입니다. 그럼,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주님의 집을 짓는 일”(1,14)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의 가장 시급한 일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도성을 복구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빈곤과 흉작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다양한 사회 계층 안에서의 갈등과 분열로 시급한 당면 과제는 자꾸 미루어졌습니다. 물론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성전 건축 사업을 후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백성의 처지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1,4) 아마도 유다 백성이 자신의 집은 장식으로 덧씌운 집에 살면서도 하느님의 집에는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성전 재건 사업을 미루고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그렇다고 살림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은”(1,6 참조) 이유가 성전 재건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까이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은 과연 귀여겨들었을까요?
아마 지금까지 소개된 예언자들 가운데 예언자의 신탁을 귀여겨들은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듣기를 거북해하며 예언자를 비난하고 박해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까이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모든 백성은,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과 주 저희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까이 예언자의 말을 잘 들었다.”(1,12) 놀랍게도 예언자의 설교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들은 주님의 집을 짓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1,14 참조). 이날이 “여섯째 달 스무나흗날”(1,15)이라고 하니 하까이의 예언이 전해진 지 24일 만에 백성이 성전 재건을 착수한 것입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2,9)
하지만 성전을 새로 짓기 시작한 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때, 기초가 놓인 성전의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지은 첫 번째 성전에 비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고 장엄했던 첫 성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노인들은 두 번째 성전이 도저히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런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 마나 하지 않느냐?”(2,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낙담한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당신께서 그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고 평화를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새 성전이 비록 겉모습으로는 솔로몬의 성전보다 화려함이 턱없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 그 안에 자리할 영광은 이전의 성전을 압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2,9) 결국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뛰어난 설계나 화려한 재료 혹은 압도적인 크기와 웅장함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현존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제 성전이 세워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적법한 제물을 하느님께 봉헌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축복하시고 풍요롭게 해주실 거라 예고하며 이렇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리라.”(2,19)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루키즘(Lookism)이라 하고, 우리말로 번역하면 외모지상주의가 됩니다. 하느님이 주신 신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여 외면을 꾸미고 치장하는데 지나치게 몰입하면, 자칫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집회서도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겉모습을 보고 그를 혐오하지 마라.”(집회 11,2)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까이 예언서는 우리에게 성전의 외적 화려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가득 찬 ‘하느님의 현존’임을 가르쳐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참조). 이 성전에도 중요한 것은 화려한 외관이 아니라 내면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이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과 외적인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으로 예수님을 몸 안에 품으셨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조차도 마음속에 머무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참조 루카 2,19.51)하셨습니다. 이렇듯 성모님의 우선순위는 외부와 겉모습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자기 내면이었습니다. 성모님을 따르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현존으로 충만히 채워진 성전이기를 기대합니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필리피서
마케도니아 북동쪽에 위치한 필리피는 BC 31년 로마의 속주로 재편된 도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2번째 선교 여행 때 필리피를 방문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달라는 환시를 체험한 뒤 필리피로 간 바오로 사도는 먼저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에게 세례를 준 뒤, 점 귀신이 들린 하녀를 만나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더 이상 하녀가 점을 치지 못하게 되자 하녀의 주인이 바오로와 실라스를 고발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붙잡혀 잠시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 바오로 일행은 간수들과 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어 필리피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필리피 교회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가 유럽에 세운 첫 교회 공동체로서 그에게 기쁨이며 자랑인 곳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56년경 에페소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자신의 선교 활동을 위해서 지원금을 보내준 필리피 신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필리피서를 작성하였습니다.
1장 1-11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에 인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머리말에서부터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필리 1,4. 7 참조)라고 말할 만큼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 공동체를 향한 짙은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서간들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지역 교회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며, 자신의 복음 선포의 본질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천막을 짜는 등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필리피서 4장 15-16절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 공동체가 지원해준 것들을 감사히 받았다는 증언이 등장합니다. 이는 필리피 교회 공동체와 바오로 사도 사이의 깊은 유대와 특별한 애정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장 12절-4장 20절은 필리피서의 본론으로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상황과 필리피 교회에 당부하는 우정어린 권고가 주어집니다. 먼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투옥 상황을 알립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증언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필리피 교회 공동체에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믿음을 증거하는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적대자들은 오히려 구원의 징표가 된다고 말하며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독려합니다. 뒤이어 바오로 사도 자신도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이 모든 고난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서 겪는 것이기에 특권이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일치와 겸손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2,5)라는 말과 함께 그리스도의 찬가를 들려줍니다. 그리스도 찬가는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시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 위로 오셨다가 땅 아래로 내려가 죽은 이들을 마주하시고, 마침내 땅 위를 거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은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의 임금이 되셨으며,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경배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그리스도 찬가는 말합니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 앞서 티모테오와 에파프로디토스를 필리피로 파견하겠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들을 따뜻하고 기쁘게 맞아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필리피 교회 안에 자리한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이릅니다. 코린토 교회, 갈라티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필리피 교회에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들을 두고 거짓된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이라고 말하면서 육의 할례가 아닌 참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자신의 육적 태생을 이야기합니다. 곧, 자신이 히브리 사람, 벤야민 지파 출신, 바리사이이며 흠 없이 율법을 지키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만큼 열성적인 인물이었음을, 그리고 당시에는 이 모든 것들이 의로운 것이라 여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알게 된 다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되었으며, 의로움은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난 자신과 함께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자고 필리피 교회 공동체를 독려합니다.
