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1/ 예수께서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하셨다(막 4:31).
가장 작은 씨가 땅에 묻혀 큰 나무로
성장하여 새들에게 보금자리
를 제공한다는 비유이다.
모든 씨 중에 가장 작다는 열등감,
땅 속에 묻히는 괴로움, 햇볕에
타고 바람에 시달리며 때로는
차가운 눈 속에 덮이지만 겨자씨의
희망은 큰 나무로 성장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사는
크리스찬들은 이 작은 겨자씨들이다.
그들의 고통은 희망 속에서 기쁨으로 변하고,
그들의 괴로움은 이 소망 속에서 감사로 변한다.
이 희망이야말로 우리 생애를
맡겨 볼만한 위대한 결정이다.
뜻하지 않은 변화, 생각지 못했던 사건,
대인관계나 혹은 살아가는 환경과 역사에
나타나는 큰 변화와 혹은 고통스러운
체험은 역풍처럼 우리를 덮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역풍 중에
걸어오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
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께서 역풍과 심한 풍랑 속에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기적 이야기라기보다는 더 깊이
있는 신앙의 해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막 6:47-48).
성경은 무척 인상적인 말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풍 속에 나타난
시간이 새벽 4시였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시간을 뚜렷하게 밝혔을까?
다른 기사에 시간을 명기하는 사례는 드물다.
새벽 4시라고 하는 시간에 대한 명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새벽 4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아침이 밝아오는 소망의 시간이다.
새벽 4시는 흑암의 밤중과 광명의
아침의 경계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역풍 속에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모습을 보이신 새벽 4시는
희망의 시간이었고 구원의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새벽 4시
까지 미루어졌던 것이다.
제자들이 파도와 싸우고 있을 때,
하나님 자신도 인내로써
새벽 4시까지 기다리셨고
믿음의 인내를 제자들
에게도 요구하셨던 것이다.
밤이 어둡고 너무 길다고 낙심하지 말자
. 새벽 4시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슬기를 가지라.
/희망 2/희망이란 두 자만큼
위대한 말이 또 있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당신의 시간에 활력을 주고
당신의 앞날에 밝음을 약속합니다.
지옥 입구에 붙은 푯말입니다(神曲).
“이리로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려라.”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산소 공급
이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허무와 무의미라는
정신적 마비를 가져옵니다.
희망의 공급만이 행복을
향하여 새 출발하게 합니다.
희망은 사랑에 의해 생기고
사랑은 희망에 의해 키워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이 움트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은 더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의 그 빛난 얼굴을 보십시오.
그것은 희망의 샘이 솟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희망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그러지지 않고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고후 4:8~9)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지금 당신 속에 계십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아프리카 최남단의 곶(串)을 옛날에는
‘폭풍의 곶(cape of tempest)’이라고 불렀다.
너무 험한 바다여서 너무 험한 바다여서
수없이 많은 배가 침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감한 포르투갈 선원들은
여러 번 도전하여 드디어 안전하게
이 곳을 통과할 수 있는 해로를 발견했다.
그 후 이 곳은 이름을 바꾸어
‘희망봉(cape of good hope)’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폭풍, 바로 그 속에 안전이 있었고
절망 속에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한 해는 봄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루는 아침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침은 7시로부터 시작한다.
언덕의 이슬은 진주처럼 빛나고
하나님은 분명히 저 하늘에 계시니
이 세상 일은 오늘도 잘 되어 나갈 것이다.
그대의 꿈이 뒷전으로 물러앉고,
그대의 희망이 화석처럼 굳어버리고
그대의 가슴속의 기대에 부푼 고동이
멈추었다면 그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희망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용기를 되찾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희망 3/ 중국 사람들이 위기(危機)라는
단어를 만들 때 ‘위험’과 ‘기회’를
합하여 만든 것은 참으로 슬기로운
착상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위험도 하나의 기회가 된다고 본 것이다.
위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앞날에 대한 강한 희망만큼 인간
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없다.
기운이 없고 좌절한 인간은 그만큼
미래에 대한 소망의 농도가 엷은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
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는데
한 마리는 포기해서 죽고
다른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저어 우유가 버터로
굳어져 살아 나왔다는
우화에서 나온 속담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낙관적인 인생관을 갖는 것이다.
비관적인 문턱을 넘어
복이 들어올 수는 없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보다 높은 신조를 갖는 것이다.
욕심의 철학이 아니라
꿈의 철학을 갖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돌파구를 찾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진실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거짓의 일시적인 성공을 보고도 허무해
지지 않도록 용기를 갖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 위에 확고히 서는 것이다.
자기의 할 사명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희망이 없을 수 없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보다 큰 것을 보는 것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작은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넘어진 것이 잘못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기 못하는 것이 잘못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폭풍은 폭풍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방주에 오르자/ 세상 미련 다 버리고
예수의 방주에 오르자. 살 곳은
그곳밖에 없다. 소망은 그곳밖에 없다.
38년 동안 절망을 헤매던 사람도
베데스다 못에 가서 예수 방주
에 올라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수치와 죄책감으로 오래 고민하던
수가 성 여인도 우물가에서
예수 방주에 올라 새 날을 내딛었다.
희미한 신앙으로 영적 방황을 하던
니고데모도 어느 날 밤 예수
방주에 올라 영생의 빛을 찾았다.
방주에 오르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헛된 이생의 자랑과 내 발을 칭칭
묶는 욕심을 벗어버리고,
재리의 유혹, 안목의 유혹을 툭툭
털어 버리고 예수 방주에 오르자.
소망과 생명의 주님 예수는
우리의 방주가 되신다
(벧전 3:20이하, 창 7:7).
대홍수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방주였다.
진노의 홍수가 침입할
수 없는 유일한 구원성,
유일한 도피성(민 35:6)은 방주였다.
/희망 4/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의
흥쇠를 내부적인 원인으로 분석하였다.
세계 문명 21개 중 19개의 쇠망이
내부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전쟁과 같은 외부적인 파괴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 등의 타락상에
의해 문명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한 문명이 쇠퇴하기 시작할 때는
사람들의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는 정신적
쇠퇴가 선행했다고 한다.
희망을 잃게 되면 가정도 사회도
문명까지도 기울기 시작한다.
성경에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
. 하나님의 자비와 너그러움이 곧 기다림이라면
우리도 조바심을 내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때를 인내로써 기다리는 것이 소위
성경이 말하는 신앙인의 소망이다.
/희망 5/ 지구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더 발전하고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하늘과 땅과 물이 밝은
미래를 향해 협력하고 있다.
이 대자연, 우주의 합창에 인간들도
희망을 갖고 참가해야 한다.
강가에서 양계장을 하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닭들이 떠내려갔다.
그러자 한 사람은 절망 속에서 떠나가고
다른 사람은 오리 사육을 시작했다.
포기는 방안이 될 수 없다.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지혜자 다운 행동이다.
좁은 땅에 사람은 많고 앞길이 막막하지만
밝은 내일을 건설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희망을 갖는다면
그 모든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본 사람만이
그 산을 오르는 어려움과
기쁨과 요령과 방법을 알게 된다.
산밑에서 갑론을박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유익이 안 되고
공동체에도 도움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