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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사귀(生寄死歸)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시 머무는 것일 뿐이며 죽는 것은 원래 자기가 있던 본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이르는 말이다.
生 : 날 생(生/0)
寄 : 부칠 기(宀/8)
死 : 죽을 사(歹/2)
歸 : 돌아갈 귀(止/14)
출전 : 회남자(淮南子)
이 성어는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의 卷1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하(夏)나라 왕조의 시조인 우(禹)임금이 제후들과 함께 회식을 마치고 강을 건너려는 순간 갑자기 황룡(黃龍)이 배를 등에 지고 물 위에 올리니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하였다. 그러자 우임금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나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백성들을 위해 온 힘을 전부 바쳤다. 삶은 부쳐 사는 것이며,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으니 하늘의 뜻에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우임금이 자신을 두려워 하지도 않고 태연하며 흔들림이 없이 또한 위엄있게 대응하자 황룡(黃龍)은 기가 꺾여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생기사귀(生寄死歸)는 우 임금이 황룡에게 한 말에서 유래하며, 인간의 삶은 나그네처럼, 죽으면 어디론가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선(詩仙)인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이다.
而浮生이 若夢하니 爲歡이 幾何오.
그런데, 덧없는 인생이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림이 얼마인가?
古人秉燭夜遊는 良有以也로다.
옛 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놀이를 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況陽春이 召我以煙景하고 大塊가 假我以文章이라.
하물며 따듯한 봄날은 안개 낀 경치로써 나를 부르고, 대지는 나에게 문장을 빌려 주었음에랴.
會桃李之芳園하여 序天倫之樂事하니 群季俊秀하여 皆爲惠連이어늘 吾人詠歌는 獨慙康樂이로다.
복숭아 꽃 오얏꽃 핀 향기로운 뜰에 모여 형제의 즐거운 일을 (글로) 펴니, 여러 아우는 빼어나서 모두 혜련이 되었는데, 나의 영가는 홀로 강락에게 부끄럽구나.
幽賞이 未已에 高談이 轉淸이고, 開瓊筵以坐花하고 飛羽觴而醉月하니 不有佳作이면 何伸雅懷리오.
그윽한 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 고상한 이야기는 더욱 맑아지고, 옥같은 잔치를 벌여 꽃에 앉고 술잔을 날리며 달에 취하니, 좋은 시가 아니면 어찌 고상한 회포를 펴리요.
如詩不成이면 罰依金谷酒數하리라.
만약 시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벌은 금곡의 술잔 수에 따르리라.
하늘과 땅이란 모든 것이 와서 묵어가는 여관과 같은 것이고, 세월이란 끝없이 뒤를 이어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역(逆)은 맞이한다는 뜻이며, 하늘과 땅은 공간을 말한다. 따라서 공간속에서 만물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이는 나그네가 잠깐 와서 묵어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무엇인가? 불가(佛家)에서는 영원한 인연의 연결고리 가운데 잠시 사람이라는 인연의 고리로 존재하다가 이내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가에서 보면 삶은 영원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갖지도 않는다. 잠시 이 세상에 기탁하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基督敎)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은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영원한 세상은 삶이 끝난 이후에 존재한다.
이에 대한 선인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생기사귀(生寄死歸)라. 생(生)은 ‘태어나다, 살다, 나타나다’라는 뜻이다. 생물은 살아있는 물체라는 말이고, 생명은 태어나서 살아가라는 명령이라는 말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은 물건을 보면 마음이 나타난다, 즉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기(寄)는 ‘맡기다, 맡겨지다, 의지하다, 위탁하다’라는 뜻이다. 기증(寄贈)은 ‘보내서 맡긴다’는 말이다. 증(贈)은 ‘보내다’라는 뜻이다. 일단 재물을 기증하면 기증 받은 곳에서 책임지고 사용하게 된다. 사(死)는 ’죽다, 죽음‘이라는 뜻이다. 사멸(死滅)은 ’죽어서 없어지다‘라는 말이다. 귀(歸)는 ‘돌아가다’라는 뜻이다. 이 경우에 돌아가는 곳은 언제나 사람이 좋아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도적의 소굴로 돌아가는 것은 귀(歸)라고 하지 않는다. 귀가(歸家)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귀산(歸山)은 산(山)으로 돌아가다, 즉 죽다라는 뜻이다.
이상의 의미를 정리하면 생기사귀(生寄死歸)는 산다는 것은 맡겨진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다는 말이 된다. 이를 풀어 보면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잠시 맡겨진 것이며, 죽음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는 말이 된다.
