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소리 열린 소리 / 박보라철컥. 스테플러 속 ㄷ자 철심이 꾹 닫히며 양팔을 가슴께로 딱 붙여 그러모은다. 종이 몇 장을 꽉 붙들어 쥔 모양새가 아주 야무지다. 또다시 철컥, 철컥. 열린 팔이 닫히는 소리. 그 소리를 빈 종이 위에 적어본다. 아니, 그려본다. 아직 의미를 가지지 못한 자음 하나가 무슨 큰 힘이 있을까 싶지만, 섣불리 얕보는 건 금물이다. 목표물이 정확해지면 힘껏 장전한다. ㄹ이 소리를 확 여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걸린 ㄱ이 목에서부터 비상하는 소리를 재빠르게 가로막는다.
덕, 섭, 잎. 이렇게 이름 끝 자에 닫힌 소리가 나면 부를 때 막혀서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그러니 선, 열, 종과 같은 열린 소리를 붙여 보세요. 훨씬 부르기도 쉽고, 편안한 느낌의 이름이 됩니다. 이름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많이 불릴수록 좋은 거니까요.
어떤 성명학자의 말에 내 이름을 입에 붙여 불러봤다. 받침이 없어 걸림도 없는 이름.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소리가 확실히 부르기 쉬웠다. 이름에 운, 복 같은 대단한 걸 붙여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였다. 아기 이름을 지을 때 유명한 작명가를 찾아가거나, 자신의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을 이름 탓하며 개명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고개가 비스듬히 누웠다.
물론, 이름이 지나치게 이상해 놀림당한다면 나 역시 더 나은 이름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한번 쓰고 버릴 일회용품도 가격과 실용성을 꼼꼼히 따지며 사기 마련인데 평생 쓸 이름은 오죽할까. 하지만 개명할 때 빼곤 누구나 스스로 이름을 짓지 못하니 여기에서 문제 아닌 문제가 발생한다. 때로는 항렬자, 돌림자를 사용하는 이유로 매우 개성 없고, 억지로 꿰맞춘 듯한 이름이 탄생하곤 한다. 그래서 온갖 좋은 의미를 담은 한자를 붙여 약간의 합리화를 시도한다. 철컥. 마음이 닫힌다.
내 친구는 자기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닫힌 소리로 끝나는 이름이라 부르기도 힘들었지만, 너무 평범한 게 더 큰 이유였다. 매년 새 출석부엔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꼭 한 명 이상씩 있었단다. 심지어 성까지 같으면 이름 뒤에 A, B, C를 붙여 구분해야 했고, 선생님이 그 알파벳마저 붙여 부르지 않으면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명이 함께 대답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생겼다.
그래서였을까. 성인이 된 후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의 카톡 프로필을 보다가 내 기억에 오류가 생겼다. 사진은 분명 친구 얼굴이 맞는데 이름이 달랐기 때문이다. 큰돈 들여 개명했으니 앞으로는 새 이름으로 불러달란다. 열린 소리로 은은히 퍼져가는 예쁜 이름. 하지만 낯선 그 이름이 입에 잘 붙을 리 없다. 철컥. 입이 닫힌다.
아기를 가지면 가장 먼저 어떤 이름을 지을까 고민에 빠진다. 유행하는 아기 이름 목록을 꼼꼼히 살펴보거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독특한 이름을 짓기 위해 사전을 뒤적이기도 한다. 이 즐거운 고민은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자꾸 소리 내 불러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글자로 볼 때 좋은 이름일지라도 발음이 어려우면 엑스 표를 친다. 돌림자가 아니라면 부모조차 부르기 힘든 이름은 제외한다.
정성껏 고른 이름을 종이에 적어놓고 가만히 바라본다. 죄다 끝 자에 열린 소리가 나는 받침이 있거나 아예 받침이 없는 것들뿐이다. 우연히 들었던 성명학자의 말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던 탓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편안한 느낌의 이름을 찾기 위해 내 모든 감각이 움직였던 걸까. 알 순 없지만 내 아이의 이름이 좋은 방향으로 많이 불리길 바라며 선택한 것만은 확실하다.
태초에 신께선 인간에게 만물의 이름 짓는 일을 맡기셨다. 우린 이미 그때부터 누군가, 무언가를 부르는 일에 몰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각자의 특성을 잘 나타내면서도 부르기 좋은 이름을 지을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꾸 그 이름을 불러 관계를 만들어 갔을 것이다. 글자 발명 전이니 적지도 못했을 수많은 이름을 다 기억하기 위해 최초의 인간, 아담은 어떤 특별한 작명법을 썼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계속해서 인쇄된 주소록을 묶는다. 철컥. 주소록에 적힌 무수한 이름들이 ㄷ자 철심의 팔 안에 모여 닫힌다. 눈으로 그 이름들을 쭉 읽어내리다가 오늘은 괜히 한번 불러보고 싶어졌다. 누군가 소중한 마음을 담아 많이 불리길 바라며 지은 이름들. 가끔 닫힌 소리로 끝나는 이름들도 있지만 대부분 열린 소리로 끝나는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성명학자의 말대로 닫힌 소리로 끝나는 이름은 좋지 않으니 무조건 피해야 하는 걸까.
한국의 이름 부르는 문화엔 이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이름 뒤에 ‘아’나 ‘야’를 붙여 부르는 것이다. 희섭아, 정국아. 이렇게 부르면 닫힌 소리로 끝나는 이름들도 열린 소리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엔 없고 한국에만 있는 이것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혹시 닫힌 소리의 이름을 편안하게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규칙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장까지 야무지게 묶은 스테플러가 ㄷ자 철심이 없는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철심을 넣기 위해 윗부분을 연다. 스프링이 긴장을 풀며 소리를 낸다. 팅. 열린 소리가 방안에 퍼져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