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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시리즈 1-2강>
(마태복음 6장)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눈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두 주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게 뭔가 하면 아까 오전 시간에 나누었던 믿음 안이라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눈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도 어떤 사람들처럼 내가 믿고 싶은 예수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꾸고 싶다고 해서 우리의 눈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음 안이라는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고 나오고 싶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운명에 결합된 성도들의 운명적인 삶인 거에요
그래서 세상과 다른 눈을 가진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에는 반드시 세상과의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는 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해석이 다릅니다. 그렇게 신자는 세상과 다른 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전에 한 동안 우리 카페가 이삼일 간격으로 말썽이 많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냥 가만 두면 괜찮은데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당신이 아는 예수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예수가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복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백에 아흔 아홉은 버럭 하고 달려들어요. 강 장로 네가 얼마나 안다고 나를 틀렸다고 하느냐?.. 니가 예수나?.. 니가 바울이냐?.. 왜 사람이 그렇게 부정적이냐.. 진리가 그것 하나뿐이냐?.. 그런데 저는 제가 옳다고 한 게 아니라 예수님만 옳습니다.. 라고 한 것인데, 그렇게 말하면 다들 화를 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만 믿는 것인데, 대부분 예수도 믿고 자기도 믿고, 예수도 믿고 목사도 믿고, 예수도 믿고 교회도 믿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게 아니라고 하면 충돌이 생깁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가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러면서 나도 예수 믿는 거 맞잖아 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겁니다.
성경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귀 없는 사람은 없지만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은 오직 믿음 안에서 소통되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게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게 되면 말을 배우게 돼요.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듯이... 한국사람치고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개역성경이 모두 한글로 되어 있음에도 서로 말이 사맛디 않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복음 이야기를 하면 평소에 좋은 사이도 틀어져요. 같은 한국말이고 같은 한글로 쓰여진 성경인데 다들 자기 보고 싶은대로 읽고있다는 말이지요 그럴수 밖에 없는 게 교회가 성경을 그렇게 가르쳤으니까...그래서 믿음 안에 있게 되면, 예수 안에 있게 되면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눈이 바뀌고 귀가 바뀐 사람들만 성경을 주님의 뜻대로 읽혀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에 새롭게 새겨지는 것이지요 말씀으로 채워지는 거에요. 계시록엔 그런 우리를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도 세상 어디에서도 같이 나눌 수 없는 깨끗하고 정직한 말씀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교회에서 견디지 못하는 이유가 그게 말씀이 아닌데 자꾸 그걸 진리라고 하니까 역겨워서 못 들어준단 말입니다. 그렇게 다른 복음에 분노해야 정상이에요 성도는 주의 분노로 분노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진 게 없고 병이 들어서 고난이 아니라 불통의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세상과의 충돌이 계속 일어나는 거에요. 그 세상은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없던 경계가 저절로 생기는 거예요. 그 경계가 뭔가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입니다. 나는 세상과 경계를 가지고 싶지 않은데, 그 은혜의 복음 때문에 세상과의 경계가 계속 발생한단 말이지요.입을 다물려고 해도 말씀이 나를 이기기 때문에 증언을 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남기고 가신 피 그 피뿌림을 입은 교회에요. 교회는 그렇게 주님의 증인으로 존재이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증거의 말씀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수천 수만의 교인이 있어도 수천억짜리 예배당이 있어도 교회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은 피를 믿는 거예요. 창세전에 세워진 어린 양의 십자가로부터 천지만물이 역사가 시작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거에요. 나 있음에서 예수도 있고 하나님도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오류가 그것입니다. 지극히 인본적이며 구원 중심의 기독교, 그건 성경으로 계시하신 주 예수와 아무 상관 없는 인간들이 조작한 종교 나부랭이에 다름 아닌 거에요. 모든 것이 아들의 피로 시작되고 아들로 완성되었다는 그 복음을 일생 동안 확인 당하면서 살게 된 자들 또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구별될 수밖에 없는 자들을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하고 에클레시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세상과 구별되게 하시는 피의 능력,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언약의 피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미리 아심은 영원전부터 아신다는 뜻이에요.