논어(論語)에는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이라고 하루 생활을 되돌아보며 마무리 한다. 카로사(Carossa)는 인생은 만남이라고 했고, 너와 나의 저서를 남긴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참다운 삶은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만남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미국의 CIT대학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원인을 조사해 본 결과 그 원인의 85%가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함에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나면 죽고 만나면 헤어진다’고 했다. 우리는 백년도 못 사는 짧은 생애요, 회남자(淮南子)에 생기사귀(生寄死歸)라고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본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산다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뜬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한조각의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고,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가 구름에 흘러가듯 떠도다 가는 길에라는 최희준의 하숙생이란 노래에도 인생은 뜬구름과 같은 존재요, 나그네라고 하지 않았던가?
채근담(菜根譚)에 세월의 흐름을 ‘부싯돌 불빛(石火光中)같다’고 했고 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인생여백구과극(白駒過隙) ‘인생은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네 인생, 그 속에서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서로 미워하고 때로는 헤어짐을 슬퍼하며 덧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짧은 생애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생활하고 있다.
선인선과(善因善果)라고 만남 속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고 생활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지만,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잘못 만난 인연은 불협화음 속에 인생을 살다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연(隨緣)이라고 인연따라 살기를 권했고, 유교(儒敎)에서는 소위(素位), ‘분수를 지키며 살자’고 했고, ‘수연과 소위는 인생의 험난한 바다를 건너가는데 구명대가 되리라’고 채근담에 이르고 있다.
논어(論語)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고 하여 과욕을 경계하고 있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청심과욕(淸心寡慾), 맑은 마음으로 욕심을 줄이고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수분지족(守分知足)하노라면 고해(苦海)를 무사히 항해하리라.
생기사귀(生寄死歸)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 중 하나가 말과 언어의 사용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이 남긴 말 중에서 현재까지 귀중하게 사용되는 말을 성어(成語)라 하며, 그중에서 옛날 실제로 있었던 일에서 유래된 것을 고사성어(故事成語)라고 한다. 고사성어에는 선인들의 지혜와 기지가 가득하여 그 의미와 유래를 알고 사용하면 일상의 언어생활을 풍부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참으로 유익하다.
고사성어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거의가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것만도 무려 270여 가지나 되며 주로 중국의 역사, 고전, 시가(詩歌) 등에서 나온 말들로 70여 문헌과 200명 정도의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서양의 고사성어 또한 신화나 종교에서 나온 말이 많으며 이 중에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와 같이 금언이나 격언으로 높임을 받는 것들도 있다.
그 많은 성어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생기사귀(生寄死歸)를 들고 싶다. 이 네 글자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으며 지금까지도 뇌리 속 깊이 잠재되어 있다. 생기사귀(生寄死歸)의 사전적 의미는 ‘이생의 삶은 잠시요 죽음이란 본래(本來)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내 나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생의 삶은 영원한 생명의 바다에서 이탈해 나온 순간이며, 생과 사는 달걀에서 닭이 부화하는 것과 같아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죽는다는 것은 내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니 결코 두려워할 바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매일 같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를 스포츠 중계하듯 발표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참으로 나약하고 허망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만약 내가 어느 날 이생을 마감하고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고심해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평생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독실한 종교적 믿음도 없으니 “하나님, 저를 거두어주소서”라든가 “부처님께 귀의하나이다”하고 의지할 곳도 없는 형편이다.
물론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 다 같지는 않다. 불의의 사고로 한순간에 절명하는 경우도 있고, 시름시름 장기간 앓다가 운명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불안할 시간도 없겠으나 후자의 경우는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생(來生)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천당을 갈 수 있을 정도로 선업(善業)을 쌓지 못한 것 같으니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그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는 대안을 하나 찾았다. 다름 아니라 그동안 내 뇌리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생기사귀(生寄死歸) 네 자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하고 불안한 상황에 직면해 생기사귀(生寄死歸)를 반복 뇌면서 ‘내 본래로 돌아간다’는 의미에 몰입한다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평안하게 요단강을 건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번쩍 머리에 떠올랐다.
비록 종교적 믿음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와 같은 무아의 경지로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찾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서경 홍범편에 인생의 오복(五福)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과 더불어 고종명(考終命)을 들고 있다. 여기서 고종명은 명대로 살다가 객지가 아닌 집에서 편안하게 죽는다는 뜻이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삶의 마무리를 이토록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만 몰두했지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살았다. 그 언젠가를 위해서 생기사귀(生寄死歸) 네 자를 가슴속에 더 소중히 간직하리라.
