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48
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연중 제1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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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읽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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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EiOAf1MT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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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라우렌시오 부제는 영성체의 힘으로 인해 그토록 혹독한 고통도 웃으며 참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계신 형제님께 병자성사를 드릴 때였습니다. 말기 암으로 인해 물 한 방울도 제대로 못 드시고, 다른 무엇보다도 호흡 곤란 증세로 무척이나 힘겨워하고 계시더군요.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랄 일을 목격했습니다. 위중하신데도 의식은 명료하셨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시면서도 제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힘 드신데 가만히 계시라 해도 힘겹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은총 속에 이 세상 소풍 잘 하고 갑니다.” 그러면서 형제님은 계속 제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여기 앉으세요. 많이 시장하실 텐데, 밑에 내려 가셔서 식사 좀 하세요. 운전해서 갈 길도 멀 텐데,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저 위에 도착하면 신부님 사목 잘 하시도록 열심히 기도할께요.”
다들 두려워 덜덜 떠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셨던 형제님 얼굴에 감돌던 미소가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형제님의 마지막 순간을 뵈면서 언젠가 다가올 내 마지막 순간도 저렇게 품위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는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정말 감동적이고 멋지게 장식한 성인,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합니다.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수석 부제로 임명된 그는 교황님을 도와 교회의 재산 관리와 가난한 사람들의 구호활동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식스토 2세 교황님께서 카타콤바에서 미사를 집전하시던 중에 체포되어 즉각 참수형에 처해지자, 즉시 라우렌시오 부제에게도 박해의 칼날이 다가옵니다.
박해자들은 끝끝내 협조하지 않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불판 위에 얹어 구워 죽이는 참혹한 형벌에 처했습니다. 적대자들은 라우렌시오를 마치 생선 굽듯이 불판 위에 올리고 불을 지피니 그의 살이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습니다.
세상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라우렌시오 부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만만한 얼굴이었고, 그 와중에도 사형집행인들에게 계속 유머를 던졌습니다
한쪽이 쌔까맣게 타고난 것을 확인한 라우렌시오는 사형 집행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한쪽은 다 익은 것 같으니 뜯어 잡수세요.”라고 농담을 던지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 장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라우렌시오는 영성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 힘으로 인해 그토록 혹독한 고통도 웃으며 참아 넘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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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_uvrD8Ys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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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소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법: 창조의 도구로 쓰이는 것>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당시 교황청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황제가 재산을 모두 가져오라고 했을 때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신은 뜨거운 석쇠에 순교하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밀알은 필연적으로 썩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을 소비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영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에서 창조자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르단강 계곡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곧고 훌륭히 자랐고 다른 하나는 볼품없었습니다. 두 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했고 그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 여겼습니다. 드디어 다 자란 두 나무는 잘려져 각자 필요한 곳으로 갔습니다. 곧고 잘 자란 나무는 정말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매일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볼품없었던 나무는 말 먹이통으로 쓰였습니다. 매일 더러운 음식을 받아내야만 하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밤에 한 아이가 구유 위에 놓였습니다. 아기가 놓였고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였습니다. 성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뻤습니다. 그 아기가 성인이 되었고 성전에서 이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영광을 받던 나무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원대로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몇 년이 흐른 후 로마 군사들이 쳐들어와 성전을 완전히 허물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는 불에 타서 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구유를 들고 로마로 가져갔습니다. 싼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이 지어졌고 그 볼품없는 구유는 성당 제단 밑에 모셔졌습니다. 2천 년이 흘렀지만, 그 볼품없었던 나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이 지은 성전엔 하느님 법이 없었습니다. 공경을 받는 것을 즐기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여전히 피조물로 남은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소멸합니다.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해서입니다. 모든 존재는 쓰레기가 되어가고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구도 소멸할 것이고 태양도 소멸할 것입니다.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이고 지금 50억 년을 살았으니 이제 50억 년 남은 것입니다. 모든 별이 그렇듯 지구도 소멸해 가고 있습니다. 지구 내부의 열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것이 다 빠져나가면 부스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인간 때문에 먼저 사라질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에너지’를 조금씩 잃어갑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건물은 허물어지고 기계는 낡고 사람은 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땅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따라서 피조물의 위치에 있다면 누구든 소멸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모셨던 나무는 자신을 소멸하여 누군가에게 포근함을 선사하였습니다. 이처럼 나를 죽여 타인에게 생명과 행복을 주는 일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모기처럼 살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창조자의 것입니다. 사랑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생각해봅시다. 자동차는 가만히 놓아두면 흙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름을 넣고 고치며 잘 사용하면 그 차는 아주 오래 사용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협력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삽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농부는 그 삽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둘까요, 아니면 잘 보존할까요? 당연히 하나의 피조물이지만 자신의 창조 활동에 협조하기 때문에 자신이 창조 활동을 하는 한 그 삽은 보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습니다. 