흩어진 나그네는 피 뿌림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나그네와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내용은 피입니다. 무얼 믿느냐고 했을 때 저는 이땅을 다녀가신 그 하나님의 피를 믿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습니다.. 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내용이에요. 언약의 피가 현실로 작용하고 있는 성도들만 체휼하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이것이 우리 믿음의 현실이에요.
(히브리서 11장)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다른 것을 믿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영화로우시다...는 식으로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아들의 피 뿌림이라는 분명한 내용이 있는 구체적 현실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 십자가 외에는, 즉 그 피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다 이루심,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짐,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거예요. 그것을 은혜의 영광을 찬송한다고 하는 것입니다.(엡1:12)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그 피를 애써 외면합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내용이 없어요. 그냥 교회를 습관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거 안 하고 그게 신앙인줄 안다 말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지를 모르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교회를 믿고 목사를 믿고 있어요 그러나 그 피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 젊을 때만 해도 주일에 자장면 사 먹지 않았죠. 어떤 교단에서는 주일에 전기도 켜지 않았어요. 그러면 한전 사람이 일하게 된다고... 그런 걸 믿음인 줄 알았단 말이죠. 그러나 이런 건 말하자면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문자대로 행위로 지키려 했던 이스라엘의 실패와 전혀 다를 게 없지요. 믿음이 없으면 그런 율법 행위만 내어놓게 되는 거에요 성경은 그들을 행위대로 심판한다고 합니다. 아무도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다 성취하신(율법을 온전케 하신) 한 분 주를 믿는 믿음이니까, 다시 말해 그 주님과 관계를 가진 상태를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들을 약속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내용은 창세전에 약속하신 언약의 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사랑 안에서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어 있음을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라가 어떤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영원한지를 배우는 기간이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지붕에 십자가는 있지만 십자가 이야기, 피 이야기는 하지 않는 교회, 그러니까 십자가를 우회해서 천국 가려는 기독교. 그게 사단의 회당이에요 (계2:9)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 안에 있고 십자가가 천국의 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렇게 정하셨단 말입니다. 아들의 피가 없는 자는 절대 천국 못 들어간다 피가 없으면 거룩이 없고 생명이 없으니까
그럼 십자가를 통과한 교회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현실을 평생 동안 반복해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아들의 믿음 안에서일어나는 일이에요. 아들의 영이 있는 자들의 삶이란 말입니다 (갈2:20) 그래서 사도와 같은 성령을 받았다면, 같은 믿음 안에 있다면 그들처럼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고 그들만 피로사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세상 교회들이 자랑할 게 없으니 기껏 자랑하는 것이 교인 머리 수입니다. 등록 교인 수가 몇 만이고 새벽기도 출석자가 몇 명이고 교회 건축에 몇 천억이 들었고 해외 선교센터가 몇 개고... 이런 선교 진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선교가 아니라 외국에까지 가서 다른 복음으로 오염시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니들이 온세상에 돌아다니다가 교인 한사람 만나면 배나 지옥자식 만든다고,, 그렇게 수천 수만의 교인이 있는 대형교회엔 그 숫자만큼의 신주단지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교회는 십자가의 피 뿌림이 있는 교회입니다. 일부러 내가 세상과 다르게 행동한다고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게 아니라 피 뿌림이 있는 성도 한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과의 구별이 저절로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교회가 한사람의 성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큰 성 길가로 쫒아내는 이유입니다. 두증인입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그런 별세의 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계11:3-8) 봉독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 설명을 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것을 단언하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진짜 목숨이 끊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내가 부인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진리의 죽음을 실제화해서 살게 되는 인생을 날마다 살아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그러니까 이미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좋아 라는 별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책망과 돌보심이라는 것은 내가 이 몸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계속 확인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부터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육적자아가 날마다 장렬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십자가의 승리가 날마다 확인되는 자유와 평화가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복음을 살아내는 우리의 믿음이며 찬송인 거에요.