생기사귀(生寄死歸)
야당 대표의 경기도지사 재직 시절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바 있는 한 분이 자살했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은 벌써 5번째 죽음이라며 수군거리고, 야당은 유족의 조문 거부 여부를 두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 수사 당국은 잇따른 증인의 사망을 두고 기소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 국회의원의 특권 뒤에 숨어 있는 한 사람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그로 인한 연쇄 사망을 지켜봐야 할런지 국민들도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래 죽음은 삶만큼 무겁고 회피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근래 들어 이를 두고 벌어진 논란이 많아지면서 더더욱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요. 그리고 이를 정치적 이슈로 삼아 자기들 이득의 자양분으로 만드는 이들에 대한 분노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자꾸 삶을 죽음보다 가볍게 만드는 이런 풍조가 그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주듯, 잘 쓰인 일생은 편안한 죽음을 준다”는 다빈치의 명언도 있는데 말입니다.
삼국시대에도 죽음이 횡행한 속에서 삶을 선택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가후(賈詡)은 동탁, 장수, 그리고 조조를 오고 가는 인생 역정을 보인 인물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삶의 궤적으로 보면 후대인 오대십국시대의 풍도(馮道)에 비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런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 그러하듯 가후도 품평하는 이의 기준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다음의 일화는 아마도 제 기준에서 그런 가후의 면모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이때 문제(조비)가 오관장(五官將, 오관중랑장)이 되었고, 임치후 조식(臨菑侯 曹植)은 한창 재주와 이름이 드높았다. 그래서 그들 각각 추종하는 무리(黨與)끼리 후계자의 자리를 취하려는 의론이 있었다. (중략) 태조(조조)가 또 한 번 주위를 물리고 가후에게 후계자에 관해 물었는데, 그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태조는 말했다. "경과 함께 얘기를 나누려 하거늘 대답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오?" 가후는 이르기를 "적통(嫡統)을 세워야 하는 일을 두고 생각난 게 있어서 곧장 대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라 했다. 태조가 무엇이냐고 묻자 가후는 대답하였다. "본초(원소)와 경승(유표) 부자를 생각했습니다"라 했다. 태조가 크게 웃으며 마침내 세자를 정했다.
가후는 스스로 태조의 옛 신하가 아니라 여겨 책모가 깊고 훌륭했음에도 시기와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해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며 물러가 사사로이 통교하지 않았다. 또한 자식들이 시집 장가드는데 고관대작의 집안과 사돈을 맺지 않으니 천하에서 지모와 계획을 의론하는 것이 그에게 돌아갔다.
후사는 대단히 예민한 문제이고, 혼인은 장차를 위한 투자입니다. 이 두 가지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릴 정도로 왕조 국가에서 특히 중요한 이슈였죠. 가후는 스스로 사람과 권력을 쫓아 인생을 살아온 게 아니라 오로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고민한 전형적인 난세형의 인물로, 타인이 볼 때 줏대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며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가후가 풍도처럼 혹평을 받기도 했던 점은 어찌 보면 괴이한 일이 아닙니다. 하기야 당대에 왕좌지재(王佐之才)로 평가받은 순욱(荀彧)조차 그렇거늘 하물며 가후라고 크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생기사귀라는 사자성어는 회남자(淮南子) 정신훈(精神訓)에 실린 우왕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왕이 남순(南巡)을 위해 강을 건널 때 황룡이 나타나 배를 등에 지려 하였다. 이에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아연실색하였는데, 우왕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짐은 천명을 받아 힘을 다해 백성을 위해 수고하고 있소. 그러나 삶은 그저 잠시 머무는 것일 뿐이요, 곧 죽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소. 어찌 내 마음이 동요할 수 있겠소?”
우왕이 용을 마치 도마뱀 보듯 하며 용안이 바뀌지 않으니, 용도 귀를 내리고 꼬리를 말아 달아나고 말았다. 우왕의 사물을 봄은 이처럼 은미한 데 이를 정도였다.
