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岳飛)에 대한 800년간 역사평가의 변천
악비는 지금으로부터 900여년전에 살았던 중국역사상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사적은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악비가 중국 일반백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악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역사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진회(秦檜)이다. 진회는 오명을 역사에 남긴 인물이다. 사실상, 현재 진회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모든 주장들은 중국역사상 일찌감치 존재했었다. 지금 다시 얘기한다고 하여 새로울 것도 없다. 그리고 진회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에는 자주 악비를 폄하하고 비판하는 것이 뒤따랐다. 그래서, 나는 악비 사후 900년의 역사에서, 악비에 대한 역사적평가의 각도에서 악비를 후세인들이 어떻게 혼란스럽게 하였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동시에 진회가 어떻게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명예회복을 하려고 계속 시도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악비를 비판하는데 있어서, 악비는 죽을만하다고 하는 중요한 관점의 하나는 바로 악비가 황제의 명령도 듣지 않고, 자기만 잘난줄 아는 군벌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런 주장을 편 사람은 바로 진회와 그의 당파인물들이다. 진회는 악비를 죽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하여, 핑계를 찾았고, 그의 양자등과 함께 대량의 역사를 변조했고, 악비가 군벌이라는 '정론'을 만들었따. 다만, 진회는 악비를 군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겨우 악비사건이 형성된 후 일정한 기간동안 진회등이 여론통제를 통하여 유행시킨 그 기간뿐이다. 송효종이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이후, 이 견해는 기본적으로 버려진다. 그후 800여년이 지나서, 민국시기가 된다. 1923년, 역사학자 여사면(呂思勉)은 다시 이 견해를 내놓는다.
악비가 군벌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진회가 억울하다고 얘기한다. 여사면이 당시에 이런 견해를 내놓은 배경은 청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사회는 군벌혼전의 국면이 펼쳐졌다. 여사면은 군벌을 비판하고자 했다. 그 생각은 이해된다. 다만, 여사면 선생은 악비의 역사를 아무렇게나 차용했고,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여 진회가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보기에, '차고유금(借古喩今)'에서 대상을 잘못 찾은 것이다. 비록 여사면 선생이 역사연구에서 뛰어난 점이 여럿 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여사면 선생이 분명히 잘못을 범했다. 그후, 악비가 군벌이라는 견해는 비록 어떤 사람이 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또한, 이 견해는 대다수 약사학자들에 의하여 비판받아 제대로 형태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백성들도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악비가 군대를 엄정하게 다스리고 자신에 엄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악비는 남송에서 명예회복된 후, 개략 800년의 시간동안, 그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악비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비록 일부 다른 의견도 있었지만, 이들 의견이 악비의 이미지를 뒤바꾸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면으로 악비를 비판하지도 않았다. 남송은 송효종이후에 당연히 그러했고, 원나라는 악비에 대한 평가가 약간 애매했다. 남송은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당한 왕조이다보니, 원나라는 악비를 대거 칭송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원나라의 공식사서에서는 악비를 문무를 겸비한 드물게 보는 인재라고 기록했다. 다만 원,송의 관계때문에, 원나라는 사회에 광범위하게 악비를 선전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한 가지 사실은 원나라의 악비에 대한 태도를 설명해준다. 남송이 악비를 명예회복시켜준 후, 악분(岳墳)과 악묘(岳廟)를 악비의 후손들이 만들었다. 송원전쟁때, 악분과 악묘가 훼손되었다. 원나라초기, 악씨후인들이 악분과 악묘를 재건했다. 원나라정부는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나중에 악분, 악묘는 다시 황폐해지는데, 원나라의 지방정부가 나서서, 악분과 악묘를 다시 수리해준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나라는 비록 악비를 널리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악비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명나라에 이르러, 악비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되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 문제에 있어서 현재 중국인들의 고명한 점을 갖추고 있었다. 악비의 사적은 분명히 외족에 항거한 것이다. 다만, 주원장은 중국을 통일한 후에 몽골족등 소수민족도 "모두 나의 자식들이다(皆吾赤子)"라고 말한다. 민족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민족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명나라시기에 악비는 크게 존중받았지만, 그래도 그의 지위는 관우보다 아래였따. 관우가 "군신(軍神)"의 자리에 오르지, 악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나라때도 진회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문징명(文徵明)은 악비를 죽인 것은 진회 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이고, 송고종이 주모자이며 죄책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극력 주장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견해는 진회의 죄책을 경감해주는데 객관적으로 약간의 영향은 끼쳤지만, 이 견해는 기본적으로 악비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청나라때의 악비의 지위는 두 사람의 평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하나는 강희제이고, 다른 하나는 건륭제이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했는데, 만주족은 혈연적으로 여진족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악비가 금나라에 항거한 것은 한족이 청나라에 항거한 것과 같다. 이는 거의 반청복명(反淸復明)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청나라황제도 악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전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송고종이 강남에서 편안(偏安)하게 지낸 것을 비난하고, 동시에 남송이 항금을 주장한 사상과 세력도 비판했다. 다만, 강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모순을 드러냈다.