우리 스스로는 나를 부인할 수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부인의 길로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 안에 담아주신 보배로 인해 자기부정의 사건들이 늘 발생하는 거에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는 사건들입니다.(고후4:7-12) 모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세상을 살만한 가치 있는 인생임을 확인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이것을 위해서 열심히 돈도 벌고 공부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구나 나의 행복은 오직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도록 세상과 갈라내시면서 하늘 소망을 주시는 사건들로 점철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며 성령 충만한 삶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고 하십니다. 아주 좋은 말 같죠? 그런데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바로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노력하고 땀 흘려서 그 결과물을 내 손에 쥘 수 있을 때가 행복한 그런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들로만 살아야 한다면 그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라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겠어요. 바로 거지 나사로의 삶이 그렇잖아요. 부자가 던져 주면 먹고 안 주면 굶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게 싫어서 은혜는 입에 달고 살면서도 세상 힘도 따로 챙겨 놓잖아요 그렇게 세상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서도 대접받고 목사란 자들이 그런 세상 고지에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고 사기를 치는 게 오늘날 기독교라고 하는 무당잡교 아닙니까? 대한 유대교...그런 곳에서 불려 나온 여러분이 계시록에 나오는 큰성 길가에 세워진 두증인이란 말입니다. 본의 아니게 그런 내쫒김이 있어야 하는 것은 함께 추방당한 주님과 그 길에 섰을 때 세상이라는 바벨론의 실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계18:4-13)
자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가 실제화 되는 삶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을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성도라면 부득불 띠 띠워져 끌려 가는 길이란 말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돌보심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폭력적 은혜입니다. 예수의 피 뿌림을 얻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만 본의 아니게 부득불 그 죽음과 생명을 살아내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게서 난 어느 인간도할 수 없는 '나는 아니요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를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 죄에서 벗어난 성도의 믿음의 상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에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빤 흰 세마포로 옷 입은 거룩이에요. 이 거룩을 오해해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 나쁜 생각도 안 하고 착하게 살면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은 천국 못 갑니다. 천국은 용서받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까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지가 셀프 거룩으로 아무리 씻고 닦고 해봐야 그건 이사야가 말한 똥걸레란 말이지요.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정하신 아들의 의를 면목없이 빈손으로 덥석 받는 믿음을 의라고 하시는 거에요. 다른 의는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꾸중했던 자기의 가지곤 구원 못받는 거에요 천국잔치엔 임금이 준비해주신 예복을 입어야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 예복이 우리의 의요 거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음입니다. 그렇게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면목없이 초대받은 창녀 고멜들의 혼인잔치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거룩을 이야기하면서 아내를 거론합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피로 사신 신랑 예수가 우리의 거룩입니다. (고전 1:30) 봉독. 다시 말하면 우리의 행위로 만들어지는 거룩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뿌림이 곧 거룩임을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를 피로 사신 신랑 예수를 알기 위해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에베소서 5장의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우리 교회에게만 열어 보여주신 비밀이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그 비밀을 알게 된 것이 '믿음 안'이에요.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이며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 사귐이 곧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장사를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 목적을 가질 수가 없어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실행되고 있는 상태가 믿음이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우리 서머나모임의 어떤 자매 카톡을 받았는데, 부모님이 결혼을 하라고 성화가 대단했던가 봐요. 심지어 이름까지 바꾸려 하신대요. 이름에 결혼 운이 없다고... 부모님 왈 강수연이도 결혼을 했으면 안 죽었을 거 아니냐.. 옆에 사람이 없으니까 죽었지.. 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혼자 사는 것도 은사요 믿음이다. 예수 신랑하고 사는 것이 보통 믿음이 아니거든요 그러다가 때가 되면 갑자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진짜 신랑이 아님을 가르치시려고 진짜 네 마음에 드는 신랑을 주실 수도 있다.. 라고. 이게 위론지 악담인지 모르겠는데 ㅎㅎㅎ
여러분들도 결혼생활을 통해서 알게 되셨잖아요. 남편은 남의 편이라는 것을... 또 순사보다 무서운 게 아내입디다. 결혼을 해서 살다보면 처녀총각 때의 환상은 얼마 못 가서 깨지게 되어 있어요. 죄인들이 같이 살면서 충돌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한 이불 덮고 자도 각자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죄인들이니까 성경은 그래서 우리를 섬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결혼을 다르게 표현하면 적과의 동침이에요. 언제라도 감추어둔 무기 꺼내들고 살벌한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곳이 화목한 가정이니까..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네 집안 식구가 원수이리라...
