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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용 목사
전쟁은 인간을 참으로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특히 강대국들에게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항상 전쟁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는 전쟁 때문에 일어난 아주 비참한 이야기 하나가 등장합니다.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활동하던 이 시대에 아람 왕인 벳하닷이 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를 공격했습니다. 아람이라는 나라는 오늘날의 [시리아]를 말합니다. 이 아람의 벳하닷 왕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한 것입니다.
아람 군대는 사마라아를 포위하고 성곽을 사방으로 완전히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개미 새끼 한마리 얼씬 못하도록 사마리아 성을 군대가 완전히 둘러싼 것입니다. 밖으로부터 사람이나 식량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성 안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평소에는 먹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던 나귀 머리가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심지어는 비둘기의 똥도 식량으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사마리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거두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루는 이스라엘 왕이 성 위를 거닐고 있었는데 갑자가 두 여인이 왕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엎드렸습니다. [무슨 일이냐?] 하고 왕이 묻자 한 여인이 다른 여인을 가르키면서 말합니다. [왕이여! , 지금 사마리아 성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차마 눈을 벌겋게 뜨고 죽을 수가 없어서, 저는 이 여인과 약속하기를 우리에게는 각각 아들이 한 명씩 있는데 이 두 아들을 차례로 잡아 먹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번에는 내 아들을 잡아서 삶아 먹고, 다음에는 저 여인의 아들을 삶아 먹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을 먼저 잡아서 삶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 여인에게 [당신의 아들도 삶아서 먹자!]하고 말했더니 이 여인이 자기 아들을 숨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은 약속을 어기고 자기 아들만 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은 이미 죽고 말았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았습니다.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했습니다. 전쟁이 몰고 온 비참한 현실 앞에서 왕은 가슴을 치고 떨어야만 했습니다.
왕은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몰고오는 것인가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전쟁은 인간으로 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인간의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도 다 거두어 가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빌린다면 전쟁은 우리 인간을 자신의 자식마져도 삶아 먹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을 짐승처럼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윤리가 어디 있습니까? 도덕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힘과 폭력만이 남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는 인간의 죄성이 가장 잔인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쟁! 전쟁과 폭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주에 너무도 충격적이고 엄청난 쇼크를 경험했습니다. 무섭고 치가 떨리는 전율이 우리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말 밖에는 더 표한할 수 없는 잔인함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랍의 테러집단들이 비행기를 몰고 세계무역센타 빌딩을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인류에 대한 꿈과 이상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앉고 말았습니다.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문명의 세계를 세워보겠다고 한칸 한칸 쌓아올린 바벨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런 모습이 정말로 깨우치고 문명화된 21세기의 문명인들이 벌이고 있는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110층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면서 우리 스스로가 믿어왔던 인류에 대한 장미빛 희망은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려앉았습니다. 인간은 역시 씻을 수 없는 죄인이구나! 무서운 죄악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최고로 잔인한 테러를 보면서 저는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만드는 것만이 우리 인류가 살 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이제 인류는 모두가 함께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옛 헬라인들은 전쟁이 중지된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싸움은 멈추었지만 힘의 균형이 깨어질 때에는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우리 한반도는 휴전 협정 상태에 있습니다. 전쟁을 잠시 멈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휴전 상태라는 말은 언제든지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을 멈추려고 한다면 이 [휴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야합니다.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지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시 체제를 살고 있는 것이지 평화 속에서 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위장된 평화 속에 사는 것입니다. 위장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평화는 힘에 의한 평화입니다.
