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으로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북한에 풍선을 보내는 '대북 풍선단장' 이민복씨의 글입니다.
그는 전라도에서 6.25전쟁때 북괴군을 따라 월북한 그의 아버지가 이북에서 재혼하여 낳은 자식인데 그는 아버지를 신념의 공산당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월북후 겪는 고난과 자살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한 필체로 회상하며 그의 가족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신념의 공산당 아버지라 부른
그분도 아들이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둑놈이 되고 마지막에는 잡혀서 이송되는 3륜 오토바이에 머리를 부딪혀 자살합니다.
북한이 어떤 곳인가를 다시 일깨워 주는 가슴아픈 이야기,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이 글은 조갑제닷컴에서 퍼왔습니다) - k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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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공산당 아버지는 왜 '도둑놈'으로 자살하셨을까
이민복(대북 풍선단장)
고을에서 면장감은 누구라고 할 정도로 똑똑하고 말을 잘하셨다고 한다.
내력이 있는지 그의 부친(나에겐 할아버지)도 인품이 좋고 말동무하기도 좋아
동네 부자가 항상 곁에 두었다고 한다.
1945. 8.15 해방이 되었다.
혼란 속에 가장 귀 맛을 주는 손님은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팔로군 출신 북한 중앙당 파견원 김복동이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19살의 순진무구한 청년으로서 너무 매력적이어서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산이 없는 허허벌판인 호남 평야이기에 아지트를 공동묘지에 정하고 활동했다.
중앙당의 지시대로 <라호대>(전라 羅, 호랑이 虎, 군대 隊)란 무장조직도 무어 소대장이었고 <5.10. 망국 단독 선거 반대 투쟁>등에 나섰다고 한다.
4.3 제주 사건과 같은 맥락의 투쟁인 것이다.
리리(이리)와 군산 감옥에 갇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토리를 적자면 너무 길어져 생략한다.
1950. 6·25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휩쓸고 지나가자 지하에서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권총 차고 지프차를 타고 다니는 군 선전비서가 되었다.
가난뱅이 세상이 되었다고 부자들을 타도한다고 한다.
그런데 유산계급 타도가 공산 이념의 핵심임에도 아버지는 특유의 <반동 짓>을 하신다.
재산을 빼앗을지언정 절대 생명은 죽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탈북하여 남한에 오니 원래의 부인께서 생생히 증언하신다.
<죽이진 마라! 동네 사람이었던 저들(부자)을 죽이는 것은
너의 식구를 죽이는 것과 같다!>
이념보다 인간의 복수 심리를 꿰뚫고 있었던 같았다.
부자들은 공산당 간부인 아버지 집에 숨어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통에 이 지역에서는 학살이 없었다. 그 학살이 없었기에 부인과 딸도 후에 복수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탈북자 아들이 왔다고 어느 부자는 돕겠다는 뜻도 전해올 정도였다.
공산당 세상은 석 달도 못되어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동네 부자들이 당신을 보증하겠으니 남으라 했으나 워낙 공산주의를 신봉하였기에 인민군 6사(師)를 따라 월북하였다.
생사 고비의 월북 과정은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월북은 전쟁이 끝나자 희망이 아니라 악몽으로 다가온다.
남로당 당수(박헌영)가 하루 아침 미제 간첩으로 처형되고 남 출신들은 대거 숙청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숙청의 광풍 속에서도 워낙 순수한 면이 인정되었는지 사리원 공산대학을 다녔고, 또 월북한 외사촌 동생은 중앙당 3호 청사(대남사업부)간부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업 수완이 탁월하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1967년 간첩 누명을 쓰게 된다.
남조선 방송을 몰래 듣다가 들킨 것이다.
그 현장에 9살 되던 아들이었던 저도 있었다.
1960년대 만해도 북한은 진공관식 <만경대> 라디오를 생산했다.
1970년부터는 폐쇄를 위해 라디오 생산을 중단하였다.
남 출신이 남조선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백 프로 간첩 혐의이다.
본인과 온 식구가 결딴이 날 판에 이르렀다.
어렸지만 가족에 닥친 그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끌려가 다시 못 볼 것 같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 한 달 만에 돌아오셨다.