그런데 그 원수도 같이 살다 보면 살만해서 같이 사는 거예요. 바꿔도 별 거 없더라.. 옛날 어른들이 그러셨어요. 오래 살다보면 그냥 정으로 살게 된다고... 얼마 전에 대통령 된 사람 부인이 그러더라고요. 집에서 맨 날 방귀만 뿡뿡 뀌고 다니는데 나니까 살아주지 누가 데리고 살겠느냐고... 대통령도 그런 소리 듣는데 하물며... ㅎㅎ
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내에게 기대를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엔 어느것도 기대할 것이 없어요 김성수 목사님 노래 집으로 가자에 그런 가사가 있지요 ‘아직도 세상을 그렇게 기대하나..’ 단언하지만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은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로서의 하나 됨이에요.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세례 안에서 한 몸 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같이 나누어진 교회, 그리고 생명도 같이 나누어진 교회.. 이 한 몸 된 교회가 아니면 남편이든 아내든 자식이든 손자든 영원히 원수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안에서만, 그 피 안에서만 사랑이 있고 또 사랑이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다른 사랑은 모두가 가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상대적이고 조건적이며 이기적인 사랑이니까 그런데도 젊었을 때는 사랑이라는 환상을 다 가지고 있지요.그게 호르몬 작용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그거 몇 달 안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진리(예수)를 알고 나면 예수가 사랑임을, 그 십자가 외에 다른 사랑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아가서 8장 6절 성경은 그 죽음같은 사랑 죽음을 이긴 사랑만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 모두가 상대적인 사랑, 한시적인 사랑, 죄로 오염된 사랑, 이기적인 사랑인데 그래서 사랑이 홍수처럼 넘쳐나도 늘 사랑에 목 마른 거에요. 그래서 너희가 진짜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도 모르는 거다 라고 하신 거에요
그러나 한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일부러 사랑으로 하나 되자고 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이 마중물로 부어지게 되면 사랑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교회에 보면 예배 시간에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하세요..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뭐 이런 거 시키는데 그런다고 교회가 됩니까? 백날 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도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부어지게 되면 사랑이 무엇인가 겨우 눈이 열리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도 사랑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소유할 수도 없고 내가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그게 믿음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질이 다르단 말입니다. 내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거 사랑 아니라고 하잖아요 사랑도 자기목적 자기필요로 하는 건 정욕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그래서 한 주 한 세례 하나의 믿음으로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믿음, 예수라는 사랑, 예수라는 소망을 살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우리가 선택하거나 요청해서 얻은 게 아니잖아요 태초에 우리는 아예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행위가 있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예수는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예수입니다. 내가 믿고 싶지 않다고 해서 관계가 끊어지는 예수가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 바뀔 수도 없고 우리의 행위로 인해 그 사랑이 취소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믿은 예수가 아니요 내가 선택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구원,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평안입니다. 샬롬... 다른 말로 복음의 자유입니다. 성도의 자유란 그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자유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의 모든 언어들은 단어는 달라도 다 같은 뜻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진리, 거룩, 생명, 평안, 자유, 구원, 하나님 나라 등등 모든 것이 예수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 한 분에 관한 이야기가 다른 단어들로 나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주가 계신다는 말은 이미 그분과 함께 이 모든 것들이 다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종합선물세트에요. 나에게 주가 계시다는 말은 하늘의 모든 것들이 종합선물세트로 다 주어진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 안에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결과물들이 종합선물세트로 이미 주어졌다는 것입니다.(약1:17-18) 구원은 은혜로 받고 성화는 내 열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닌 겁니다. 예수를 믿는 그 자체로 완성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상급이고 기업이며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똑바로 살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말은 사기입니다. 오늘날 세상교회의 가르침이 사단의 신학이다 보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불안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렇게 사는 게 예수 믿는 게 맞나.. 하면서 늘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고 정죄하지요 새벽기도 갔다오면 신자 같은데 부부싸움 하고 나면 아닌 것 같고....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나중에 늙어서 치매에 걸려도 구원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처럼 강단에서 축도하라고 했더니 홍도야 울지 마라 한곡 부르고 내려와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 카운트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행위를 일일이 체크해서 구원시킬 놈은 시키고 또 상급에 차등을 두고 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져서 구원시키신다면 구원 받을 놈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는 이미 묵시 안에 완성되어 있다니까요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 지게 해서 인간들의 죄를 해결해놓고 하늘에서 뒷짐지고 계신 분이 아니에요 이젠 니들끼리 착하게 살기 말씀지키기 경쟁해서 누가 누가 잘하나 보자 내가 니들 하는 것 봐서 상을 줄거야 그런 하나님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도 아니지요 그런데도 세상 교회들이 그런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야 교회가 잘 돌아 가니까 이 악당들 종교사기꾼들이 교회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거에요 계시록에서 그들이 매매하는 게 뭐라고 합니까? 사람의 영혼 (계18:13)