피조물과 창조자입니다. 모기와 예수입니다. 생존하려는 자와 죽으려는 자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와 있는 자입니다. 사랑하면 그 본성상 창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존재하는 한 창조는 영원히 지속하고 그 창조가 지속하는 한 그 창조를 위해 쓰이는 도구들도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창조’는 나의 에너지를 내어주는 것이기에 곧 ‘나의 죽음’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창조의 협력자가 됩시다. 어차피 다 죽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투자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영원히 살 수도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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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그분의 일화 중에 석쇠 위에 누워서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제 한 쪽이 알맞게 익었으니 뒤집어 놓게!” 하셨다고 한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에서 이교 신앙이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고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없이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대 사회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첫 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이든 다른 사회에서나 내가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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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라벤나’에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십자가형 건물의 벽과 천장은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곳에 낯선 그림이 하나 있었습니다. 창문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네 복음서가 놓인 열린 서가가 있고, 반대편에는 성인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장작불이 피워져 있으며, 그 위에 큰 석쇠 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궁금증은 점점 커져 이를 계기로 성화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었고, 어떤 성인을 그릴 때 그와 관련된 대표적 일화나 그의 순교 장면을 묘사하여 그 성인을 나타내고 교육에 이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고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기에 손에 성경과 칼을 쥐고 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식스토 2세 교황을 도와 일하였던 부제들 가운데 수석 부제로, 교회 재산을 관리하고 구호품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여 참수한 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그는 3일 뒤에 주겠다고 한 뒤, 교회의 모든 보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3일 뒤 많은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황제에게 가서 “보시오,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를 석쇠에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순교의 순간, 그가 “이쪽은 다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마저 구워라.” 하였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그의 상징물은 석쇠입니다.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당의 보물은 무엇인가? 나의 가장 큰 보물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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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밀알 하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1) ‘밀알 하나의 죽음’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많은 열매’는 인류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신앙인들은 그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니라,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그 일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심은 일과 같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밀알 하나의 죽음’에 관한 말씀은, 순교자들의 죽음을 설명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헛되고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입니다. ‘많은 열매’는 일차적으로 순교자 자신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순교는 자기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리고 새로 신앙을 갖게 된 많은 신앙인들도 뜻합니다. <순교는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 증언은 더 많은 신앙인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됩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라는 말씀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씨가 되기를 거부하는 밀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서 허무하게 끝난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한 알 그대로 남고’ 라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구원받으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받기를 원하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권고’이고, ‘호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 명령으로 표현할 때가 있긴 한데, 사실 계명들도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의 권고’입니다. 따라서 ‘밀알 하나의 죽음’에 관한 말씀도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권고’이고, ‘많은 열매’를(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선택은 각자 하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각자에게 있습니다.>
3)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현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실제로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리석은 집착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현세적, 물질적, 육신적인 것들을 가지려고 욕심 부리고, 집착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들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이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영원한 생명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허무한 것과 영원한 것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4)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공관복음에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마태 16,24) “나를 섬기려면”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일의 시작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지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사는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그냥 뒤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일이고, 그 일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도 않으면서 그냥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경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구경하는 생활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사람도 성당 안에 들어와서 미사를 ‘구경’할 수 있는데, 그것은 미사 참례가 아닙니다. 미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으려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미사를 함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구경할 수는 있지만, 구경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5)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고, 그 영광이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체험했고, 그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했습니다.