중앙당 3호 청사의 동생이 형님 구명을 위해 당시 중앙당 문서과 책임자였던 림춘추(훗날 부주석)에게 찾아가 해방 후 남로당 활동 이력을 보증했기 때문이다.
중앙당 동생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뻔했다고 두고두고 그러신다.
살아는 났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남조선 방송을 들은 놈이란 꼬리표는 죽을 때까지 따라 붙었다.
본인의 출세는 그렇다 치고 그 자녀에게까지 영향이 미치는 것이 아버지로서는 통탄하신다.
1974년 맏아들인 필자는 전교 2등의 성적으로 실력 순위대로라면 중앙대학인 김일성대에 추천되어 가야 했다.
하지만 모두 다 놀랍게도 발표 때에는 빠져있다.
학교 선생님들과 아버지도 중앙당에 신소한다고 난리를 치고 여론이 좋지 않자 김일성대 다음이라는 김책 공대에 추천되어 갔다.
하지만 학업 성적보다도 신분 토대에 걸려 불합격이다.
대학 당국이 그런다.
학업은 좋아 학교가 결정하였지만
<문건>(신분)은 중앙당에서 최종 비준하기에 어쩔 수 없다.
또 하나의 자녀에 대한 타격이 증명된다.
1978년 나는 과학원 밭작물 연구소 사로청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얼마나 충성하고 열정적이었으면 당 간부 후비인 청년 비서로 선거된 것이다.
하지만 1년 후 나를 선거한 당 비서가 좌천되었다.
왜 신분 토대가 안되는 자를 간부로 등용했는 가이다.
이쯤 되니 자식을 둔 부모로서 꼭지가 돌 만한 것이다.
인생도 내년이면 은퇴 나이이다.
공산주의 북한을 인생 겪어보시고 그 후회도 막심하셨다.
평등이 아니라 가장 불평등하고 가난한 북한!
아버지는 한마디로 <정치는 최대의 협잡이야!>
아들인 저는 이를 이렇게 이론화하였다.
<공산주의는 공상주의!>, <사회주의는 사기주의!>이다.
인생 실패에 이어 자식 전망마저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일까.
한밤중 허허 벌판에 나가 통곡하시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아래 집에서 감시하는 사건이 또 터졌다.
신소 되어 중앙당 한창남 6과(남출신 담당) 과장이 나와 수습해 주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아버지는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다니시며 물건을 훔쳐오시는 것이다.
훔친 물건은 윗방에 쌓아 놓고 쓰지는 않으신다.
드디어 들겼다.
하지만 당국도 다시 놔줄 만큼 본질적 도둑이 아니었다.
다시 도둑질을 시작하신다.
이번에도 잡히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오지 않으셨다.
이송되는 안전원(경찰) 삼바리 오토바이에 머리를 쳐서 지주막 출혈로 자살하신 것이다.
그때가 1985년이다.
내 자식들을 간첩 혐의 부모보다 도둑의 부모로 남게 하는 것이 훨씬 낮겠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충정과 희생이었다.
한(恨)이란 앞날을 지정해줄 만큼 존재하는 것 같다.
도둑놈의 아들이란 창피함 때문에 첫 사랑도 마다했다.
첫사랑은 2·8 영화 촬영소에서 배우감으로 정할 만큼 미인이었고 주체 농법을 쓴 계형기 박사의 딸이었다.
또 창피함을 피해 북쪽으로 연구 기지를 옮겼다.
떠나가는 날 동료 연구사가 그런다.
<뜻있는 자는 북으로 간다더니!>
당시는 이 말의 뜻이 뭔지 몰랐다.
지내보니 탈북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조선 방송을 듣다가 인생 종친 그 소식을 나는 남조선 삐라로 보게 되었다.
이게 나를 결정적으로 깨워줄 줄이야.
제가 탈북하여 남한에 와서 좋은 직장 가능성을 마다하고 대북풍선 <원조>가 된 것은 이런 한과 역사가 담겨져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이 듭니다.
쉰들러리스트에 마지막 장면에 소련 장교가 말을 타고 나타나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에게 저기로 가라고 광야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너희 땅 이스라엘로 가라!
아버지 역시 너도 북쪽으로 가서 나의 고향으로 가라!
즉 탈북하라는 한이 담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북으로 갈 일이 없었지요.
[ 2023-08-18, 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