이렇게 믿음 대신에 종교행위로 사람들을 부려먹고 가두어 놓는 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자꾸 자기 자신을 체크하게 만들고 자기 다듬기에 열심하게 합니다. 교회 강단에서 자꾸 이런 것을 성화라고 강요하니까 진자 바라봐야 할 예수를 보지 않고 자꾸 나를 보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봐야 함에도 자꾸 자기능력 자기증명에 매달리는 거에요 믿음이 아닌 자기 행위를 봅니다. 그런데 그 자기는 아무리 파보아도 죄밖에 나올 게 없어요 자기사랑 자기영광이 곧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죄란 말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보지 않고 나에게 기대하지 않고 주가되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하나님께 칭찬받은 서머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머나 교회 안에 사단의 회당이 있어요. 재미있지 않아요? 세상 교회를 보고 욕할 것이 아니라 세상 교회의 그 모습,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 그들의 모습들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도 저런 짓을 했고, 나밖에 몰랐고 예수는 모르고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내 귀에 복음이 들리고 예수를 주로 믿게 되었는지를 알게 하려고 세상 교회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들이 나였으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에게는 본래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싶은 예수는 모두가 가짜였다는 것을 아는 게 믿음을 받은 성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는 나를 긍정해주고 나만 사랑해주고 내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오니까, 믿음에 의해서 믿음 안에 불려들어 오니까,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으니까 가장 먼저 나는 예수 믿을 인간이 아니었고 나에게는 본래 믿음이 없었다는 것부터 알게 됩니다. 내가 믿고싶은 예수를 믿고 있었고 그게 나라는 우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나를 믿고 있었음을 알게 된거지요 그렇게 나는 나를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는 믿음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 안에 끌려 들어온 성도입니다. 믿음 안에 있으면 날마다 성령 충만해서 할렐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저 예수,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이 땅에 피를 남기고 가신 그 예수가 아니었으면 나는 당장 지옥가도 할말 없는 죄인이라는 현실을 반복 확인당하는 것이 믿음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그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또 다시 내가 주체가 되어 내가 믿는 예수, 나의 목적을 위한 예수, 내가 조작한 예수, 나의 힘이 되어주는 그런 예수가 아닌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여러 번 필사하기도 하고 성경구절을 외우기도 하는데, 그럼 말씀이신 그분과의 관계를 가질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전에 먼저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지식으로 소유하고 내 필요에 따라 이용하려고 아무리 열심을 부려도 성경지식이나 신학공부가 주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그런 공부나 종교행위를 통해 생겨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태초부터 있었던 창조의 말씀이 시도 때도 없이 자기 사람을 찾아오는 겁니다. 밥 먹을 때도, 샤워할 때도, 화장실 갈 때도, 장사 할 때도, 부부 싸움을 할 때도 수시로 말씀이 찾아오심으로 인해서 우리 인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해체되고 말씀으로 채워져 갑니다. 나의 모든 손발이 다 묶이고 나의 힘이 다 털리면서 나의 인생이 차츰 비워진 만큼 말씀으로 채워져 갑니다. 이게 믿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로 채워져 가는 거에요 내가 아무것을 하지 않아도 믿음 안에 있게 되면 믿음으로의 삶을 살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 그들이 아무 한 것이 없어도 나중에 그들의 최종 목적지에서 그들이 살았던 인생을 돌아봤을 때 이미 그것들은 확정되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미 묵시 안에 완료된 약속이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을 통해서 반복해서 확인시켜주신 것뿐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인생을 잘 살아서 그 목적지로 간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 있는지, 그 예수 안에 있는지, 그분과의 동행이 있는지를 확인해보라는 것이에요. 털어내고 비워지면서 위의 것으로 채워지는 그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께서 우리 인생 동안에 내가 고집하는 내 이름을 계속적으로 지워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잘 아시는 김성수목사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자꾸 얄궂은 일들이 생겨서 제가 서울 카페에 그런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김성수라는 이름을 삭제할 시간이 되었다고... 그래서 욕을 엄청 먹었습니다. 강장로가 교회를 깨는 사람이라나 뭐래나...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김성수라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 이름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이기만 하면 김성수를 찬양하고 있느냐고요. 누가 토씨 다른 복음 이야기를 꺼내면 대뜸 하는 말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우리는 김성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해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김목사님이 목회를 1년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에 입문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세상 신이 얼마나 복음의 광채를 가리려고 장난질을 하는지 이젠 김성수 설교가 텍스트가 되고 진리가 되어버렸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보이는 세상 교회가 보이는 목사를 믿지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게 육의 한계입니다.