그는 남송이 금나라와 '화의'하려는 세력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는 사실상 강남에서 편안(偏安)하게 지낸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통일을 바라는 희망과는 서로 저촉된다. 그러나, 강희는 악비와 진회에 대하여는 완곡한 의견만을 보였다. 강희제는 악비의 항금은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잔존세력은 진회를 본받아서 저항을 포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만, 강희의 모순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만일 명나라 잔존세력이 저항을 포기하면, 강희는 정말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진회와 송고종과 마찬가지로 화의를 맺고 편안(偏安)하게 해줄 의향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강희는 자신의 정치목적을 위하여, 확실히 악비를 폄하했고, 진회의 경향을 긍정했다. 다만,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따. 강희제도 "차고유금"의 문제에 있어서 나중의 여사면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잘못 찾은 우를 범했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를 많이 바꿔버린다. 건륭은 악비를 충분히 긍정한다. 여러번 시를 써서 악비를 칭찬했다. 그리고 악비의 고향과 악분, 악묘를 둘러본다. 건륭은 악비를 자신과 뜻이 같은 자로 보았다. 건륭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가승기사회복, 수지허력폐경영(正可乘機事恢復, 誰知虛力廢經營)", "만리장성공자괴, 지금총수한난평(萬里長城空自壞, 至今塚樹恨難平)". 여기서 '회복'은 남송이 중원을 수복한다는 의미이다. 뒤의 두 구절은 악비를 죽인 것은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것과 같고, 지금까지도 백성들의 한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악분, 악묘는 청나라 건륭이후, 여러번 중수를 거쳤다. 건륭은 강희의 악비, 진회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고, 어느 정도 명나라황제와 비슷한 점이 있다. 모두 민족갈등을 완화하는데 촛점이 있고, 민족융합을 실현하고자 했다. 다만, 건륭은 역사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했다. 그는 악비를 절대충군(絶對忠君)의 이미지로 묘사했고, '군신지의(君臣之義)'를 강조했따. 건륭이 악비의 이미지를 이렇게 가공한 것은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악비를 "우충(愚忠)'으로 비난하는 근원이 된다. 그리하여, 반청복명의 비밀결사가 주로 관우를 모신 것은 '우충'한 악비를 모시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혁명당인들이 민간비밀결사의 방식을 바꾸면서, '구축달로(驅逐韃虜)"의 구호하에 악비는 만청에 반항하는 기치가 된다.
사실상, 악비는 생전에 항금을 위하여 여러번 성지를 어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적어도 악비를 '우충'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황제제도하에서, 악비는 확실히 '우충'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황제제도를 버리면, 악비는 국가에 대하여, 문명에 대하여 충성했다. 이는 질책받을 일이 아니다. 즉, 악비의 충성에는 역사조건하에서 제왕에 대한 충성이 있지만, 천고불변하는 것이 있다. 인간 정의에 대한 충성이다. 악비를 '우충'으로 묘사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상술한 간단한 역사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남송에서 청나라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800년의 시간동안, 악비의 이미지는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인 편이었다. 일부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악비를 철저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와 반대로 진회에 대한 태도는 남송이후, 역대 관방사서에는 모조리 '간신'으로 분류했다. "인종송후소명회, 아도분전괴성진(人從宋後少名檜, 我到墳前愧姓秦, 사람들은 송나라이후에 회라는 이름을 거의 짓지 않았고, 나는 악비묘앞에 서니 성이 진이라는 것이 부끄럽도다)". 이것은 거의 중국인민에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한 구체적인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800년의 중국역사상, 진회는 대부분 그저 "간신(奸臣)"으로 분류했지, "민족패류(民族敗類)"와 같이 "민족"을 걸고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악비는 비록 긍정적이었지만,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칭하는 경우도 드물었었다. 이는 중국전통문화의 우수한 특징이다. 그저 정의와 간녕(奸佞)으로 구분하고,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하지, 가급적이면 민족을 가지고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가 멸망한 후 지금까지 근 100년간, 서방사조가 유입되면서, 중국인의 사고와 평가기준에 혼란이 오게 된다.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에서도 아주 혼란한 시기를 맞이한다. 최근 이 100년간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의 혼란은 이전 800년보다 훨씬 심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갖은 방법으로 진회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