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증언을 위해서는 생명을 줄 수도 있다!(행20:7-27)
갈등
1. 사도행전 이야기 32번째 시간입니다. 개신교 근대 선교의 아버지는 영국의 윌리암 캐리입니다. 그는 1793년, 32세에 인도 선교사로 그의 가족들과 함께 갔어요. 이 전에는 유럽 개신교회가 선교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73세에 인도에서 생을 마쳤고, 인도 땅에 묻혔습니다. 18-19세기는 웨슬리나 윗필드의 영향 아래 영국과 미국에서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던 시절에, 캐리는 목회가 아니라(자국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 보장) 선교에 눈을 뜨고 인도에서 평생 복음 전도를 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엄청난 대가 지불이 따르는 불편한 생활)
윌리암 캐리는 41년간 인도 선교사로 일하며 평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그의 이런 노력들이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든 선구자가 되었어요. 한국에도 개신교 선교사들이 1884년부터 오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암 캐리와 사도 바울, 이 두 사람은 시대를 초월해서 같은 메시지를 던집니다.‘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 수 있겠는가?’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 질문에 어떻게 답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전도를 마치기 전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로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19:21)
2.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은 이방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적지 않은 헌금을 혼자 가져갈 수 없었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했어요.(4절) 바울은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그동안 복음을 전했던 곳들을 돌아보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마게도냐(빌립보)를 거쳐서 헬라(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물렀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로마서) 그리고 다시 빌립보와 드로아(아시아-터키)를 거쳐 밀레도 항으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해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17-38절, 지도영상)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3년 동안 자신이 어떻게 일했는지 말했습니다.
19-21절,“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동안에 그가 겪은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말했어요. 그의 말을 들은 에베소 장로들은 충분히 공감하였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어요.
3.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것도 말했습니다.(38절) 이런 정황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24절,“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예루살렘으로 간 이후에 큰 고난 가운데 복음 전도의 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바울은 그 길을 간다고 선언했어요.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 인사 가운데 바울이 이 결단의 말을 한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갈등 심화
4.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 가기 전에 드로아에서 일주일을 머물면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7-8절,“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고 하여 모였더니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바울과 드로아 성도들이 모여서 성찬식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나누는데 밤중까지 오래 이어졌습니다. 고별 집회였으니까요! 윗다락에는 등불을 많이 켜서 실내조명을 밝게 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드로아 사람들과 만남, 에베소 장로들과도 그랬지만 얼마나 진지하고 또 간절한 마음이 서로에게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여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집회가 은혜롭게 이어졌어요. 11절,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이런 집회를 맛보기가 좀처럼 힘들죠. 이렇게 은혜로운 시간 가운데 이게 웬일입니까! 9절,“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5. 이 청년이 낮에 종일 일을 하고 집회에 왔으니 얼마나 피곤했겠어오! 바울의 설교가 길어지며 졸다가 그만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은혜로운 집회 현장에 있던 성도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다들 놀라서 어찌할 바 몰라했는데 사도 바울은 10절,“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이것을 기록한 이는 의사 누가였어요. 그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했는데, 바울은 그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졌을 때 죽은 것은 확실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몸을 안았을 때 그 영혼이 돌아왔어요.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기도로 살렸듯이, 바울도 기도로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을 보면 재밌는 발견이 있습니다. 두 사도가 똑같이 죽은 자를 한 명씩 기도로 살렸고, 또 걷지 못하는 자도 한 명씩 기도로 일어나게 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다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점이 눈에 보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비장한 각오를 말하며 왜 여기에 유도고 이야기를 소개했을까요?
실마리
6. 윌리암 캐리와 같이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 전도-선교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의 열정-에너지-관심-사랑-투자 모든 것은 오직 이 한 가지에만 집중했어요. 그리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의 열정도 놀라웠어요. 보통 선교사의 10배 이상을 감당했습니다. 57세에 일찍 생을 마칠 정도로 그는 모든 에너지를 한국 선교를 위해 쏟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좋은 모범을 바울이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이제 그를 그곳으로 인도하심을 알았어요. 그는 100%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고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머지않아 만날 것을 기약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바울에게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인생 마지막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성령님은 22-23절,“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7. 사도 바울은 이후 자신이 가는 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고도, 그 길을 순종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피하지 않으시고 순종하셨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바울은 복음 증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결단했습니다. 그 결단을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바울이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말한 결단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오늘 우리는 편안한 삶과 복음의 헌신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나요? 바울은 가장 가치 있는 곳에 자기 생명을 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증언-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존립 목적이 전도와 선교.
지난 수요일 이른 아침에 오늘 본문을 가지고 지역 목사님들 몇 분과 영상으로 나누었습니다. 질의응답을 나누면서, 그중의 하나가‘유두고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왔을까?’였어요.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참 좋은 질문입니다. 누가는 의사이고 아주 세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불사하고 전쟁에 뛰어드는 전사와 같이 다짐하는 장면 전에, 이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키며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로 바울을 쳤습니다.
8.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버리고 갔어요. 바울이 죽었다가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다시 일어나 루스드라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유두고가 3층에서 추락했을 때 바울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 품었습니다. 그의 생명이 돌아오기를 기도했어요. 하나님께서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살리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유두고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생명을 되찾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두고를 살리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소망이 현실임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서 자신에 닥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선언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바울처럼 영적 전쟁을 수도 없이 경험하고 유두고를 살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 이미 결박과 환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유두고 이야기가 이곳에서 나오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복음 제시
9. 예수님은 십자가를 감당하는 자의 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지만, 그는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어요. 우연히 갑자기 당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오래전 예언자들이 예언으로 시작되었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해야 일을 아셨어요. 막10: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자원해서 갔습니다.
기대
10. 사도행전은 성령님이 교회를 세워가신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불러서 사용하신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어요. 바울 혼자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고요.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그는 결혼도 포기하였습니다. 바울은 당시 성도들에게 결혼을 하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으면 자기와 같이 결혼하지 말고 복음 전도에 올인하라고 했어요.
고전7:38,“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라.”고전9: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사도 바울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자기는 복음 전도에 전력하기 위해 아내를 두지 않았음을 말했어요. 초대 교회 당시의 임박한 종말론이 바울로 이렇게 생각하고 살도록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생명까지는 아니라도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복음을 위해 기꺼이 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붙잡고 작게라도 헌신하며 살아가는 결단을 합시다.
11. 예수님처럼 섬기고, 바울처럼 결단하는 우리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갑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주님도 우리도 바울처럼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살게 하소서.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복음 전도와 섬김에 사용하게 하시고, 전심전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