편지 형식상 맺음말은 4장 21-23절에 해당하지만 4장 전체가 사실상 필리피 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의 맺음말에 해당하며 머리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필리피 교회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짙은 애정이 드러납니다. 그는 어떠한 순간 속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늘 함께 할 테니 모든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모습을 항구히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당부하면서 편지를 마칩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34) 첫 번째 짐승의 입(묵시 13,5-10)
이 땅에서 하느님 발견하는 법
짐승의 입은 모독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큰소리를 지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짐승의 입은 구약의 다니엘서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킬 때 사용한 작은 뿔이 지닌 ‘큰 입’과 같다.(다니 7,8.20 참조) 다니엘서의 ‘큰 입’은 하느님께 드리는 이스라엘의 제사를 금지시켰고 나아가 하느님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했다.(다니 7,25; 1마카 1,24; 다니 7,25; 11,36 참조) 요한 묵시록의 ‘큰 입’은 다니엘서의 ‘큰 입’과 같다.(묵시 13,5 참조)
요한 묵시록의 첫 번째 짐승의 입은 ‘주어져 있다’. 그리고 주어진 권한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다.(앞서 우리는 ‘마흔두 달’이란 시간이 기원전 2세기 중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주어졌다’라는 수동태 형식의 표현을 학자들은 ‘신적 수동태’라고 일컫는다. 짐승은 하느님을 거스르되, 자신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나 권능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 아래 놓인 것이고, 그러므로 첫 번째 짐승의 권한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 요한 묵시록은 짐승이 내뱉는 모독의 언사에 힘을 빼고 있다. 말은 있으되, 힘이 없는 말. 말의 크기는 거창하되, 그 실속은 너무나 하찮은 것이 첫 번째 짐승의 ‘큰 입’이다.
짐승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그분의 ‘거처’를 모독한다. ‘거처’로 번역한 그리스말은 ‘천막’으로도 번역되는 ‘스케네’(σκηνή)이다. 요한 묵시록 7장 15절은 어좌에 계신 분이 십사만 사천의 ‘천막’이 되어주신다고 서술한다. 요한 묵시록 21장 3절은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거처는 천상이 아니라 이 땅, 이 삶의 자리다.
요한 묵시록은 이른바 ‘육화 사상’을 전제로 하느님을 생각한다. 육화하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은 하느님의 거처가 된다. 천상은 지상 안에 온전히 구현된다. 짐승이 하느님의 거처를 모독하는 건 하느님을, 동시에 그분의 백성과 이 세상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을 받는다.(묵시 13,7 참조) 다니엘서 7장 21절을 그대로 옮겨온 표현이고 요한 묵시록 12장 17절의 용을 그대로 모방한 표현이기도 하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처절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는 것이 짐승의 승리가 가리키는 바다. 많이들 경험하지 않는가, 신앙인은 참고 희생하고 그러므로 손해 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사실 예수님도 그러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세상에선 실패했다. 세상의 힘에 짓눌렸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성도들의 운명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 논리 앞에 신앙은 실패와 패배의 어리석음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1코린 1,21 참조) 땅의 주민들이 짐승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묵시 13,8 참조) 세상은 그렇게 힘이 있어 보이는 권력자에게 경배한다. 우리는 그것을 탓할 수 없다. 땅의 주민들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한다. 그들 ‘모두’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묵시 13,8 참조) 생명의 책과 관련해서 결과론적 해석이 난무한다. ‘착한 일’,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윤리 도덕적 지침의 실천 여부가 생명의 책에 기록될 가능성을 가늠한다.
절대적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조건이 된다면, 시대가 다르고 문화나 관습이 달라 어느 시대는 옳지만 다른 시대에는 허용하지 않는 상대적 규범들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명의 책이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선택에 따라 그 허용 범위가 달라지는 책으로 인식하는 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책을 인간 인식이나 행위의 수준에서 다루는 가벼운 생각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한계가 지워지고 익숙한 경험치에 의존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과 어린양의 생명의 책을 연계해서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영원하시고 초월적인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닐까.
하여,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이것이다. “세상 창조 이래”라는 표현.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유일 때, 생명의 책은 세상 창조의 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보증하는 상징이 된다. 요한 묵시록은 3장 14절에서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 창조의 근원이라 밝혔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따른 결과론적 심판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한다. 생명의 책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고 그 갈망은 근원적이고 운명적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고, 존재함으로 생명의 책과 끊어내려야 낼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에.
