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림문학 봄호 수필평
산은 늘 그리운, 늘 너그러운
- 2024 산림문학 겨울호를 읽고
권대근
저 청산이 좋아/ 여여한 기맥이 좋아 // 오늘도 너를 향해 / 내 창가에 앉다
- 이영도의 <인생의 길목에서>
Ⅰ.
김광섭은 <지상>이란 시에서, ‘산은 자유요 바람이요 고욜세/ 커서 좋고 깊어서 더욱 좋네’라고 노래했다. 산이 있으면 그것으로 막히고 갇히는 줄로 알기 쉬우나 오히려 그것이 없는 광야에서 인간은 갈 곳이 없으며 버림받는 양 고독을 맛보기 마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7할의 산지를 국토로 가진 우리는 그만큼 천혜가 두텁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야가 아름답다는 것은 해외에 나갔다 들어와 보면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산은 여인의 몸매나 얼굴과도 같아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와 거리와 고도가 있다. 산에 올라가면 누구나 다 성스러운 빈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이 커다란 사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산은 마음의 고요와 고상함이요, 큰 산은 높은 덕이 솟은 것과 같다. 산에 가서 그 의젓한 거구 앞에 서면 누구나 어린애, 노송, 잡목이 그들의 연륜을 속에 감추고 한결같이 잎사귀로 바람과 희롱하는 모습, 높은 바위와 깊은 골짜기가 천만 년을 어제같이 묵묵히 안고 서서 한 찰나의 희비애락에 마음 사로잡힌 우리를 측은히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 모두가 영원하고도 살아있고, 정다우면서도 위엄 있다. 산은 모든 자연 풍경의 시초요, 종말이다.
지구상의 산들은 천연의 대사원이다. 참된 종교는 거의 이 산속에서 이루어졌다. 들판이나 늪에서 사는 승려 또는 은자들은 아무리 그 생활이 청빈하고 주거가 검소할지라도 산에서 사는 자연인과 은거인들을 따를 수 없다고 J 러스킨은 설파했다. 깊은 슬픔이 있을 때라도 언덕길을 산책하면 가끔 마음의 위안을 받는 수가 있다. 심산계곡을 소요하면 더욱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안과 같이 우리 인생의 고민을 어루만져준다. 높은 산을 보라. 그것은 이미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면서 두 세계를 반씩 나누어 갖고 있다. 그 위대한 모습은 사소한 인간의 번민 따위는 한 입을 불어 내던지는 느낌이 있다. 깊은 산골에는 숭고한 정적이 있다. 갖가지의 소리를 감춘 침묵 속에는 무한한 무엇이 물결치고 있다. 거기에 자연은 순화되어 어떤 초자연적인 엄숙한 모습에 이르고 있다. 산에는 연결시켜주는 우정이 있다. 어떤 험난한 곳에서도 손을 붙들고 이끌어주며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정웅은 늘 그립고 너그러운 산을 제재로 산림수필 <팔공산과 모악산>을, 김은희는 <살얼음>을, 이원환은 <숲에서 얻은 기쁨>을, 이지율은 <면앙정 노래> 를 썼다.
Ⅱ.
