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性徹) 스님은 병상(病床)에서 “똑같다”고 했다 !!!
대한민국의 승려로 한국 현대 불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高僧)인 성철스님에 대한 글을 쓴다. 신문에 난 기사, 책을 읽은 글, 사람의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 등의 내용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틀을 벗어나 순서 없이 몇 가지를 적는다.
필자는 지금부터 약 30여 년 전인가 해인사를 찾았다. 목적은 해인사 본전(本殿)인 대적광전(大寂光殿) 현판(懸板) 글씨를 보기 위해서다.
“대적광전(大寂光殿)”글씨는 조선의 명필 안평대군이 썼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본전(本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대적광전은 마하비로자나불(摩訶毘盧遮那佛)을 봉안한 불전(佛殿)이다. 사찰에 어떤 부처님을 중심불로 모시느냐에 따라 본전(本殿)이름도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다. 대웅전(大雄殿) 적멸보궁(寂滅寶宮)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 극락전(極樂殿) 등등으로 이름이 정해진다. 해인사의 대적(大寂)은 크다란 적막(寂寞)이란 뜻이다.
해인사 입구 우측 잘 가꾸어진 넓은 잔디밭에 자운율사, 혜암대종사, 퇴옹당 성철 대종사의 사리탑이 거창하게 있다. 필자는 불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혜암과 성철 스님의 법명은 알아도 자운율사(慈雲律師)는 몰랐다. 해인사 스님에게 물어본 결과 한국불교의 율풍(律風) 진작에 헌신했던 큰스님임을 알았다.
성철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많기 때문에 이글을 짧게 하기 위해서 필자가 생각하는 결론부터 말하겠다. 필자가 알고 있는 성철 스님은 평생을 누더기 옷을 입은 검소함과 허례허식을 경계한 스님으로 알고 있다. 성철스님을 생각하면 법정스님이 생각난다. 그래서 서두(書頭)에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너무 화려하다고 했다.
성설스님은 나(我)라는 아상(我相)을 없애기 위한 삼천배와 누더기 옷으로 평생을 사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호화로운데 필자는 내심 놀랐다. 저승에 계시는 성철스님은 어떻게 생각할까
법정스님처럼 살아생전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하였을 것이다. 해인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찰이 큰스님의 불심(佛心)을 남긴다는 미명아래 불교를 무슨 상품처럼 홍보하기 위해서 거창한 다비식과 사리탑을 건축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철 큰스님은 아래에 적은 마지막 남긴 열반송(涅槃頌)에서 자신이 이승에서 지은 죄업(罪業)이 얼마나 많은지 수미산(須彌山)을 넘치고 있다 했다.
성철 스님은 일생동안 이승에 살면서 남녀의 무리를 속이고 억지로 밀고 당기고 한 일을 그렇게 큰 죄업으로 여기고 속죄를 하고 싶다는 게송이다.
아래는 성철스님의 절명시(絶命詩)인 열반송(涅槃頌)이다.
성철 스님 열반송(涅槃頌) 生平欺狂男女群-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하늘을 넘치게 지은 죄는 수미산(須彌山)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산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一輪吐紅掛碧山-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스님은 결혼생활 중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절에 들어갔다. 42일 정진 끝에 동정일여(動靜一如) 경지에 이르렀다. 이는 성철 스님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동정일여(動靜一如)-움직임과 고요함이 한결같다
대승불교 경전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여 모든 생명체는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내용과 상반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이라는 글이 있다. 중국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 초기에 활동한 묘협(妙協) 스님이 저술한 법문(法文)이다. 중요 골자는 어려운 상황에서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아래 내용이다.
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貪欲易生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으로 인한 괴로움(病苦)으로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막상 병이 왔을 때 우리는 괴롭고 힘들다. 문제는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병을 대하는 우리 마음이다. 내가 왜 이 병에 걸렸을까? 이병이 과연 나을 수 있을까? 이병으로 잘못되면 어쩌지? 등등 온갖 생각을 일으킨다. 이런 근심 걱정이 병을 더 키우게 된다.