(루카 9,32-33) 그 일은 우리가 정말로 희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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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독수리는 아주 높은 절벽 위에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새끼를 키운다고 합니다. 새끼는 안락한 둥지에서 어미 독수리가 주는 먹이를 먹으면서 편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어느 때가 오면 어미 독수리는 둥지를 부서 버린다고 합니다. 갑자기 안락한 둥지를 잃어버린 새끼는 당황하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날개 짓을 하지만 익숙지 않아 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큰 날개로 새끼를 받아 줍니다. 이렇게 몇 번을 거듭하면 새끼는 이내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된다고 합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위해서 둥지를 계속 나두고,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새끼의 몸짓이 커지면 둥지는 무너질 것이고, 날지 못하는 새끼는 결국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새끼를 위해 둥지를 부서 버리는 어미 독수리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휘저으며 새끼들 위를 맴돌다가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들어 올려 깃털 위에 얹어 나르듯,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시고 그 곁에 낯선 신은 하나도 없었다."(신명32, 11)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본적이 있습니다. 혹독한 연습으로 인해 발가락 마디가 기형적으로 돌출되어 있는 등 발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시인 고은은 그녀의 발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찬양했습니다. 테니스 선수의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켓을 잡고 연습하는 동안 손에는 굳은살이 생겼을 것입니다. 테니스 선수가 받는 상패 뒤에는 몇 번이고 잡혔던 굳은살이 있었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면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공간과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방향만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발레리나의 아름답지 못한 발처럼, 테니스 선수의 굳은살이 생긴 손처럼 부부는 서로에게 관심과 배려를 가져야 합니다. 화목한 가정은, 행복한 결혼생활은 은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소금이 물에 녹아 소금물이 되듯이 서로의 가슴에 사랑으로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성당의 제단 중앙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허구라는 가르침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둥지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밀알은 어쩌면 우리가 머물고 싶어 하는 둥지일 수 있습니다. 그 둥지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먹이가 있습니다. 그 먹이에 취해서 우리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처럼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둥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자들을 다그쳤습니다. 둥지에서 떨어지는 새끼를 어미 독수리가 받아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재물이라는 둥지를 벗어났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보화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된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둥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둥지를 벗어나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시련의 바람이 불고, 고통의 암초가 다가올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며 힘차게 날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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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내가 바로 교회의 보물이다!>
오늘 우리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을 지냅니다. 석쇠에서 구워져 순교하신 성인은 그 야말로 번제물이 되어 자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그가 주님께 바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목숨도, 우리의 재산도, 우리의 능력도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일깨워준 라우렌시오 성인을 본받아 우리도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온 마음으로 온 정성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아울러 내 것에, 내 뜻에 집착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면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라우렌시오 순교자의 축일입니다. 보통 사도 외의 성인들은 기념일로 지냅니다. 사도들이나 복음 사가 외에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네 분밖에 없습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세례자 요한과 스테파노 부제, 마리아 막달레나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입니다. 왜 라우렌시오 성인은 한 단계 높은 축일로 지낼까요? 왜 라우렌시오 성인을 이렇게 공경할까요? 무수한 교황님이 계셨지만 축일로 지내는 교황님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부제님을 교회는 지금까지 축일로 지내며 기억하고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그만큼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공헌을 많이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슨 공헌을 하셨을까요? 성인이 되기도 힘든데 성인들 가운데에서도 더 공경 받는 성인 라우렌시오 부제는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요? 여기서 성인의 긴 생애를 다 말하기 보다는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 만을 말씀드리고 그것이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묵상한 것을 나누고 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라우렌시오 성인을 공경하는 이유는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가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면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는 로마 교회의 초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는 감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라우렌시오 성인을 체포하여 온갖 고문으로 괴롭힐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고는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 죽이는 형벌에 처할 것을 명했습니다. 성인은 이러한 형벌을 받는 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형리들에게 “자! 한쪽은 다 익었으니 좀 뒤집어 주시오.” 하였고, 잠시 후에는 법관을 향해 “이제 다 익었으니 잡수시오.” 하고 농담을 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손가락 하나만 불에 화상을 입어도 그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온 몸이 석쇠 위에서 삼겹살처럼 익어 가는데 '한쪽은 다 익었으니 좀 뒤집어 주시오' 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성령의 은총을 입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서의 아나이나와 아자리아와 미사엘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하느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저 고통 속에서 순교하셨으면 오히려 인간적인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통해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다면 오히려 성인은 지금 이렇게 육신이 타 들어 가지만 천국에서 주님을 뵈올 기쁨으로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으며,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망설임 없는 순교의 모범은 로마 교회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계 교회의 중심이 되게 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라우렌시오 성인을 더욱 공경하는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부제 라우렌시오의 당시 소임은 교회의 재산 관리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보물을 황제에게 모두 바치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3일의 말미를 달라고 청한 후,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총독 앞에 많은 빈민들과 고아와 과부를 데리고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보시오. 이분들이 다 교회의 보물입니다.”