산림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 중에 또 하나로 통합의 화해성을 들 수 있다. 산림문학 관련 수필 상당수 작품들이 구원이라는 문학적 특성에 기초하여 두 구성소간 화해를 권장하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만족, 열등감 같은 한두 가지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피해의식의 부정적인 경험은 잘못된 세계관을 형성하고, 비관적인 고정관념으로 발전하게 한다. 따라서 산림문학이 이런 경향성을 잘 파악하고 안식의 문학, 영혼의 문학인 수필의 목적을 제대로 살려서 독자로 하여금 이런 부정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세계가 아무리 속화되고 물화되더라도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대의식의 변화를 초월하여 존재의 원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이끌어내고 아울러 세계가 아무리 혼탁해진다 해도 현실의 모순을 자각케 하고 모순의 흔적을 쫓아 초월하며 피안의 세계를 사유케 해야 한다. 진실된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형상을 표현한 수필들은 사람의 마음을 고요의 세계로 인도해 준다. 풍부한 감성과 질 높은 사상이 담겨진 글은 읽고 나면 기분이 아주 좋다. 이런 글에는, 향기가 묻어나고 감미롭고 선홍빛 아름다움이 넘친다. 화합을 추구하자는 호소는 ‘갈등과 불통시대’에 처한 지친 현대인에게 싱싱한 생명력을 혈맥 속에 휘돌게 해 삶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문학작품은 곧 인생 그 자체다. 풍부한 지식과 상상력, 그리고 자기만의 개성 있는 영적 세계의 구축으로 문학은 독자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마땅히 깨어있어야 할 젊은이들이 깨어있도록 해야 한다.
수필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해야 한다고 할 때, 산림문학 겨울호에 실린 수필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기준에 딱 맞는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이정웅의 <팔공산과 모악산>이란 작품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써 거울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의 수필은 등불 같은 글이다. 영호남으로 양극화된 지역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행자가 되어 숨겨진 삶의 아름다운 진실을 캐내는 일은 모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며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이 아니다. 화해의 악수를 하게 하는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 ‘산’은 멋진 제재다. ‘보이지 않는다’의 날카로운 응시를 통해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일이나, 글을 쓰면서 현실을 따갑게 터치하는 모습은 지성인으로서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일이라 하겠다.
대구 팔공산을 머리에 이고 사는 평범한 사람이 문득 전주 모악산(母岳山)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두 산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깊은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부악(父岳) 즉 아버지 산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산 중에서 아버지 산이고, 이와 달리 호남의 고도 전주의 진산은 모악산(母岳山) 즉 어머니 산이다. 이런 두 산의 의미를 해석해 보면 비록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원래는 모든 산의 어버이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슬하에 자식이 있고 그중에는 말을 잘 듣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어버이는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밉든 곱든 그들을 잘 다독거려서 화목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악(팔공산)을 껴안고 있는 대구와 대구 사람, 모악을 껴안고 있는 전주와 전주 사람은 부부의 범위를 뛰어넘어 영호남은 물론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명제를 실현해 나갈 책임이 있다. 부(父)는 아버지를 말하지만 “만물을 나게 하고 그것을 기르는 뜻도 포함 되어있다.
이정웅 <팔공산과 모악산> 중에서
대구의 팔공산이 원래 부악산이니, 아버지이고, 전주의 모악산은 어머니 산이니 영호남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부부의 연이 있으니, ‘영호남은 물론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명제를 실현해 나갈 책임이 있다.’는 이정웅 수필의 인연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흔히 문학계에서는 80년대를 문지시대, 90년대를 문동시대라 한다. 이정웅은 <팔공산과 모악산>의 인연설을 통해 2000년대를 영호시대로 명명하는 것 같다. ‘영호’는, ‘영남과 호남’을 말한다. 이정웅의 꿈은 작금의 이 세상, 라캉의 이 상징계를 화합의 장, 통합의 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최고의 열정과 노력을 쏟아내며 오랜 기간 산 연구를 통해 화합의 논리를 개발하려고 했을까. 언어를 바꾸면 삶을 바꿀 수 있고, 언어를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프로이트는 예술을 심적 불만의 승화라 했고, 앙드레 지드는 ‘신의 세계는 예술이 없다’고 했다. 프랑스의 문화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문화를 강한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이라고 했고, 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문화를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그 지역 주민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불만과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내고, 우리 삶에 자연을 맞아들이는 생활방식, 즉 본향으로 돌아가서 자연과 친화적으로 지내는 것이 진정으로 문화를 제대로 누리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어버이는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밉든 곱든 그들을 잘 다독거려서 화목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이정웅의 논리를 대담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메타버스라는 신대륙이 발견되고, 지금 시대는 AI가 소설을 쓰고 시도 쓰고, 드론이 하늘을 날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작전을 수행하는 첨단과학시대지만, 지구의 위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온 갈등을 한 뿌리론으로 당장에 해소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두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 하나는 아버지이고, 하나는 어머니였다면, 여기에는 필시 부부의 연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영호남은 한 가족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가족끼리 반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수필은 우리의 붓끝이 어디를 지향해야 할지를 명백하게 해준다고 하겠다.
