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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존중하는 가정이 되십시오
20: 13
13. 살인하지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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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1-8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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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충격적인 시 한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김성한이란 분이 낙태아의 심정으로 기록한 시입니다.
제목은 “저도 사람이에요”입니다.
“어렴풋이 아침 잠에서 깨어 났을 때였어요.
알수 있었죠. 기분이 아주 나빴거든요.
설명할수 없는 어떤 불안감이라고 할까요?
날 둘러싸고 있는 평안함은 이미 없었어요/
공포 영화 본적 있죠?
죽은 줄 알았던 괴물이 마지막에는 꼭 나타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요/
난 피할 수도 도망할 수도 없었어요.-이건 아니에요.
살려 주세요-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그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발버둥칠뿐. 비명도 지를수 없었어요/
입으론 양수가 쏟아져 들어왔어요. 숨은 가빠지고 터질 것 같은 고통이 가득차 올라왔지만 아무도 내 곁엔 없었어요.-
사랑해-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도, 날 지켜줄줄 알았던 그녀도, 어디 계셨죠?/
집게의 날카로운 이빨이 내 다리를 아, 내 작은 발을 잡아 찢고 있을 때, 조각난 내 몸이 양수속을 둥둥 떠다니며 펌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어디 계신거죠?---
좋아요, 내가 죽어야 당신들의 세상 당신들만의 천국이 안전할수 있다면 날 죽이세요.
세상은 늘 죽어줘야 할 누군가를 원했으니까요.
예루살렘, 뻬이찡, 캄보디아, 아우슈비츠 그리고 자궁, 그래요 이젠 어머니 뱃속에서 사라져 가요. 당신들의 천국 당신들만의 세상을 뒤로하고--난 베비라 유아복 입어볼수 없는거죠?”
오늘날 생명이 가장 위협받고 있는 곳은 아이로니칼 하게도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어머니의 자궁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일년에 약 5천5백만 내지 7천만의 아기가 낙태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인구 2억 4천만을 가진 미국의 경우 일년에 약 150만건의 낙태가 보고되고 있는데 인구 4천백만의 한국의 경우 일년 낙태인구가 미국과 맘먹는 15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구비율로 볼 때 미국의 5배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이런 숫치는 한국의 낙태상황이 세계 1-2위에 해당될 것이라는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이땅 기혼여성들의 경우 53%가 낙태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놀라운 것은 미혼여성의 약 30%가 낙태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생명 존중의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낙태는 살인의 한 유형에 속할 따름입니다. 자살도 안락사도 성경적으로 보면 살인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미움도, 폭력도 살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살인의 범죄가 무서운 줄 모르고 증가하는 오늘의 시대를 향해 십계명의 제6계명은 여전히 “살인하지 말찌니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한번 이 계명이 순종되어지고 생명이 존중되어지는 우리의 가정과 사회가 되어지기 위해 우리는 매우 근본적인 세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첫째 질문-“왜 살인이 심각한 죄인가?”
성경이 살인을 심각한 죄로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창9:6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인간이 다른 모든 종류의 피조물과 차별화되는 특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고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보고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속에는 종종 인간의 존재이유를 기능적인 이유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기능이 원활하면 그는 필요한 존재이지만 더 이상 기능이 불가능하면 그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따르자면 더 이상 기능이 어려운 장애인이나 더 이상 거동이 어려운 병자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고, 기능이 떨어지는 노인들, 어린이나 여성들은 덜 중요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이런 생각을 철저하게 반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규정하고 대적해 왔습니다. 인간의 인간된 가치는 기능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기능 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바로 이런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인간을 파괴하는 심각한 범죄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약3:8-9의 말씀을 한 구절 더 읽겠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혀)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종종 살인은 인간의 혀 즉 언어를 통해 시도됩니다.
우리는 말로 우리의 이웃들을 상처내고, 말로 우리의 이웃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것을 조심할 이유를 설명하며 이것 즉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 다시 한번 인간이 지니는 가치를 규정하며 그가 누구이든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든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라고 우리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살인이나 언어 폭력을 포함한 일체의 모든 살인적인 폭력은 이런 하나님의 고귀한 작품을 손상시키는 범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경고되어지고 피해야 할 심각한 죄이며, 만일 살인의 죄를 범했을 경우 이 또한 심각하게 다루어 져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째 질문-“어떻게 살인의 죄를 짓게 되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폭력이나 신체적인 살인을 행할 경우 반드시 보편적으로 거치는 감정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사람들은 분노의 길을 거쳐 살인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인의 역동성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역학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본문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자, 본문에 거듭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분노”입니다.