성인의 이러한 모범은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교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축척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못해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들에게 나누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때때로 교회를 비난하는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를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진 재산, 받은 재능, 자신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을 위해 사용하고 나누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어떻게 하던 상관없이) 우리 각자도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한 알의 밀알들입니다. 나를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셔서 많은 열매 맺어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라우렌시오 성인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로마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알의 밀알로만 남지 않고 나눔과 베품을 통해 사랑의 열매들을 맺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내 뜻을 고집할 때에도 한 알의 밀알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뜻에 대해 죽고 주님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많지만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가난한 이들도 참 많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아픈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명상의 집에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안셀모 신부가 한 열명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혼자 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모두가 얼마나 힘드셨으면... 예수님처럼 자신만 사랑해 주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두를 사랑해 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시라리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명상의 집에 몰려 올까요? 심리학이나 정신과 진료는 한계가 있습니다. 돈도 무지막지하게 많이 듭니다. 맞는 약을 찾는 것도 참 힘듭니다. 그리고 결과는 그저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요?
많은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상적인 척 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고 황당하고 지나친 요구와 말도 안되는 사고와 행동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바둥바둥하다가 쓰러져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많은 이들, 세속의 문화에 젖어 들어 영적인 것을 잃어가는 청년들, 교회 내의 많은 일과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신심이 지쳐 있는 평신도와 수도자, 사제들, 영적인 열정은 있지만 방향을 잃고 어둠 속에 있는 많은 교우들이 명상의 집에 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정말 그들이 영적인 쉼을 갖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도와 주는 것은 우리 시대에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저를 명상의 집에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너무 많은 분들이 너무 많은 요청을 해서 때로는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이 있는 분들은 제가 힘든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이라 제 마음도 아픕니다. 예수님 마음도 아플 것입니다. “좀, 안셀모 신부를 그냥 좀 놔 두고 기도해 주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2년 반 사이에 제가 이곳 명상의 집에 와서 참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도 변하고 여러분도 변하고, 명상의 집도 변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쓰러져 가는 명상의 집을 새롭게 단장하는 것은 저를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필요한 성령의 요청이라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저는 젊은이들이 이곳에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시설을 보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치고 상처받은 젊은이들이 값비싼 호텔이나 리조트가 아니라 저희 명상의 집에 와서 영적인 쉼과 힐링의 시간을 가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다가가셨을까요?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석쇠에 구워진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한다면 얼마나 예수님을 따를까요?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도, 교회도, 명상의 집도 가난한 모습으로 함께 모든 것을 나누고 공유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보물을 발견하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라우렌시오 성인 축일을 맞자 내가 만든 원칙, 교회가 만든 원칙을 석쇠에 태워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분도 명상의 집에서 함께 어울려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왜냐구요?
“여러분 모두는 교회의 보물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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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전승이 있습니다.
