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의 인식과 선택 20241213
영화 “매트릭스”를 보는 것은 120킬로미터로 움직이는 자동차에 타는 것이다. 땅이 울부짖고, 몸을 기댄 의자는 차와 함께 진동한다. 눈을 감으면 내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속도가 온전히 느껴진다. 이처럼 “매트릭스”는 즐겁고 인상적인 방법으로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준다.
“매트릭스”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로 1999년에 제작되었다. 영화 속 배경도 1999년이다. 주인공은 낮에는 앤더슨이라는 이름으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네오라는 프로그래머이자 해커로 활동한다. 그는 디지털 기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산다. 어느 날, 누군가 주인공에게 컴퓨터 메시지와 전화 등으로 연락한다. 토끼를 쫓아가는 엘리스처럼 주인공은 이 연락들을 따라가고 비가 내리는 날, 어두운 건물로 인도된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주인공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 주인공은 진실과 안정 사이에서 진실을 선택하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가 끝나면 빨리 달리던 차에서 내린 것 같은 기분이다. 메시지와 전달 방식이 합쳐져 강렬한 인상이 남는다. 이 인상을 분석하고, 메시지만 분리해보자.
영화 “매트릭스”는 두 가지 주제로 나뉜다. 첫째, 인식이다. 모든 것이 매트릭스 즉 프로그램이며, 내 감각은 컴퓨터가 뇌에 주는 전기 자극이다. 나는 내가 프로그램 안에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그 진짜 모습으로 즉 프로그램으로써 인식한다. 매트릭스를 인식하는 것은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가 책을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다. 생각이 자유로운 것처럼 나는 세상을 구부리고 자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실재고, 내가 믿는 것이 현실이다.
놀랍게도 이 인식은 매트릭스 밖에서도 작용한다. 주인공은 이 매트릭스 속에서 죽었음에도 밖에 있는 동료가 자신을 프로그램을 뛰어넘는 자로 인식하자, 다시 살아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헷갈리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초점을 맞추면, 이 영화는 내가 사는 세상 또한 내가 인식하는 대로 구부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선택이다. 인식은 강요될 수 없다. 매트릭스를 강제로 인식한 사람은 정신을 잃는다. 반면 인식을 선택할 기회는 명확히 주어진다. 영화 속에서 이 선택은 “믿음” 즉 믿기로 선택할 기회로 나타난다. 어떻게 믿음이 인식과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선택과 연관해서 본다면, 매트릭스의 부조리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음식과 직장은 선택할 수 있지만 프로그램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그곳에서 벗어날 선택은 없다. 이 관점에서 구원자라고 일컬음 받는 주인공의 사명은 주인공을 연락한 남자가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듯, 모든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나는 매트릭스에 사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세상이 프로그램이고, 나의 감각은 프로그램이 내 뇌에 주는 자극이라고 해도 말이다. 매트릭스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대상은 진짜 사람이고, 내가 느끼는 감각도 진짜 감각이다.
하지만 내가 매트릭스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현실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면, 또는 현실을 강요받는다면, 그건 부당하다.
나는 “매트릭스”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이 영화는 자신감이 있다.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그 말을 강렬하고 뚜렷하게 전달했다. 감독의 자신감은 등장인물에도 투영된다. 등장인물들의 걸음과 행동, 옷에서는 자신감과 목적성이 넘쳐난다. 그리고 자신 있게 내뱉는 한마디마다 책 한 권의 철학이 들어가 있다.
연출과 스타일로 보자면, 지금 나오는 어떤 액션, 사이버펑크 영화도 매트릭스의 신발 끈을 묶을 자격이 없다. 매트릭스를 보는 것은 탄산음료, 오렌지 주스만 마시다 맑고 차가운 물 한 컵 마시는 것이다. 마시는 순간, 물이 모든 음료의 기본임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매트릭스를 보다 마블 영화를 보면 그냥 헛웃음이 나온다.
매트릭스를 볼 거라면, 나도 데려가 주면 좋겠다. 다시 보고 싶다. 만약 보지 않을 거라면 내가 데려가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