그렇다면, 짐승을 따르고 경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 존재의 근본을 잊(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제 존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이리저리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떠넘겨버리는 일, 그것이 짐승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 사실 어린양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과 그분을 향한 경배로 불렸다.(묵시 5,6 참조)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의 몇몇 행동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보다 더 강한 권능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만 구원을 받았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통해 구원을 지향하는 것, 그것은 무지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기 이전에, 제 인식의 수준과 넓이와 깊이가 부족함을 알고, 진정으로 저 자신이 무엇을 디디고 서 있는지를 아는, 자신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겠다. 그 공부의 끝에 하느님은 비로소 발견된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86) 제비뽑기로 예수님의 사도가 된 마티아
어린 시절 초등학교 하굣길에는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이들이 돈 10원을 내면 아저씨는 밑의 동그란 판을 돌리고 돈을 낸 아이는 위에 새의 깃털이 달린 작은 화살촉 같은 것을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어 판 위로 내리꽂았다. “꽝!” 주변의 아이들도 숨을 죽인 채 결과를 바라보다 자기 일처럼 탄식했다.
지금 생각해도 거의가 ‘꽝’이었고 본전 10원을 맞춘 아이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돌림판을 보면 100원, 50원, 30원, 10원, 꽝 자리가 분명하게 비슷한 비율로 나뉘어져 있는데 비싼 가격에는 왜 잘 안 맞았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제비뽑기나 보물찾기에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는 살면서 제비뽑기하는 경우가 많다. 제비뽑기는 운에 맡기는 놀이이자 승부를 쉽게 내고 싶을 때 쓰는 놀이다. 제비는 종이에 글을 적은 뒤 섞어서 순서를 정해 뽑는다. 중요 스포츠 경기인 월드컵에서도 대진표를 짤 때 제비뽑기한다. 이때 뽑기에 따라 축구 강국이 즐비해 예선 통과가 어려운 죽음의 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군대를 제비뽑기로 가는 나라도 있다.
성경에서도 제비뽑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하느님의 뜻’이라는 방식으로 구약과 신약에 자주 언급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제비를 뽑아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라고 명령하였다.(민수 34,13 참조) 사울은 제비뽑기로 왕이 됐다.(1사무 10,17-24 참조)
제비뽑기로 열두 사도에 들어간 사람도 있다. 마티아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됐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고자 했다. 그래서 후보자로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다음, 제비를 뽑게 하여 마티아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사도 1,15-26 참조) 마티아는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을 지닌,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다.
마티아는 사도단의 일원이 된 후 신약성경에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과 이방인 지역을 거쳐 에티오피아의 내륙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또 다른 전승에는 북쪽으로 흑해 연안 오늘날의 조지아 일대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도 한다.
마티아의 유해는 나중에 헬레나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발굴하여 로마의 성모대성당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 재위)에 의해 유해 일부가 독일의 가장 오래된 도시 트리어로 옮겨졌다. 마티아는 오늘날까지도 트리어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기술자, 목수와 재단사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마티아는 예수님이 아닌 사도단에 의해 뽑힌 유일한 사도이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오늘 제1독서에는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집회 3,28)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재앙과 재난은 히브리어로 [라아]인데, 이 단어에는 ‘악’(惡)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레 11,17의 “재앙”과 “사악함” 그리고 18,8의 “죄악”과 “재앙”이 모두 [라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라아]는 악행과 악행의 결과로 닥치는 벌까지 함축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본의이든 아니든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책감 때문에 괴로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죄 자체가 벌이 되고, 더 나아가 악행이 우리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재앙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는 악을 바로잡고 막아주는 약이 됩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요나서에 나오는데요, 요나가 파견되었던 니네베는 잔인성으로 고대근동에서 악명 높던 옛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요나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악한 니네베가 망해야 한다고 믿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못하도록 예언직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니네베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요나가 전달한 한 줄의 신탁,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는 선언을 듣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5절) 즉시 회개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니네베인들에게 재앙을 피하기 위한 참회 단식이나 기도 등의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자연스레 망하도록 유도하려 한 듯합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니네베인들이 요나의 신탁을 듣고 곧장 참회합니다. 요나의 경우, 예언직을 피해 달아났다가 하느님 명령에 다시 복종할 때까지 ‘사흘’이나 걸렸는데도 말입니다(2,1-3). 이런 즉각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이민족도 죄에서 돌아서면 재앙이 거둬질 거라는 예레 18,7-8의 약속이 요나서의 니네베에서 성경 최초로 실현됩니다. 주님께서 니네베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거두신 일은 에제키엘이 전한 신탁과도 상통합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에제 18,21.23)
하느님께서 징벌을 경고하시는 가장 큰 목적은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왜 약이 없을까요? 그 이유는, 거만한 자가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니 징벌로도 그를 돌려세우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곧 회개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약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각종 음모와 악행을 저지르고도 심판받지 않으려 버티는 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죄가 쌓이고 쌓이면, 묻힌 듯 보이는 과거의 잘못까지도 결국엔 하느님 앞에서 죄다 셈해지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