로마는 그 거대한 힘으로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로마가 너무나 거대하니까 누구도 이 로마에 대항할 생각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힘으로 누르게 되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가 있는 것 같지만 내용을 보면 진정한 평화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팍스 로마나]라고 합니다. 팍스(Pax)라는 말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팍스 로마나 'Pax Romana']라는 말은 로마의 평화를 말하는데 이는 로마가 가지고 있는 힘과 폭력과 무력에 의한 평화를 말합니다. 힘으로 내리 누르면 약한 나라들은 꼼짝하지 못합니다. 이때에는 겉으로보면 평화롭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장된 평화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이러한 팍스 로마나와 같은 힘에 의한 평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세계는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냉전체제 속에서는 독재하거나 독주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서로 견제하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아울러 세계는 미국이라는 강력한 초강 대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습니다. 그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가 되고 만 것입니다.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한 평화는 미국의 강력한 힘에 의한 위장된 평화인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힘에 눌려서 아무런 소리도 못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평화로운 세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테러사건도 힘에 눌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세력들이 [팍스 아메리카]에 대항하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는 결단코 이 지구상에 평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 너무나 자명합니다. 팍스 아메리카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힘에 의한 위장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평화는 전쟁이 중지된 평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힘에 의해 위장된 평화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정한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평화를 [샬롬]이라고 했습니다. 이 샬롬은 우리 개인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평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샬롬은 힘의 불균형에 의한 억압되고 위장된 평화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에 샬롬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공동체적으로 볼 때에도 샬롬은 공동체 전체가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고, 정치적으로도 매우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샬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총체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은 인간이 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샬롬을 이 땅에 실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갖고 있는 힘에 의한 평화나 위장된 평화는 언제나 하나님의 샬롬에 반대로 행동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해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습니니까?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첫째, 하나님의 샬롬을 해치는 행위는 바로 테러입니다.
테러(Terror)라는 말은 공포, 두려움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테러 행위라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테러는 평화를 위협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든 테러 행위 자체는 근절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번 테러 행위는 [나도 죽고 우리 모두도 죽자]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으니 테러 중에서도 아주 사악한 테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식의 테러가 앞으로도 자행된다면 인류는 공포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평화를 해치는 테러 행위는 없어져야 합니다. 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이 이번 사건을 보면서 테러에 반대하는 움직임 쪽으로 가고 있는 현상은 매우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심지어는 과격분자를 제외한 평화로운 이슬람교도들도 적극적으로 반테러주의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인류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테러에 반대함으로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테러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테러에 의해서 가족을 잃고 슬픔 가운데 빠져 있는 미국민들의 아픔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기회로 세계에 있는 모든 국가들이 반테러 선언을 하는 기회로 삼아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키는 귀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평화를 해치는 요소는 바로 전쟁입니다.
우리는 미국민이 당한 슬픔과 고통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바로 또 하나의 보복을 하게 될 때 그것은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너무나 많고 또 다른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 일으킬 것이 뻔합니다. 폭탄을 가슴에 안고 자폭하면서 죽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픔을 당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쉽게 말할 수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최강국이요, 하나님을 믿는 국가라면 보복보다 용서가 더 어렵다는 것을 한번 보여줌으로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용기있는 행동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의 용서와 화해를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용서 만이 보복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번 테러에 대해서는 정의의 차원에서 테러에 관련된 자들을 법정에 세우거나 그들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조처를 취해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를 상대로 보복 전쟁을 한다면 세계의 증오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충돌은 더욱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는 또 다른 테러의 보복으로 악순환을 되풀이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전쟁을 반대하시고 평화를 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 : 42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 보시면서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마도 AD 66년 경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거대한 로마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전쟁 속에 폐허가 될 예루살렘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한번도 평화를 알지 못하면서 매일 전쟁에 시달리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매우 안타까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말하면 [이 땅에 이제는 전쟁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는 세상이 와야 할터인데!] 하는 말로 바꾸어서 생각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는 평화로운 예루살렘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평화가 깨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와 화해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나도 죽고 너도 죽자는 정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희생과 용서와 사랑 만이 너를 살릴 수있다는 [자기 희생의 정신]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자신을 희생함으로 남을 살린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테러국들과 테러범들은 이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깊은 상처를 입은 미국민들도 미국의 입장에서 이 십자가를 바라보지 말고 세계평화의 틀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세계를 건설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온 인류가 함께 사는 [공존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상호 간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지구촌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로 나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 일어나는 일도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테러의 공포는 TV를 통해서 바로 전 세계에 방영이 됩니다. 