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나 한 잔 합시다.
겨울로 가는 산사의 뜰에는 무수한 낙엽들이 딩굽니다. "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고(葉落歸根엽락귀근) (우리는) 처음 올 때는 입이 없었다(來時無口래시무구)" 뿌리가 잎의 근본이듯 우리의 근본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이라는 것이 본디 없지야 않았겠지만 입을 두고도 생각이 자라지 않아 말도 자라지 않았을 즈음. 분별이라는 것은 없었을 일입니다.
아직 내 속에 아무 것도 자라지 않아, 사람, 그 자체로서의 본성만을 지니고 있었을 즈음에는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잤을(饑來喫飯기래끽반 因來卽眠인래즉면)"테이지만, 그러나 그것,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 이전의 말, 곧 몸짓인 탓입니다. 선방에 앉아 그 몸짓 되찾으려 애쓰는 수행자들, 곧 나를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있었을 그 즈음, 때로 산다는 것은 점점 그것을 잃어버리고 또 되찾으려 안달을 하는 일인 듯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붙들고 “차나 한잔 합시다.”라고 흉내를 내는 가 봅니다.
오늘은 조주(趙州) 선사(禪師)의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 잔 하시게’ 이야기입니다.
“대나무 숲 뒤뜰에서 서로 만나 아무 일 없이 온 대중이 모두 모여 조주차(趙州茶)를 마신다(죽원상봉무일사(竹院相逢無一事) 대가동끽조주차(大家同喫趙州茶))
어느 시인의 시(詩) 한 구절입니다. 조주선사의 ‘끽다거(喫茶去)’가 워낙 유명하다가 보니 차에 관한 수많은 선시(禪詩)가 생겨났습니다.
“차나 한 잔 마시게(喫茶去)”
이 선어는 그 어떤 선어(禪語)보다도 많이 알려진 선어이자 화두(話頭)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선승(禪僧) 조주(趙州)선사(778~897)는 신참이든 구참이든 수행승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혹 이곳에 와 본이 있는가?”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마시게(喫茶去)”
다음 날 또 다른 신참승이 찾아 왔습니다.
“자네 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있는가?”
“네,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차나 한 잔 마시게(喫茶去)”
절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 스님이 옆에서 묵묵히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가관인 것입니다. 와 본적이 있다고 해도 ‘차 한 잔’, 없다고 해도 ‘차 한 잔’이었습니다. 원주는 입이 근질거려 조주선사에게 따졌습니다.
“노사, 노사께서는 처음 왔다는 사람에게도 ‘차나 한 잔’, 이미 와 본적이 있다는 사람에게도 ‘차나 한 잔 마시라’고 하시니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조주선사는 ‘원주’하고 불렀습니다. 원주가 대답하자 조주선사는 그 원주에게도 역시 “자네도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 했습니다.
와 본적이 있어도 ‘차 한 잔’, 와 본적이 없어도 ‘차 한 잔’, 그리고 그것이 못마땅해서 참견하는 원주에게도 ‘차 한 잔’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조주의 ‘끽다거’는 일약 중국 천하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차나 한 잔 마시게’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뭣고(?)
젊은 수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당대의 선장(禪匠) 조주선사를 찾아 왔을 때에는 무언가 분명히 듣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사, 무엇이 선(禪)의 진리입니까? 가르침을 바랍니다.” 뭐, 이런 말이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선(禪)의 세계는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도 있듯이 표현하는 순간 이미 무의미한 말(死句)로 그르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해서 조주는 말로 표현하는 대신 차(茶)를 내민 것입니다.
“무슨 얼어 죽을 선(禪)의 진리,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말고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 뭐 이런 뜻이었을까?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중국도 그렇지만 선승(禪僧)들에게 차(茶)는 일상(日常)이고, 깨달음의 세계 또한 일상(日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日常)은 무심(無心)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이 화두를 푸는 열쇠는 “여기에 와 본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몰론 있다고 해도 방망이는 피할 수 없고(차 한 잔은 마셔야 하고), 없다고 해도 얻어맞아야 합니다. 있다고 하면 ‘유(有)’에 구속되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무(無)에 걸려드는 차별심이고 분별심이며 이분법적 사고(思考)인 것입니다. 이분법은 어쩔 수 없이 또 집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따지는 원주도 당연히 얻어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 한 잔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여기서 조주의 차 한 잔은 단순한 녹차 한 잔이 아님은 누구나 알만합니다. 그의 차는 상대방의 분별심을 강하게 질타하는 몽둥이인 것입니다. ‘있다(有)’ ‘없다(無)’에 대한 상대적 인식과 분별심을 버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차(茶)입니다. 그런데 만일 조주선사의 말씀에 대하여 침묵했다면 조주선사는 어떻게 했을까요? 침묵해도 역시 조주선사는 ‘차(茶)나 한 잔 마시게’ 라고 했을지...? 이것이 오늘 우리의 숙제이자 화두(話頭)입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했던가요! 조주선사가 내미는 연두색 차 한 잔을 그야말로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무심(無心)히 마실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선(禪)의 일은 마쳤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알고모르고’ 에 관계없이 우리 다 같이 언제 어느 곳에서든 차나 한잔 마십시다.
우리의 일상에서 차 한 잔의 의미는 주객(主客)이 없는 일미(一味)의 영롱한 정신의 일깨움에서부터 다정한 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을 담아냅니다. 말이 없는 몸짓으로도 무수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자연처럼 말입니다.
자연, 그는 모든 생각과 말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본성(本性)이 흔들린 내가 가야 할 곳도 바로 그 곳인가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사를 오고가는 이들을 향하여 “차나 한 잔 합시다.”라고 합니다. 오고 감에 걸리지 않는 저 자연의, 일상에 무심한 나뭇잎처럼 삶과 죽음에 걸리지 않는 자유인이고 싶어서입니다.
벗들이여!
우리들 삶이 버겁고 힘이 들거든 산사로 오세요.
꼭 조주차(趙州茶)가 아니래도
차나 한 잔 합시다.
한 잔, 한 잔 마시다 보면
무심(無心)한 일상(日常)이 다름 아님을
몰록 알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뭣고(?)
2010.11.14. 염화당 중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