김은희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탁월한 묘사력에서 가능하다. 오빠의 삶을 ‘겨울나무들이 나뭇잎을 훌훌 벗었다. 순록 뿔이 된 나뭇가지는 사뭇 조심스럽게 겨울바람을 응시한다. 핼쑥해진 숲길이 얼음판이 되어 굳어있다. 군데군데 파인 웅덩이 물이 얇게 핀 수제비 반죽처럼 얼었다. 얕은 물구덩이에 바짝 바른 솔잎이 떨어져 있다.’는 표현으로 압축했다. 이 수필 <살얼음>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80살 오빠와 폐암말기인 40대 조카를 만날 수 있다. ‘조카의 사위어가는 생명을 지켜봐야 하는 오빠는 곧 사라질 것 같은 살얼음 조각을 들고 있다. 감당해야 할 몫이 쇳덩어리가 되어 머리를 짓누른다. 무뎌진 몸으로 살아내려고 바둥거리는 조카도 그 살얼음판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이다.’라는 작가는 시들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의 한계점에 연민이 깊어진다. 사위어가는 생명을 위태롭게 지켜봐야 되는 삶이 살얼음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측불가능한 위기의 삶은 겨울 날씨의 살얼음을 닮은 까닭이다. 김은희의 수필은 연민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아프게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수필을 통해 한 작가가 80대 오빠의 힘겨운 현실을 지켜보면서 시달려야 했던 고독과 그 시간을 이겨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오산시 오산대역에서 하차했다. 뭉향기 수목원이라는 명찰을 크게 단 공원이 눈앞에 다가온다. 발부터 급히 디밀었다. 겨울나무들이 나뭇잎을 훌훌 벗었다. 순록 뿔이 된 나뭇가지는 사뭇 조심스럽게 겨울바람을 응시한다. 핼쑥해진 숲길이 얼음판이 되어 굳어있다. 군데군데 파인 웅덩이 물이 얇게 핀 수제비 반죽처럼 얼었다. 얕은 물구덩이에 바짝 바른 솔잎이 떨어져 있다.
수생식물인 연못 가장자리에서 발길이 멎었다. 살얼음이 언 연못 표면이 햇빛에 반짝인다. 살짝 건들기만 해도 깨질 것 같다. 고개가 푹 꺽여진 줄기가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다. 얇은 얼음막 밑에는 가을이 남긴 연잎과 수생식물의 잎사귀를, 앙다문 서릿발이 단단하게 붙들고 있다. 빠져나오지 못한 잎의 한숨이 함께 갇혀 있다.
- 김은희 <살얼음> 중에서
인용된 글은 위기의 삶에 처한 사람의 시간을 ‘살얼음’으로 잘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란 이런 전경화수법이 감동을 견인한다. 묘사에 힘입은 정서의 객관화가 문학성을 한층 높여준다.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사상의 정서화는 필수적이며 또 연상에 의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필요할 것이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러한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가 <살얼음>이다. 이 작품의 발단은, 작가가 물향기수목원으로 발길을 잡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늪에서 헤매고 있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머릿속에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하루하루 내딛는 발자국마다 조심스럽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가슴을 계속 옭아매기만 한다. 나뭇가지 끝에 이슬방울이 바짝 긴장하는 날씨다. 따스한 바람을 가까이 두고 싶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늪에서 헤매고 있는 일상을 벗어나고자’ 수목원을 찾고 그곳에서 ‘살얼음’을 발견하고는 삶과 연결한다. 삶과 살얼음의 결합이 주는 이미지는 고독함과 위태로움 그리고 불안의 그림자를 동반한다. 가망의 없는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늙은 오빠의 심정에 대한 묘사가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것은 김은희 수필가가 가진 여러 장점 중에서 가장 빛나는 강점이다.