식스토 2세 교황이 미사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하여졌는데, 라우렌시오에게 “사흘 뒤 너도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던 성인에게 로마 총독이 교회의 보물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협박하자, 사흘간 말미를 달라고 한 뒤 모든 보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사흘 뒤에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나타나 바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였고, 이에 격분한 총독은 석쇠 위에 눕혀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인은 오히려 형리들에게 “자! 한쪽은 다 익었으니 나 좀 뒤집어 주시오.” 하였고, 마지막에는 법관을 향하여 “이제 다 익었으니 잡수시오.”라고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모두 재물과 생명에 대한 너그러운 자세를 통하여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을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즐겨 사용하시던 씨앗의 비유로 뜻밖의 수확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강조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오로 사도도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의 요점을 말하며 씨앗과 수확의 비유를 듭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것은 거저 받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쥐고만 있던 손을 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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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자신의 재산과 재능을 이웃을 위해 기꺼이 봉헌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사랑으로 봉헌되는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랑의 밀알, 생명의 밀알이 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내어 주시고 구원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구원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로마 교회의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의 죽음과 표양으로 로마의 회개를 가져온 밀알이 되었습니다. 푸르덴시우스 시인은 라우렌시오가 보여 준 신앙의 증거로 로마의 이교 신앙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박해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탐내자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형벌을 기꺼이 받은 순교자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가르쳐 준 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밀알이 되도록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밀알,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자선을 베푸는 밀알,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밀알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희생되어야 많은 사람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의 희생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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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성도들을 위한 구제 활동, 특히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는 공동체의 선행을 들려줍니다. 사랑을 베푸는 행위는 씨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는 선행은 위선적인 행위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베푸는 사람에게 선행의 씨앗뿐만 아니라 열매도 풍성하게 늘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추종에 대하여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줄 때는 그런 일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내가 뭔가를 얻으려는 다른 뜻을 조금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불명예와 역경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목적지에 이르러 주님의 거룩한 영광을 함께 누리려면 불평하지 말고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지만,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식스토 2세 교황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명으로 직무에 충실하여 순교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258년) 식스토 2세 교황과 그의 동료 네 부제가 참수형을 당한 나흘 뒤에, 라우렌시오는 활활 타오르는 숯불 위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사랑의 열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교회의 수많은 순교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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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밀알을 죽게 하는 힘은 생명력입니다. 그러니 ‘죽을 수 있는 힘’(살리기 위해)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이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요,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이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됩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기보다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거나, 수도자가 집과 가족을 떠나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따름에도 진정한 섬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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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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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청년김대건길!>
꿈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은이성지에서 신덕고개, 망덕고개, 애덕고개를 넘어 미리내성지까지 도보 성지순례를 꼭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어제부터 이번 한 주간 휴가의 시간을 갖습니다. 어제 청년김대건길(10.3km)을 걸었고, 오늘은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묘소가 있는 수리산 성지를 다녀올 계획입니다. 수요일에는 솔뫼성지와 나바위 성지를 거쳐 산청으로 가서 하루 묵고, 다음날은 지리산 등산을 하려고 합니다.
어제 걸었던 청년김대건길은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생전에 걸으셨던 '사목활동의 길'이고, 순교하신 후에는 이민식빈첸시오 형제님이 신부님의 유해를 운구한 '유해운구길'입니다.
그래서 벅찬 마음이었고, 망덕고개에서 애덕고개 구간은 제 고향을 지나는 구간이어서 또한 벅찼답니다.
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이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땀과 이민식빈첸시오 형제님의 땀으로 느껴졌습니다. 순례의 배고픔과 힘듦이 또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가 순교형으로 불 속에 던져진 뜨거움에 비하면 어제 체험한 더위, 지금 겪고 있는 더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첫 사제이신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많은 이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한 분들입니다. 너를 위해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신 분들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밀알이 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박해자들 앞에서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라고 외침으로써,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무더위와 코로나의 힘듦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하면서 이겨냅시다! 우리도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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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섬김 따름 닮음>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함께 섬김 따름 닮음>
함께한다는 것은
그저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잘난 듯 앞서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따르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단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닮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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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들이 보기에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만났던 형제님도 그렇지 않을까 싶더군요. 이분은 전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지 옷도 낡은 체육복 차림이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습니다. 딱 봐도 ‘예술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분은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지금까지 대중에게 크게 알려진 책을 쓰지 못했지만, 매일 멈추지 않고 글을 쓰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분과 대화를 하면서, 얼마나 즐겁게 살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돈은 없지만 즐겁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지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인 싸움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또 대단한 명예나 부를 쫓지도 않습니다. 단지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남에게 상처 주지 않으며 매일 기쁘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걱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글만 써서 어떻게 먹고사느냐고 말한답니다. 혀를 차며 사람 구실을 못 하는 것처럼 말한답니다.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남들은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같다고 고백하시더군요.