오해하진 마세요 김성수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 방향성이 잘못 되면 나중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접점이 없고 계속 평행선이에요. 어느 설교자도 아무리 탁월한 설교자도 죄인 한 사람 구원하지 못합니다. 설교자는 그냥 스피커예요. 스피커에 전원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있을 때만 말씀을 담아내는 스피커입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한 몸 된 교회가 아니면 그냥 보이는 사람, 보이는 교회를 쫓게 됩니다. 그게 믿음 없음이에요. 그래서 믿음 안이라는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은 세상엔 감추어져 있는 거에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공간이고 비밀한 시간입니다. 교회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김성수 목사님도 그랬단 말입니다. 나는 교회 하러 온게 아니라고 김 목사님은 거기까지가 자기 역할이에요 이제 서울서머나 그런 건 없단 말입니다. 주께서 다시 서머나교회로 발생시키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거에요. 김성수 붙들고 교회하겠다고 억지 부리면 그게 김성수를 욕 보이고 하나님을 재적하는 것이라는 것을 제발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지시하신 것 중의 하나가 달력이 바뀐 겁니다. 출애굽한 날이 새해 첫 날이에요. 이 말의 뜻은 이스라엘이 지금부터는 세상과는 층이 다른 시간, 질이 다른 시간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배우게 하시는 학습장이 광야 40년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지만 여러분이 사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일반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원과 맞닿아 있는 수직적인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이에요 하나님과 함게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이미 약속된 죽음을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육을 벗는 죽음의 문턱을 넘을 때부터 진짜 삶이 시작됩니다. 이미 여러분 안에는 영생이라는 약속이 심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부활 안에 있는 교회란 말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궤계는 그 약속 대신 보이는 것을 좇게 하고 보이는 것에 매이게 함으로 자기 구원에 집착하게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지식을 통해 자기 의를 세우고 예수 믿음 대신에 교회하기라는 당짓기에 정신이 팔리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 잘 믿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믿음 안에서 살라고 합니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 안에 있는 것, 그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성도의 삶이란 겁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예수 안 믿는 자들보다 더 찌질이 같고 더 나쁜 놈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삶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아들의 피만 보십니다. 그게 우리의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아들의 피가 어떻게 뿌려졌고 어떻게 지금도 작동되고 있는지를 보시고 자기사람들의 믿음을 관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살피고 계신 거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세신다고 하잖아요.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세상에 여러분 하나만 있는 것처럼 지금도 여러분을 관리하신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돌보시는 여러분이 바로 세상에 숨겨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을 믿음 안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 Union Christ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세상을 사랑하고 싶고 세상을 향해서 달려가고 싶어도 여러분에게는 세상과 서로 오갈 수 없는 경계가 둘러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역사하는 성도는 사도들처럼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바보들이 믿음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나와 그분과의 은밀한 관계예요. 나와 그분과만 알고 있는 관계성이에요. 사랑의 관계, 용서의 관계, 의와 거룩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소유하고 내가 발휘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나 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크고 그 사랑이 너무 엄청나서 나는 자꾸 작아집니다. 나는 왜 그분 앞에 서면 자꾸 작아지는가... 작아지다 작아지다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가 버리는 그곳에서 새창조가 일어나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믿음 안의 인생입니다. 창조는 항상 없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있음인 양 세상을 살게 하시고는 다시 없음의 처음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거룩을 배웁니다. 그렇게 털려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는 새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믿음 안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매일 확인당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고난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결국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당신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나의 주님입니다.. 나는 아니오 당신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를 고백하고 가는 겁니다.