숲속에서 마주한 안개와 이슬은 마음 가벼워지도록 위로해주는 자연의 손길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마음 속 갚이 쌓여 있던 불안과 긴장이 자연에 의해 천천히 풀려나감을 느꼈다. 이곳에서 진정한 쉼을 체험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자연 속에서 내가 안고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씻겨 나가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왜 나이 들수록 타고 난 순수는 점점 얕아지고 이기심과 욕망에 휩싸이게 되는 것일까? 예측불가능하고 환원불가능한 것이 삶인데 왜 마음을 쉽사리 비워내지 못할까? 복잡하게 이어진 인연 속에서 타인의 시선과 관습에 얽매인 채 변화무쌍으로 살아가는데, 숲과 자연은 그 자리에 머물며 변치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더 자주 순수한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는 노력을 쉼없이 기울여야 되지 않을까.
이원환 <숲에서 얻은 기쁨> 중에서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그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숲이 주는 힐링효과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수 있다. 수필 <숲에서 얻는 기쁨>은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들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이곳에서 진정한 쉼을 체험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자연 속에서 내가 안고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씻겨 나가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경험이었다.’라는 고백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숲이라는 걸 말해준다. 이 수필을 읽으면, 우리 영혼이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숲에서 얻은 기쁨을 수필 속에 흩뿌리고 있다.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다. 떠남으로 얻은 생생한 느낌은 숲속기행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수필의 맛을 전해준다. 숲속 체험을 통해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의 숲속기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삶의 진통과 창작의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 숲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탁월한 역량이 그의 수필적 가치를 드높인다. 수용은 화해의 필수다. 그는 숲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정서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인 셈이다. 살아가면서 숲속에 나가 다양한 기쁨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설레는 일인가. 만남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의 새로운 운명이 직조됨을 의미한다. 인간적인 삶의 길을 찾는 그의 현자적 모습이 성스럽다. 삶의 문학이자, 인간학인 수필은 치유적 구도를 통해 독자들이 세상과 화해하고 인간 너머의 세계와도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숲과 관련이 깊다.
이지율의 <면앙정 노래>는 ‘정자’를 제재로 한 한국적 수필이다.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정자에 걸려 있는 고어 체인 한자 편액, 나의 식견으론 해독이 어려웠지만, 정자 앞 펼쳐진 풍광을 보며 강호 가도 시인 묵객들의 선경후정先景後情을 읽을 수 있었다.’라는 문장이다. 26세 문과에 급제하여 퇴임까지 모가 나지 않아서 정 맞을 일이 없었으므로 후학을 양성하며 93세의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선비,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르르 호연지기 면앙정俛仰亭을 짖고 이곳에서 회갑연을 베풀었다고 한 송순의 호로 지은 정자가 면앙적이다. 퇴계 이황의 일화, 정철과 동문수학한 사실만으로도 송순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파수꾼이며 그 시대의 등대로 서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역할은 오늘에 있어 중차대하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기에 수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지율 수필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송순의 사상과 시대를 꿰뚫는 선비정신을 탐색할 수 있다.
