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5(토)■
(사도행전 26장)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묵상/행 26:1-23)
◆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전도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1)
바울은 자신의 죄를 변명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죄를 변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지 않고, 자신이 구원받은 간증을 통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데 초점이 맞춘다. 사실 이것이 유대인들과 갈등하는 근본 문제이기도 하지만, 바울의 의도는 더 높은 데 있다. 유다의 왕에게 언제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왕이 언제 자신의 말을 시간을 내서 들어주겠는가? 세상의 왕과 고위관리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정확하게 전해질 이 기회를 바울이 왜 놓치겠는가?
바울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보다는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증거하는 것을 보고 베스도는 바울에게 '미쳤다'고 하고, 아그립바는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라고 추궁할 정도였다(행 26:24-28).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예수의 증인'이란 어떤 자이어야 하는가를 본다.
◆ 바울의 간증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5)
예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부활하여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신 사건만큼이나 극적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하고 증거하는 것만큼이나 바울이 주님을 만난 간증은 강력하고 생생하다.
바울의 간증은 사도행전에 무려 3번이나(행 9장, 22장, 26장) 반복해서 나온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은 지독할 정도로 집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모조리 잡아서 형벌했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다(10).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서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했고,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서 다메섹으로 향했다.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보다 더 대단한 열정이다. 경찰은 월급이라도 받지만, 바울은 오로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자원봉사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헛된 것을 신봉하는 종교인들이다. 그들은 죄를 짓고도 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살기가 등등하고(행 9:1)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다.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 일행에게 비추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빛도 보았고 소리도 들었지만(행 9:7) 무슨 소리인지는 알지 못했다(행 22:9). 바울은 눈까지 멀었다. 일개 인간이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설득이 아니다. 그냥 압도하는 힘이다. 도대체 누구신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한마디는 바울에게 말도 못 한 충격이었다. 자기가 악으로 규정한 것이 선이었고, 자기가 선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악이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수고했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다. 이 충격은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 구원 받는다는 의미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8)
17절에 주님께서는 바울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부터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다. 이 말은 언뜻 보면 어렵다. 바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위치였다. 바울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그런 자들 가운데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신다. 가해자 쪽에서 피해자 쪽으로 옮기는 것이 구원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역설인가? 그러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 말씀을 실감할 것이다.
구원이란 세상 무리와 구별되는 것이다. 세상이 가는 방향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대단해 보여도 결국 침몰하고 있는 배일 뿐이다. 살 길은 거기에서 탈출하여 영원히 침몰하지 않는 영생의 배로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서 거룩하게 된 무리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들과 더불어 영원한 기업을 얻는 것이다.
기업(基業)이란 말은 사전적으로는 기초가 되는 사업, 또는 대대로 전하여 오는 사업이나 재산 등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집을 짓고 농사지으며 그리고 목축을 할 수 있는 땅을 주셨다. 이 땅을 '기업'이라고 하셨다(출 6:8)
기업을 헬라어로는 클레로스라고 하는데, 자기에게 돌아오는 '몫'을 의미한다. 영어에서는 inheritance(상속, 유산)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여러 번 '유업'(갈 5:21, 약 2:5)으로도 번역되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약 2:5). 천국에 나의 기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확실함을 증거한다.
23절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간증과 모든 성경 지식과 성령의 지혜로 복음을 증거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허구이며 착각일 수 있겠는가? 오늘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참으로 불행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자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는 두 부류가 있다.
진짜 믿는 자들과 자기가 믿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들이다.
어느 쪽인가?
주 예수님, 주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잠시동안 살아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평생에 예수님을 더욱 더 깊이 알아가는 은혜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