성철(性徹)스님은 팔십이 넘어 병이 났을 때 병실로 문병 온 제자에게 “똑같다. 똑같다”라고 하셨다. 평상시나 병이 났을 때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한자 표현으로 “병중일여(病中一如)”라 한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성철스님이기에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성철(性徹)스님은 열반에 들기 직전인 새벽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항상 생활하는(居所) 퇴설당(退雪堂)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참선과 새벽예불을 마쳤다. 오전 6시에 현미밥과 솔잎.콩 등으로 아침공양까지 했다고 상좌(上佐)인 원택(圓澤)스님이 말했다.
오전 7시30분 자신의 친딸인 불필(不必)스님과 측근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누워있던 성철스님은 갑자기 “이래선 안되겠다. 일어나고 싶다”고 해 부축해 일으켜 앉히자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내쉰뒤 앉은 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입적했다. (중앙일보 1993.11.05.)
▶아래 글은 성철(性徹) 스님의 게송(偈頌)이다. 白日杲杲碧霄中-쨍쨍한 해가 푸른 하늘에 빛나고 빛나며 千深海底魚生角-천 길 바다 밑에서 고기는 뿔이 돋아나네 趙州雲門却迷路-조주(趙州) 운문(雲門) 스님은 도리어 길을 헤매고 萬朶珊瑚光燦爛-만 갈래 산호 가지는 그 빛이 찬란하네
※趙州 雲門(조주운문)-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고승(高僧)이름 ※게송(偈頌)-부처님의 공덕(功德)을 찬미(讚美)하는 노래. 읽고 외우기 쉽도록 게구(偈句)로 지었다 ※게구(偈句)-외우기 쉽도록 다섯 자나 일곱 자를 한시(漢詩)처럼 쓴 글이다
성철(性徹) 스님은 위의 게송(偈頌)을 통해 중국 선(禪)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조주(趙州) 선사(禪師)와 운문(雲門) 선사(禪師)는 “길을 헤매고 있다”며 자신의 수행(修行)과 비교 하고 있다. 스님은 이 시를 남긴 이듬해인 1993년 11월 4일 입적했다.
▶성철스님하면 떠오르는 것은 고려시대 지눌(知訥) 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성철(性徹) 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논박(論駁)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돈점논쟁(頓漸論爭)”은 성철스님이 지눌(知訥)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것으로 본다.(필자가 불교 서적을 읽어본 생각임)
※돈오점수(頓悟漸修)-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꾸준하게 수행하는 단계를 말한다. 설사 깨달음 후에도 계속적인 수행이 필요 하다는 주장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눈 깜짝 순간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
▶성철스님하면 유명한 게송(偈頌)인 山是山(산시산)-산은 산이오 水是水(수시수)-물은 물이로다 가 생각난다.
이 게송(偈頌)은 성철스님의 창작(創作) 게송(偈頌)이 아니고 어원을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황벽(黃檗) 선사(禪師)의 게송으로 알려져 있다.
황벽선사(黃檗禪師)는 백장(百丈). 황벽(黃檗). 임제(臨濟)로 이어지는 조사선(祖師禪)의 정통으로 알려져 있다
※조사선(祖師禪)-불교의 한 계파인 육조(六祖) 혜능(慧能) 문하(門下) 남종계(南宗系)의 남종선(南宗禪)을 말한다. 달마대사 이후 육조(六祖) 혜능(慧能) 계파인 남종선(南宗禪) 설명은 매우 길고 복잡하다.
달마대사 이후 남종선(南宗禪)이 중국 불교와 동남아 지역 불교문화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한국화(韓國畵)의 대표적인 뿌리는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전남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의 주인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남종화(南宗畵)다. 이 남종화의 뿌리가 불교 육조(六祖) 혜능(慧能) 문하(門下)의 남종계(南宗系)와 관련이 있는 명칭이다.
▶성철 스님 어머님이 절로 성철 스님을 찾아오셨다 성철 스님이 출가하고 4년쯤 지난 1940년대 때 초반 무렵이라 기록되어 있다.
성철스님이 있는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선 하안거(夏安居) 중이었다. 절안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안건은 “성철 스님 어머니 면회”였다.
생때같은 장남이 말없이 출가(出家)한 후 속을 태우던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이곳 금강산 절에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어머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내다보지도 않고 참선(參禪)만 하고 있었다. 동료 선승들이 보다 못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성철스님은 여러 동료 스님들의 의견을 따라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성철스님이 어머니에게 첫마디는 “뭐하러 이(여기)까지 찾아오셨느냐”며 쏘아붙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성철 스님 어머니도 보통 단수가 아니었다. 경상도 사투리로 “나는 니 보러 온 거 아이다. 금강산 구경 왔다” 덕택에 아들 손 잡고 금강산 유람을 마친 성철 스님 어머니의 말씀이다.