가후와 우왕은, 비록 삶의 이유가 달랐을지언정, 자기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인생을 헤쳐 온 공통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위치에 있건 사람들의 중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몸을 최대한 낮추어 난세를 살아옴으로써 천명을 보존할 수 있었으며, 우왕도 구주(九州)에 운하를 판 공적과 천하를 선양받은 명망이 있음에도 겸양을 보일 줄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삶은 그저 잠시 머무는 것일 뿐이요, 곧 죽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정신이 엿보이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현실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장차를 내다보고 살아온 인물들이었던 셈이지요. 다만 삶 속에도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의 눈에서 보면 그저 기회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점에 비춰 보면 야당 대표 주변을 둘러싼 죽음들은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모두 야당 대표 한 명을 위한 죽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에 죽었던 그 분은 억울함을 토로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죽음들을 보면서 저는 오래 전 있었던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다시 한 번 떠올렸습니다.
그는 공직자로서 가장 추악한 죄악을 저질렀다는 오명 속에 자살하고 말았던 인물이지요. 그에 대해 어떤 해명이나 사죄, 반성의 뜻도 보이지 않은 채 말입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자괴감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다빈치가 내렸던 정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잘 죽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가장 단적으로 비견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신학적 평가는 뒤로 하고, 당대 그를 평가했던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1장 20절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저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때나마 믿었던 그 믿음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배교자에게 예정된 징벌이 이뤄진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당신들은 다가올 저주와 심판을 진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날것과 찬 것을 생랭지물(生冷之物),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생구불망(生口不網),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생기사귀(生寄死歸),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생사고락(生死苦樂),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생살여탈(生殺與奪),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 부터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등에 쓰인다.
▶️ 寄(부칠 기)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奇(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奇(기)는 정상이 아닌 사람→다르다→기울어지다→가까이 다가서다, 갓머리(宀; 집, 집 안)部는 건물(建物), 사람이 몸을 의지(依支)할 곳→의지하다(依支--)→주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寄자는 '부치다'나 '얹혀살다', '의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寄자는 宀(집 면)자와 奇(기이할 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奇자는 곡괭이 위에 사람이 올라가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기이하다'나 '괴상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寄자는 본래 '임시로 얹혀살다'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니 곡괭이에 올라가 있는 모습의 奇자는 '얹혀있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가 내 집에 얹혀사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추론이긴 하지만 寄자에 '부치다'나 '보내다'라는 뜻이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을 어디론가 보내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寄(기)는 ①부치다, 보내다 ②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③맡기다, 위임(委任)하다 ④기대다, 의지(依支)하다 ⑤붙여 살다, 임시로 얹혀 살다 ⑥빌리다 ⑦위임(委任), 부탁(付託) ⑧임무(任務)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줄 부(付), 부칠 우(寓)이다. 