세상의 기준이 곧 행복의 기준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의 기준이 행복의 기준이 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 스스로가 당신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성인성녀들 역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밀알과 같은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를 위해 세상의 기준처럼 자기 사랑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 부분은 약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배경을 이루는 셈족의 언어 관습에 따르면, ‘미워하다’가 ‘사랑하다’와 관련해서 쓰일 때에는 흔히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를 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보다 주님의 기준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기준이 곧 행복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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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주님>
현재는 신학교 입학 후 군대 기간까지 포함해서 거의 10년이 되어야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주 빨리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세례를 받고 주교품까지 받는데 최단 시간을 기록한 인물이 있더군요. 그 시간이 딱 일주일이었습니다.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멘토였던 성 암브로시오 성인이십니다. 밀라노 지역의 집정관으로 왔다가 아리우스 이단과 가톨릭교회의 대립을 해결했고 이를 통해 비신자였던 그가 주교품까지 일사천리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원후 374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교회의 틀이 완성되기 전이어서, 당시의 필요 때문에 암브로시오 성인께서 나타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활동은 늘 그때 가장 적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이 역시 주님의 커다란 활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서도 주님께서는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활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습으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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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을, 능력, 재능을, 물질을,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데 어찌 열매가 풍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내일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하면 ‘내 나라’가 만들어지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예수님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사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총독에게 “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 하며 믿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총독이 라우렌시오를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 눕혔는데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었지 않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차례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합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 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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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예수님 모범, 예수님 사랑, 예수님 추종-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얼핏 생몰연대를 보니 33세까지 사셨으니 예수님과 같은 연세입니다. 새삼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사는 가가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성인의 순교가 순교적 삶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분발케 합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꽃졌다하여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영적 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시가 생각납니다.
-“꽃졌다하여 끝난 것은 아니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민들레 홀씨 형제들!
언제 떠나 어디에 닿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임만이 알 뿐이다
몇날 동안 참 행복했고 화려했다
이제 샛노랗게 빛났던 하늘 사랑 추억 씨앗마다 가득 담고
임바람 불기만 기다릴 뿐이다
꽃졌어도 계속되는 생명
바로 영원한 생명이로구나
죽어 사라져도 끊임없이 사랑의 홀씨들 나눴던 삶
죽음은 없다
영원한 삶이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생명이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2001.5.4
참 아름다운 영적 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시입니다. ‘꽃이 지다’와 ‘싸움에 지다’라는 말마디중 ‘지다’란 말마디가 재미있습니다. ‘지다’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꽃이 졌지만 또 다음해 부활하듯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졌잘싸’, 올림픽에서 16위한 선수단에 대한 평도 재미있었습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최선을 다했다면 승패에 관계없이 영적 승리라 할 수 있으니 다시 분발하여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깨어 영적 승리의 삶을 사는 분투의 노력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역시 아주 오래 전에 써놨던 ‘산은 나이도 먹지 않는가 보다’라는 시를 나눕니다. 예나 이제나 '늘 거기 그 자리' 한결같은 정주의 불암산은 저의 영원한 도반이자 스승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는가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4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놀랍고 감동적인 분들이 자기 삶의 자리 곳곳에서 산처럼 영적 승리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영적 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순교요 하루하루 일상에서의 순교적 삶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영적승리의 죽음이 아니라 하루하루 영적승리의 삶을 살 때 영적승리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순교 상황도 참 감동적입니다. 로마의 집정관이 교회의 모든 보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자 3일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교회의 값비싼 그릇들과 돈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눈후 재산을 요구하는 집정관에게 병자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타나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를 석쇠에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이 쪽은 다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마저 구워라.”하였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옵니다. 성인의 상징물은 석쇠입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강론에서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라며 성인의 순교에 대해 언급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랑이 참 각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라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에서의 가난한 이들과의 자발적 사랑의 나눔 역시 영적 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넉넉히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는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없어서 못 나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친절한 미소, 부드러운 격려의 말마디, 부족한대로 사랑의 표현은 끝이 없습니다. 얼마전 참 가난한 자매가 양말 네 켤레를 선물했고 감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나눌수록 풍요로운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영적 승리의 삶의 비결을 배웁니다.