조선 중기 퇴계 이황께서는 완인完人이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청빈한 선비의 얼이 한 채 정각에 담겨 문학의 성지로서 선비의 유지를 받들고 있어서 그런가 작지만 정신으로는 큰 정자로 존재되어 다녀 온 후에도 또 가 보고 싶은 곳이다. 정자에 걸려 있는 고어 체인 한자 편액, 나의 식견으론 해독이 어려웠지만, 정자 앞 펼쳐진 풍광을 보며 강호 가도 시인 묵객들의 선경후정先景後情을 읽을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환벽당에는 정철의 운명을 바꿔 놓은 조윤제가 기거 중이었는데 어느 날 대낮에 잠깐 든 잠결에 용이 하늘을 오르다가 떨어지기를 거듭하더니 마침내 하늘을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 괴이하여 아래 냇가를 내려 가 보았더니 소년 정철이 멱을 감고 있더란다. 그런 정철을 데리고 와 환벽당에서 면앙정에서 동문수학하게 되었고, 자연 친화적 사상을 계승하는 면앙정이었기에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남도땅 가사 문학의 발원지로 면앙정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지율 <면앙정 노래> 중에서
전통적으로 진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이고, 현실적인 선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미래적 생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다. 적어도 한마디로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때, 수필미학은 존재의 토대를 얻게 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수필은 그 특유의 일상성, 무형식성, 평이성 등을 특색으로 하면서 비판적 문제제기보다는 공감의 영역을 지향하는 성과를 우리 수필문학에서 만만치 않게 거두고 있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율 수필의 특성은 낙천적, 풍류적, 선비적 사고를 통해 얻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변용되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이지율의송순에 대한 평가는 인간적인 면과 그 정신이 반영된 수필의 단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선비 송순과 남도의 가사문학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깊은 호기심을 던지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가사문학의 개념과 송순에 대한 평가를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지율의 수필은 가사문학 한학 등 다양한 영역을 두루 포섭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한국적 수필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의 흔적, 조윤제, 정철 등의 출중한 인물들의 이름도 나온다. 수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가난해도 그 가난이 비참해 보이지 않고, 소박해도 소박함이 부족함으로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하나 마음으로 새겨 본다.’는 이지율의 정자에 대한 촌평이 눈길을 잡아끈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이지율은 이런 선비적 삶을 정확히 관통하며 우리가 각자 전통을 이어받고 민족 얼을 떠받들며 자기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찰하게 한 시도는 이 수필의 수준을 가늠해 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고 하겠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여러 인물을 통해 만족한 삶의 색깔을 드러내었으며, 삶의 교훈을 안겨주었으며, 정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전통에 대한 호기심의 번득임이 따뜻한 서정과 맞물려 감동을 준다.
Ⅲ.
현재에도 산림작가의 마음 속에는 산과 숲이 우뚝 자리잡고 있다. 위의 글들은 삶의 지혜와 산림찬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서, 비인간화된 인간과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네 삶의 지향성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점철된 소망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주제 지향성적인 측면에서 인생론적 또는 자연친화적인 관점을 동시에 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인간의 이상적 삶을 현실과 격리해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필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수필은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져야 할 글이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 정신을 길렀다. 오늘의 우리 수필가들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과 반성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여 자기 발전의 초석으로 삼아야겠다. 유경환은 철학을 만나는 삶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철학은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서 어찌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의 수필을 쓰겠는가. 인식과 형상이 조화된 본격 산림수필을 다시 기대해 본다.
자연을 화두로 끊임없이 산림을 사랑하고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달하려는 선비적인 기질과 구도자적인 정신을 지닌 작가들의 인생철학을 음미해보는 맛, 이 수필을 읽는 쾌미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이들 작가들은 산과 숲 체험을 통해서 얻어가는 정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또한 이들 네 사람의 수필에는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고뇌에 찬 삶이 주는 감동은 수필에 재미까지 더해 준다. 한마디로 이들 수필은 세련된 지성과 감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들 수필의 제재이기도 한 ‘산과 숲’은 긴 세월 동안 산림작가의 수호신으로 우리에게 선비다움의 기개를 안겨주었다. 여생을 산과 숲의 교훈처럼 살아야겠다는 작가의 인생철학이 담긴 수필이라 더욱 감동을 준다. 대체적으로 좋은 수필들은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화 전략들이 매우 체계적이다. 이는 주제의식을 설득적으로 구체화하는 전략이요, 수법이 수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소박하고 진실한 경험의 용해와 자연친화적 감성은 이들 수필의 품격을 드높인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