“보고 싶던 아들 손 잡고 금강산 구경 잘 했제.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 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 되는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졌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성철 스님은 이렇게 도반(道伴)들 덕에 효도했다. ※도반(道伴)-불교 공부를 같이 하는 스님들
▶성철 스님에 대한 일화는 많다. 그중 비둘기목에 진주 목걸이다 성철 스님께서 양산(梁山) 성전암(聖田庵)에 계실 때였다 기도하러 오는 여신도 중에는 가끔 자신의 신분이나 모습을 과시하려고 요란하게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옷차림에 값진 패물들을 치장하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성철스님을 뵙고자 찾아온 여신도를 바라보던 스님께서 돈 많은 그 여신도의 목에 걸려있는 진주 목걸이를 보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얼마냐? 비싼 것이냐?”라고 문으시더니 “이리 가져와 봐라.” 하셨다.
여신도는 영문을 모르고 진주 목걸이를 스님께 드렸다. 그 즈음 암자에서는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
때마침 스님의 손 위에 비둘기가 날아와 앉았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 비싼 물건을 네놈 목에도 한번 걸어 볼 테냐? 얼마나 멋있나 보자꾸나” 하시더니
진주목걸이를 비둘기 목에 걸어 주었다. 그러자 비둘기는 깜짝놀라 성철스님의 손바닥을 벗어나 산등성이로 날아가 버렸다.
한참 후 그 비둘기가 돌아왔다 그러나 진주 목걸이는 이미 비둘기 목에 걸려있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 목걸이를 찾으려고 온 산을 뒤졌으나 끝내 목걸이는 찾지 못했다. 이 일이 신도들 사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후에 성철스님을 찾아오는 신도들은 비싼 패물이나 화려한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
혹 화려한 옷을 입고 온 신도들은 스님께 혼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빌어먹을 년들 절에 옷자랑 하러왔어?” 하시며 대번에 옷을 망쳐 놓았던 것이다.
만일 나중에 가난한 나무꾼이나 약초꾼이 그 진주 목걸이를 주웠다면 스님은 돈 많은 여신도에게 보시의 공덕을 쌓게 한 것이 아닐까?
▶성철스님의 제자인 원택스님이 “설전(舌戰)”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설전(雪戰)”은 눈발처럼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수행자의 내면을 담은 제목이다.
설전(雪戰)중의 대목이다 ▷법정스님 “요즘은 삼베가 꽤 비싸다 합니다”
▷성철스님 “그래요? 난 잘 몰라요 나 어릴 때는 삼베가 제일 천하고 검소하니 그걸 택한 거지 참으로 수도를 하려면 최저의 생활로 최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철스님은 제자와 후학들에게 대단히 엄격했다. 하지만 예외인 스님이 있었다. 법정스님이었다.
법정스님은 때때로 성철스님을 찾아가 쓴 소리도 하고, 의문스런 점이 있으면 몇 번이고 묻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또 성철스님은 자신의 책을 법공양하면서 법정스님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1987년, 성철스님은 사진집을 발간하면서 법정스님에게 서문(序文)을 요청했다.
▶성철스님의 시봉(侍奉)이었던 원정 스님이 “중보러 절에 오지마” 라는 책을 냈다.
이 책 내용에는 박정희 전두환 두 대통령 성철스님 못만나고 갔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두 대통령이 왔을 당시 해인사 백련암(白蓮庵)에는 성철스님이 정진 중이었다.
성철 스님은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면서 두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원정스님은 혹시 성철스님이 박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박처사, 이제 그만큼 했으니 잠시 쉬게. 모든 것은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이 해인사 골짜기에 와서 마음공부나 하시게. 부귀영화가 모두 바람 끝에 이슬 같은 것. 마음을 닦는 공부가 제일이야.”
그러나 “박처사(박정희)”는 성철스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 다음해인 1979년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18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만약 그때 해인사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더라면, 그리고 하루쯤이라도 백련암에서 머물다 갔더라면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는 없었을 테고, 광주의 5.18비극과 5공화국의 출현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