이렇게 믿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요 사귐이요 동행입니다. 그분과 공유하는 공간이요 시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큰 믿음, 작은 믿음이 없습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믿음도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믿음도 없습니다. 나의 목적과 필요가 아니라 그분의 목적과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믿음의 분량이라고 해요. 믿음의 분량이란 누구에게는 많이 주고 누구에게는 적게 주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그분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그분의 때에 주어지는 믿음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믿음 안에 있기 때문에 믿음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발산되고 나타나는 겁니다.
믿음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사랑이고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서 새 피조물의 새 창조로 일어나는 것들이에요. 새 창조란 첫 창조에 문제가 있어서 다시 하는 창조가 아니라 이미 완료된 것들을 우리에게 담아주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과 섬김이고, 그 일을 하신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 지금도 우리를 빈틈없이 돌보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 고난이 뭐라고요? 돈 없어서 고생하는 거? 병들어서 아픈 거? 아니에요. 고난이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인당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과정, 자기부인의 삶을 뜻합니다. 주님의 손에 의해서 털려나가는 그 모든 세월, 그리고 그분으로 채워지는 그 모든 복된 인생입니다. 주님이 그러셨지요 “복있는 자여 너희들은 애통할 것이고 의에 주리고 목 마를 것이며 나로 인해 핍박받을 것이다.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약속의 죽음 안에서 그와 하나 되는 새 생명..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을 누리고 찬송하게 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의가 되시고 거룩이 되시며 구원이 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우리는 그 은혜의 영광에 참여됨을 일생토록 믿음으로 배우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여정 속에서 별세의 소망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었구나.. 내가 살 집은 저 위에 있구나.. 땅에 있는 것은 구할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세상과 자꾸 찢어지게 되는 사건들이 우리 인생 속에 발생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린 절대로 소망을 가질 수 없으니까 세상이 좋으면 그냥 세상에서 살지 세상과 별세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성도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에요 그래서 세상 것으로 인해 요동하지 않는 겁니다.
바울은 그 소망을 우리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그러니까 주님이 다스리시고 끌고 가시는 대로, 주님이 챙겨주시는 대로 그냥 사시면 돼요. 그냥 삽시다. 그냥 사는 거예요. 그게 믿음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라는 길 위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분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는 길 위에서는 아무리 뒤돌아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에 손오공입니다. 우리를 빈틈없이 돌보시는 그분의 손길을 알고 믿음이 끌고 가는 최종 목적지, 즉 완성의 죽음, 진리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살아있으면 되는 겁니다. 믿음은 우리를 더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 안에서 산자들인데 뭘 더 잘 살아요? 내가 사는 인생이 아니라니까요
(히브리서 11장)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는 목적지가 죽음입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게 믿음이 끌고 가는 목적지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잘 죽으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죽이시는데 있어요 그분이 주시는 것으로 잘 죽으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믿음은 우리의 손발을 묶고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안에서 그분과 같은 멍에를 메고 한 곳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통과하는 모든 세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그렇게 자기 부인이라는 반복되는 고난, 자아의 죽음이라는 십자가의 현실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비로소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게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잖아요.
그래서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 광야 인생동안 우리는 그 찬송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아들의 나라에서 영원히 부르게 될 그 찬송입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예수가 인도하셨네.. 이것이 우리의 찬송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이제 우리가 알았습니다. 주 예수의 사랑이 우리를 죽음같이 덮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약속이 그 은혜의 복음이 우리의 시작이고 완성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들이 그 사랑과 그 믿음과 그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다 예수 이름으로 천국 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오래전에 했던 강론을 다시 올립니다
믿음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것은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