창4:5을 보십시오.“--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다시 이어지는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성경은 명백하게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인 과정적인 원인이 바로 분노였음을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음 절 7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분노 그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엡5:26 말씀을 보십시오.“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분노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죄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분도 내지 못한다면 그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분노는 반드시 억제하는 것만이 미덕은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화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왔습니다. 화병은 분노를 부적절하게 억제한 결과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우리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그런 감정을 정직하게 건설적으로 형제와 자매들에게 표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다고 말하십시오” “내가 지금 너무 힘들다고 말하십시오”
이런 표현 그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정직한 감정의 교류를 통해 문제의 해결로 나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공격적인 반응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됩니다. 다만 자신의 정직한 감정의 토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이렇다”고 말하십시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I-message"라고 일컫습니다. 당신-You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공격이나 복수의 의도쪽으로 발전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일단은 내 감정의 솔직한 전달에 집중하고 다음 단계의 인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한 상대뿐 아니라 무엇보다 나의 그런 상한 마음을 아시고 치유하실수 있고 내 억울함을 풀어주실 수 있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 나아가 아뢰일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네 마음을 내게 토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내 마음을 전달할 기회를 가지셨다면 이제는 숨 한번 크게 쉬고 잠잠히 상대의 반응을 기다려 보십시오. 무엇보다 잠시라도 기도한 다음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 보십시오. 대부분의 폭력과 살인은 이런 여유를 갖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기 이전에 이런 감정 표현의 여유나 기도의 기회를 가진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분노함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 분노를 다스리는 일에 실패함으로 살인의 범죄에 도달한 것입니다.
셋째 질문-“무엇으로 살인을 예방할 수 있는가?”
성경은 살인이나 살인의 원인을 만드는 미움이나 분노를 다룰때마다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우리 시대처럼 살인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생명 존중을 실현하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열쇠 하나는 하나님의 관점이고, 또 하나의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첫째 열쇠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태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잉태하게 하신 것이라면 그 태아도 여전히 소중하게 보호되어야 할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원수같은 인간이라도 원수라고 생각하기전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십시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아닙니까? 제가 제 안의 분노를 다루는 비책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도 목회자이지만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기에 인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경우가 없을수 없습니다. 그때 만일 제가 그런 사람을 대하면서 “아이구, 저 원수 언제 죽어”하면 정말 원수처럼 보이고 그가 죽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언제가부터 아니 야고보서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적용을 하기로 했습니다.
약3장에 네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한다는 말씀에서 도전을 받고 그후 속상한 인간을 대하면 그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내 자신에게 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저, 인간도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르게 보이더라구요. 물론 마귀가 이 작품을 적지 않게 손상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아끼시고 회복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소중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인간 존중을 실현하는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우리가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인 가인의 살인의 행적을 다룬 창4장을 이미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신약 성경은 가인이 살인하게 된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요한일서 3:12에 그 대답이 기록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그 악한자가 누구입니까?
사단 마귀가 아닙니까?
제 정신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조종을 당한 것입니다. 가인이 살인할 때 그는 마귀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8:44에서 마귀를 가르쳐 “--처음부터 살인한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생명을 도적질하는 자, 빼앗는 자요, 생명의 파괴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순간적으로 사단의 지배를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바로 다음 절 엡4:27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마귀의 지배를 거절하고 살인의 영성에서 벗어나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일생을 살아갈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지배 곧 성령의 지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4:30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말라”고 권면합니다. 엡5:18에서는 “술 취하지 말고--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가르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이 소중하고 존귀하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성령에 충만하지 못하면 마누라도 원수처럼 보입니다. 교우 여러분도 원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면 마누라가 갑자기 천사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도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마누라가 아니고 교우 여러분이 아니라, 제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인의 미혹을 극복하는 두가지 열쇠--
첫째 열쇠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생으로 이웃들을 가족들을 바라보십시오.
둘째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매순간 순간 하나님의 지배 성령의 지배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이 세상은 당신이 두팔을 벌려 사랑으로 껴안을 사람들로 꽉 차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은영이 엄마라는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자매가 예수 모르고 성령충만을 경험하기 전에는 늘 자식이 속 썩일때는 “꼭 너 닮은 자식 하나 낳아서 속좀 썩어 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예수 믿고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은영아, 너도 꼭 너 닮은 자식 하나 낳아 기도로 자식 키우는 행복을 맛보고 살려무나”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 어떤 인생을 사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