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을 다니다보니 특이하게도 도로 좌우에 보리를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누렇게 익었는데도 그대로 두는 것을 보면 수확용은 아니고 관상용인 것 같은데 발상이 참신하다. 어떤 곳에는 루드베키아를 함께 심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곳도 있었지만 차 세우기 적당한 곳에는 그저 보리만 있었다.
여기서는 미산면에서 이번에 돌아본 두 곳의 묘역과 함께 이번에는 가지 않았지만 몇 년 전 들렀던 숭의전지 및 정발장군묘를 함께 올린다. 통현리 지석묘에서 윤호신도비로 향하는 중 왼쪽에 사적 제223호 연천숭의전지(漣川 崇義殿址) 입구가 보인다. 주차장에는 상당한 차량이 서 있다. 그만큼 이곳은 연천의 대표 문화유적 중 하나다. 물론 저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모두 숭의전을 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나중에 들른 경순왕릉 주차장에 차가 10여대 있었지만 정작 능역에는 한 팀만 보였다.)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아미리)에 있는 숭의전지는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각을 세웠고 정종 원년(1399)에는 태조 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제사를 지냈다. 그후 세종 5년(1423), 문종 2년(1452)에 고쳐지었다. 문종 때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의 충신 15명을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건물의 관리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 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사적 (史蹟)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에는 왕씨 후손이 정전(正殿)을 복구했고, 국비 및 지방보조로 1975년 2월에는 배신청(陪臣廳)(13평)을, 1976년 1월에는 이안청(移安廳)(8.7평)을, 1977년 2월에는 삼문(三門)을 신축하였다. 완강하게 조선을 거부하였던, 고려시대의 왕씨 문중들이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옛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지난 답사 당시 숭의전과 함께 연천에 있는 많은 묘역 중 왜 경기도 기념물 제51호 정발장군묘(鄭撥將軍墓)를 선택하여 들렀는지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미산면 백석리 산34-1외 경주정씨 세장지 내에 있는 이 묘역은 조선 중기의 무신 백운(白雲) 정발(1553∼1592)장군이 묻혀 있는 곳이다. 꽤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는 선조 12년(1579)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그 후 계속 벼슬에 올라 군비를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는데 힘썼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에 침입한 왜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고 장군도 전사하였다.
장군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투구와 갑옷을 물고 와서 그것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며, 죽은 후에 좌찬성의 벼슬에 올랐다.
봉분은 하나이며 부인 풍천 임씨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돌로 만든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무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비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없어졌고 1982년에 새로 만든 묘비가 봉분 우측에 세워져 있다.
위 두 곳은 지난 답사 때의 사진들이며, 이번 답사에서는 통현리지석묘에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평정공윤호신도비(平靖公尹壕伸道碑)가 있는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31-1번지로 향했다. 3번 국도를 중심으로 볼 때 연천의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온 것이다. 윤호(1424~1496)의 신도비는 도로변의 나지막한 구릉상에 남서향하여 위치한다. 신도비는 조각 기법이 탁월하여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건립 당시 비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국 전쟁 중에 전소되어 4개의 주춧돌만 남아 있다.
신도비의 비좌는 백색 화강암으로 전후 9엽, 좌우 4엽씩 복련문이 있다. 비좌에는 각 면에 네모진 틀을 만들고 상서로운 동물들을 새겨놓아 두었다. 앞뒤 넓은 면에는 두 마리씩, 좌우 좁은 면에는 한 마씩의 동물을 역동적인 모습으로 새겼다.
비신의 전면에만 비문이 있는데, 한국전쟁 때 입은 수많은 탄흔으로 판독은 불가능하다. 하단 좌우측에 일부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면이 앞면인지 알기 어렵지만 앞면에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면 묘역으로 오르는 쪽에서 보이는 면이 앞면인데, 앞면의 손상은 단지 총탄만으로 인한 것인지 의구심을 일으킨다. 이수부터 비신까지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면서도 비신이 동강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수는 검게 산화되어 있으나 운문 속에 입을 벌려 혀를 널름거리고 날카로운 이빨과 매서운 눈, 턱 밑의 수염과 발톱이 세 개인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신도비 아래에는 하마비가 있다.
신도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따로 연천군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원부원군 윤호묘가 나타난다. 묘는 용미(龍尾)를 갖추고 있고, 봉분규모는 직경 509cm·높이 160cm이며, 봉분 전면에 묘표와 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이 마주보고 있다. 묘표는 비신 전면에 「議政府右議政 鈴原府院君 尹公之墓」라 새겨져 있다. 규모는 높이 115cm·너비 68cm·두께 22cm이다. 이수는 3개의 발톱을 가진 한 마리의 용을 운문과 더불어 잘 표현하고 있으며 높이 44cm·너비 69cm·두께 25cm이다.
영원부원군 윤호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이다. 자는 숙보이고 영천부원군 삼산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29)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기시주부, 의금부도사, 신창현감, 밀양부사, 양주목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1472년(성종3) 춘장문과에 내과로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 성종이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 정현왕후가 되자 국구로서 영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1488년 영돈녕부사에 이르고 이듬해 사복시제조를 겸하였다. 1495년(성종25) 우의정이 되면서 기로소에 들어가고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평소에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함이 없었으며 외척으로서 세도는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윤호신도비에서 가까운 심덕부신도비 및 묘(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553)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사전조사에서 1km 정도였던 거리가 내비 검색에서는 5km가 훨씬 넘는 것으로 나온다. ‘山’번지는 종종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그 경우였다. 이 지역은 포털 위성지도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그 다음 목적지를 입력하고 가는 길에 찾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진행하다 보니 우측 산록에 제법 오래된 듯한 묘역이 하나 보이고, 더 진행하자 입구에 [靑城伯...墓域-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이란 표지판이 있다.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제대로 찾았다.
묘역에 들어서니 神道碑는 묘역 하단 향좌측에 있고, 우측에는 같은 내용을 다시 새겨 세운 새 신도비가 있다. 구 신도비는 별도의 비좌 위에 하나의 돌로 만든 비신 및 이수를 갖추고 있다. 前面에만 비문이 있는데 비신 우측 측면의 하단부 박락이 심하다. 비액은 「靑城伯沈公神道碑銘」이며, 비제는「有明朝鮮國特進輔國崇祿大夫左政丞靑城伯沈公神道碑銘 幷序」이다. 비는 1563년(명종 18) 8월에 건립되었으며, 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 通源이 撰하고, 현손 가선대부 전주부윤 銓이 書와 篆을 하였다.
상단에 있는 심덕부 묘는 활개를 갖추고 있고, 봉분은 방형으로 최근에 조성된 호석을 두르고 있다. 봉분규모는 동서직경 488cm·남북직경 640cm·높이 130cm이며, 심덕부의 묘 아래에는 配位 정경부인 仁川門氏[굉장히 드문 성씨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들어본다.]의 묘가 같은 구조로 위치한다. 석물은 여럿 있지만 문인석 외에는 모두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심덕부(1328~1401)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의 문신으로 본관은 靑松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蔭職으로 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쳤다. 고려 말에 왜구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1388년의 요동출병 때는 서경도원수로서 조민수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도왔다. 1391년(공양왕 3) 安社功臣 및 1393년(태조 2) 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靑城伯에 봉해졌다. 72세 때인 1399년(정종 1)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치사하였다. 조선왕조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는데, 1394년에는 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건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인용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연천선사관리사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