용례로는 사회나 단체에 또는 거기서 이뤄지는 어떤 일에 도움이 되는 구실을 하는 것을 기여(寄與), 금품이나 물품 등을 타인에게 줌을 기증(寄贈), 공공단체 또는 절이나 교회 등에 무상으로 금전이나 물품을 내놓음을 기부(寄附),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싣기 위하여 원고를 보냄 또는 그 보낸 원고를 기고(寄稿), 다른 동물 또는 식물에 붙어서 양분을 얻어 사는 것을 기생(寄生), 기생 생물에게 장소와 양분을 주는 생물을 기주(寄主), 부탁하여 맡기어 둠을 기탁(寄託), 남의 집에 몸을 붙여 숙식함을 기숙(寄宿), 비행하던 항공기가 공항에 들름을 기항(寄航), 덧붙어서 삶을 기거(寄居), 한때 다른 곳에 몸을 붙이고 지냄을 기우(寄寓), 남의 아내를 간통함을 기가(寄猳),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의탁해 있는 임금을 기공(寄公), 편지를 부침을 기서(寄書), 편지를 인편에 부쳐 보내어 보임을 기시(寄示), 어떤 글을 인편에 부쳐서 보내 드림을 기정(寄呈), 남의 집에 얹히어 하는 일없이 얻어먹으며 지내는 사람을 기객(寄客), 남의 집에 붙어서 한 식구처럼 사는 사람을 기구(寄口), 타향이나 다른 집에 몸을 붙여 삶을 기류(寄留), 남에게 물건을 부치어 줌을 투기(投寄), 나라를 나누어 맡긴다는 뜻으로 제후에 봉함을 이르는 말을 분기(分寄), 이바지하여 돕고 부족함을 보태어 준다는 말을 기여보비(寄與補裨), 바둑에 져서 말을 맡긴다는 뜻으로 바둑의 고수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져준다는 이야기에서 아득한 고수의 작전이나 작전상 후퇴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기패기마(碁敗寄馬),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등에 쓰인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사회부연(死灰復燃), 이미 때가 지난 후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歸(돌아갈 귀)는 ❶형성문자로 帰(귀)의 본자(本字), 归(귀)는 통자(通字), 归(귀)는 간자(簡字)이다. 追(추; 따라가다)의 변형과 婦(부)의 생략형인 帚(추)로 이루어졌다. 고대(古代)에는 처가(妻家)에서 일정 기간의 노동을 한 후 새색시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돌아온 데서, '돌아오다'의 뜻이 되고, 전(轉)하여 '시집가다'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歸자는 '돌아가다'나 '돌아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歸자는 阜(언덕 부)자와 止(발 지)자, 帚(비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阜자와 帚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阜자는 '쌓이다'라는 뜻의 堆(언덕 퇴)자가 생략된 것이다. 이렇게 '쌓이다'라는 뜻을 가진 堆자에 帚자가 더해진 것은 집안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歸자의 본래 의미는 '시집을 가다'였다. 아마도 시집간 여자가 집안일을 한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止자가 더해지면서 '돌아가다'나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歸(귀)는 ①돌아가다, 돌아오다 ②돌려 보내다 ③따르다, 붙좇다(존경하거나 섬겨 따르다) ④몸을 의탁하다 ⑤맡기다, 위임하다 ⑥마치다, 끝내다 ⑦시집가다 ⑧편들다 ⑨맞다, 적합하다 ⑩모이다, 합치다 ⑪선물하다, 음식을 보내다 ⑫자수하다 ⑬죽다 ⑭부끄러워하다 ⑮몸을 의탁할 곳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돌아올 회(回)이다. 용례로는 외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국(歸國), 본디의 처소로 돌아옴을 귀환(歸還), 집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가(歸家), 사람의 마음이나 사물의 돌아가는 형편을 귀추(歸趨),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을 귀향(歸鄕), 끝을 맺음을 귀결(歸結), 재산이나 권리 따위가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에 속하게 됨을 귀속(歸屬), 돌아가 몸을 기댐을 귀의(歸依), 적이 굴복하고 순종함을 귀순(歸順), 돌아와 닿음을 귀착(歸着), 돌아오거나 돌아가는 길을 귀로(歸路), 객지에서 부모를 뵈러 고향에 돌아감을 귀성(歸省), 한 군데로 돌아감을 귀일(歸一), 집으로 돌아가 쉼을 귀휴(歸休), 서울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귀경(歸京),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함을 귀양(歸養),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옴을 귀래(歸來),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귀사(歸思), 숙박 집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을 귀숙(歸宿), 황천으로 돌아감이란 뜻으로 죽음을 일컫는 말로 귀천(歸泉), 흙으로 돌아감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귀토(歸土), 여자가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옴을 대귀(大歸), 마음을 결정하고 돌아감을 결귀(決歸), 향하여 감이나 따라감을 적귀(適歸), 함께 돌아감을 동귀(同歸), 작별하고 돌아감을 고귀(告歸),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감을 우귀(于歸), 본디 상태나 자리로 다시 돌아감을 복귀(復歸), 도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회귀(回歸), 벼슬을 내어 놓고 돌아옴을 체귀(遞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뒤 전쟁에 쓴 마소를 놓아주었다는 옛일에서 온 말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귀마방우(歸馬放牛), 헛되이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귀어허지(歸於虛地), 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사필귀정(事必歸正),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시사여귀(視死如歸), 구슬을 온전히 조나라로 돌려 보낸다는 뜻으로 흠이 없는 구슬이나 결점이 없이 완전함 또는 빌렸던 물건을 온전히 반환함을 일컫는 말을 완벽귀조(完璧歸趙), 옳지 않은 일에 부화뇌동 함을 이르는 말을 난만동귀(爛漫同歸),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모든 일은 처음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을 낙엽귀근(落葉歸根), 넷이 결과적으로 하나를 이룸을 일컫는 말을 사귀일성(四歸一成),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나이를 먹어서 머리털이 희어져도 학문이 성취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백수공귀(白首空歸), 합심하여 같은 목적으로 향함을 일컫는 말을 일심동귀(一心同歸),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옴을 일컫는 말을 조왕모귀(朝往暮歸), 가는 길은 각각 다르나 닿는 곳은 같다는 뜻으로 방법은 다르지만 귀착하는 결과는 같음을 일컫는 말을 이로동귀(異路同歸)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