첫째,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으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영적 승리의 영원한 모델임을 배웁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죽어서만 부활이 아니라 날마다 겸손이 비워,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이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죽으러 수도원에 들어 왔는데 살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다.”고 아주 예전 수도원 피정지도시 정하권 몬시뇰 신부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둘째,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무엇도 예수님 사랑에 앞세우지 마십시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이 말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이 깊어질수록 자기 목숨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순교성인들처럼 자기 목숨에 초연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추종하십시오.
세상 온갖 우상들의 유혹을 과감히 떨처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김으로 추종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공동체의 형제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추종하는 우리들입니다. 섬김과 추종은 하나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의 공동체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겸손히 주님을, 형제들을 섬기는 삶에 충실한 사람들을 아버지께서도 존중해 주십니다. 영적 승리의 삶은 바로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늘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섬김과 추종의 삶이지만 좌절할 것이 아니라 늘 한결같이, 다시 새롭게 섬김과 추종의 삶을 시작하십시오.
하루하루가 선물이자 기회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 모두 영적전쟁에서 주님의 전사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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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가난한 이들을 섬기다가 목숨까지 잃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섬김의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자신이 죽어 무수한 열매를 맺는 밀알의 본보기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앞으로 하실 일을 알고 계셨기에 결연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께 "형제를 살리는 죽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분 주위로 몰려든 이들은 그분을 섬기면서 동시에 섬기는 법을 배워갑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어떻게, 왜 섬기실까요?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 병자와 허약한 이들, 마귀에 시달리는 이들,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섬기십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고쳐 주고 함께 밥을 먹고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친구가 되어 그들을 섬기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들 안에 당신이 있고, 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누구나 각자 얼마간의 부족함을 지니고는 있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함께하실 만큼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면서 그분의 섬김을 배워가는 이들을 존중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의 바람, 영혼의 열망을 눈여겨 보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그들의 바람과 열망이 이미 아들 예수님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고리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 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나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희사와 나눔은 섬김의 한 방식입니다. 나누는 것이 무엇이건 그건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해 주신 것이고, 나눔의 수혜자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가난한 이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2코린 9,9; 시편 112,9 참조)
성도들을 위한 희사를 독려하며 사도는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나눔도 믿음처럼 하느님 앞에서 위로움을 얻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나눔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을 도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또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계획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십니다. 그분 홀로 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도 사랑을 실천하여 의로움을 이룰 기회를 주시고자 사랑이 흐르는 세찬 물줄기 중간 어디쯤에 우리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겁니다. 이 또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자신이 받은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이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받은 쪽은 덜 받은 이들을 돌보라고 불리운 것이고, 또 덜 받은 이들은 더 가진 이들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그런 하느님의 의도를 명확히 꿰뚫은 분있었습니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극에 향해 치닫는 요즘, 믿지 않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믿는 이들에게도 이런 담론이 얼마나 무색한지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만, 말씀 안에 깃든 진리를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우리로서는 힘 내어 우리가 선택한 섬김과 따름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정말입니다! 이 말씀이 진실인 줄 저도 알고 또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십니다. 그러니 지치지 말고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성 라우렌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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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8KDdWJxOb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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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하느님께서는
저마다
밀알 하나를
주셨다.
하나의 실천이
생명에 이르는
많은 열매가 된다.
신앙은
열매이며
신앙은
우리 자아의
죽음이다.
죽지 않고서는
섬길 수 없고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없다.
십자가의
걸림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열매가 되는
십자가의
여정을
멈출 수는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뜨겁게
바라본다.
성체를 쪼개며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뜨겁게 만난다.
하느님을 향한
모든 죽음은
성 라우렌시오같이
뜨겁다.
뜨거운
밀알의
죽음이
곧 풍성한
열매가 된다.
열매는
눈물처럼
뜨겁다.
열매로
나가는 삶이
복음의 삶이다.
하나의
밀알도
하나의
열매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의 것이기에
내어드려야 한다.
죽는 밀알에서
하늘을 본다.
죽지않고서는
하늘을
보여줄 수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밀알이다.
죽음을 배우는
십자가이다.
이와같이
신앙은
밀알처럼
죽지 않고서는
결코
풍요로울 수
없는 십자가의
선물이다.
열매를
맺고 싶다.
열매를 맺는
길을 보여주신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것이 행복과
기쁨 그리고
자유의 열매이다.
열매를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시다.
열매를 맺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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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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