바로 주가는 폭락하고, 경제는 하향길을 걷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의 운항은 정지되고, 수출길은 막혀버립니다. 거기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세계의 모든 나라의 경제는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되거나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촌에 살고 있는 이상, 우리는 서로 간에 상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함께 살고 함께 죽어야 하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한 배를 타고 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만 잘 살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공존(共存)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고 상대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공동체 의식과 한몸 의식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존을 배워야 합니다.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종이 달라도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문화가 달라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상이 달라도 우리가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종교와 신앙이 달라도 우리는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캐나다를 갔을 때 토론토 대학에서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토론토는 세계 인종 전시장이었습니다. 120 개국에서 온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고 있었습니다. 토론토는 세계에서 몰려온 120개국의 인종들이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세계였습니다. 한 예로 [토론토 대학]의 학생 회관 건물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는 1층에는 카톨릭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층에 올라가 보니까 거기에는 이슬람 성전이 있었습니다. 한 건물 안에 한 군데에는 성당이 있고 또 한 군데에는 이슬람 성전이 있는 것을 보면서 함께 공존하는 세계의 일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평화와 공존의 세계가 곧 하나님 나라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앞으로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은 평화와 공존이 있는 평화로운 나라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과 앗시리아와 같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평화와 공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11장에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동물의 세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나라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한 울타리 안에 같이 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는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누워도 물고 뜯고 죽이는 일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사자를 끌어도 따라오는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노래하고 있는 나라는 분명히 평화로우면서도, 강한 것과 약한 것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를 곧 메시야의 나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테러의 공포에 떨어야 하고,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와 공존입니다.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속에서 함께 공존하는 법을 배우면서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평화로은 속에서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입니다.
평화와 공존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교회에서 부터 그러한 일을 하나씩 실천해 나아야 합니다. 화해할 일이 있으면 내가 먼저 화해하는 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서로 원수를 보는 것처럼 한 교회 안에서도 행동하고 있다면 심하게 말하면 그것도 [테러 연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평화를 깨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해할 일이 있으면 먼저 그 형제를 찾아가서 화해하고 다시 와서 예배를 드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평화를 실현하려는 평화 훈련인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면에 있어서 대화하고 조정해서 함께 평화를 누리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마치 대쪽 같아서 대화할 줄도 모르고 타협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나무는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 부러지고 마는 법입니다. 그러나 대나무와 같이 유연한 나무는 강한 바람 앞에서도 결코 부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있거나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을 때에도 우리는 대화하면서 타협하면서 조정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나는 골치 아픈 것이 싫다고 교회를 그만 슬며서 떠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를 가지고 대화하고 타협해서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교회 안에서 평화 연습과 평화훈련을 하고, 함께 공존하며 사는 훈련에 익숙하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민주적인 [평화연습]이 확대될 때, 우리는 이제 남과 북이 이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나라와 인종과 신앙과 사상이 다른 인류가 함께 평화로이 공존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526장은 우리에게 평화와 공존을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찬송입니다. 1절입니다. [주 예수 안에 동서나 남북이 있으랴 온세계 모든 민족이 다 형제 아닌가] 3절 입니다. [다같이 손을 맞잡고 한 아버지 밑에 겉모양 인종 다르나 한 자녀 되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에서는 세계 모든 민족을 형제요 자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한 자녀라고 노래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계 모든 민족을 형제 자매로 여긴다면 우리가 어떻게 같은 형제를 무력과 힘으로 다스리면서 탄압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세계 모든 민족을 형제 자매로 여긴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형제 자매를 그렇게도 무참하게 테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세계 모든 형제 자매를 한 형제와 자매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 물고 뜯는 전쟁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평화와 공존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다함께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평화를 해치는 모든 폭력과 전쟁을 반대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공존을 해치는 힘에 의한 폭력과 테러를 반대합니다. 어떠한 힘과 폭력을 앞세운다고 해도 거기에는 거짓된 평화나 위장된 평화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개인으로 부터 인간이 사는 모든 삶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인 희생과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폭력과 전쟁 앞에서 우리는 재를 무릎 쓰고 회개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한 주간을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주간]으로 정합니다. 새벽마다, 예배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평화의 일꾼으로 사시고 또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