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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은 선사시대부터 생활의 필요에 의해 맺기 시작한 이래 점차 발전하여 의복의 단추, 여인들의 노리 개, 부채의 선추, 도포끈, 관복의 후수 등 복식류를 위시하여, 가마, 상여, 영정, 족자 등의 장식으로 쓰였다. 매듭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재료는 다회(多繒)라고도 부르는 끈목이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명주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종류에는 둘레가 둥근 동다회와 넓고 납작한 광다회가 있다. 우리조상은 이 끈목을 다양한 형태로 엮어 일상생활에 폭넓게 사용했는데, 개화기 이후 생활문화양식이 서구화되면서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매듭장 또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매듭은 한 가문의 대를 잇는 장인정신에 의해 오늘날 소중한 전통공예의 한 분야로 꽃을 피우고 있다. 매듭장이 하나 둘 사라져가던 1963년. 당시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전통 매듭의 맥을 이어온 몇 명의 장인이 있었다. 심칠암, 강기만, 그리고 정연수가 그들인데, 이 중 유일하게 생업으로 그 맥을 이어간 이는 정연수였다.
정연수는 1904년 서울 중구 광희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4대째 터 잡고 살아온 광희동은 ‘수구문안’이라 불렸는데, 이 일대는 조선시대 말기부터 매듭을 생업으로 하는 집들이 한 동네를 이루던 곳이었다. 정연수는 이곳에 살면서 18세가 되던 1922년부터 이웃집에 사는 최동근에게 자연스럽게 매듭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에는 최동근 외에도 강모주, 왕인식 등 여러 명의 매듭장인들이 있었다.
이후 그는 매듭을 배운 지 4년째인 25세에 독립하여 매듭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고, 34세에 결혼을 하 면서 아내 최은순과 함께 매듭을 계속했다. 당시 정연수는 광희동의 옆 동네인 신당동에 살았는데, 신당동에서 매듭 일을 하는 집은 정연수가 유일했다고 한다.
한편 그 무렵 매듭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국가에서는 1968년 12월 국가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을 지정하였고, 정연수를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정연수는 1974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로부터 2년 뒤 아내 최은순이 제2대 보유자로 인정되 어 정연수의 뒤를 이었다. 최은순은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 인천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21세 때 정연수를 만나 결혼하였다. 남편으로부터 생업을 위해 매듭을 배우게 된 최은순은 1960년대 말까지는 주로 유소와 술을 많이 제작하였고, 1974년 남편이 타계한 이후부터는 노리개 종류의 매듭을 주로 하였다. 2009년 별세하기까지 전승공예대전, 한중일 삼국 국제매듭전, 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등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여 전시·출품하였다.
최은순의 전통 매듭 기술은 딸인 정봉섭이 전수받아 2006년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외손녀인 박선경이 대를 이어 계속 전수하고 있다. 평생 부모님이 매듭 작업하는 일을 옆에서 보면서 자란 정봉섭은 부모의 사진이나 손때 묻은 작업도구 및 부모의 숨결이 전해지는 매듭 작품 등을 기증하기도 했다.
글. 성혜경
첫댓글 가사시간에 매듭 배운적있는데
재미있는것 보다 귀찮았습니다
가사 시간에 원피스 만든다고
난리법석 떨었지만 망치고
앞치마 수놓고 스킬도하고 십자수도 놓고
그런데 취미가 없다보니
한개도 제대로 완성한게 없다보니
결국은 굴러다는걸 엄마가 보다못해 대신 다 해주었던 생각이 나네요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 봅니다
그냥..잘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시간 인거 같습니다.
그 시간
가사 수업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