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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고...
[쿠르르... 푱푱, 펑, 합, 쿠쾅...]
학교가서 친구들과 학교놀이를 하고...
[팡팡, 타다다닥.. 탁, 톡톡..]
어김없이 집에 들아와 늘 하던것처럼... 에, 또...
[쿠쾅... 타다닥! 탁!탁! 크롸라라락!! 에이, 썅..]
에, 또.. 에, 또...
"아이씨!! 오빠! 좀 조용히 하지 못해?!"
"님, 나 보스전임. 신경꺼주삼."
난 베개를 던지려다말고 그대로 나와 가계부 정리중인 엄마에게로 쪼르르 달려나갔다.
"엄마, 오빠 때문에 공부 못하겠어요. 게임좀 그만하라고 해줘요."
"민수야, 게임 그만해라."
엄마는 볼펜을 입에 문채로 건성건성 말했다.
"네, 어머님."
그러나 오빠는 대답뿐이었다. 나는 씩씩거리며 아빠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오빠 게임좀.."
"...."
그러나 아빠는 TV 삼매경에 내 말 따위는 듣지도 않는 듯 했다. 난 아예 아빠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빠아아아. 오빠조오옴..."
하지만 여전히 꼼짝도 않는 아빠. 이럴 경우 더 매달리면 역효과만 날 것을 알기에 나는 포기하고 다시 오빠에게로 돌아갔다.
"오라버니. 내 얼굴을 봐서 제발 그만하시지."
오빠는 내 얼굴을 한번 휙 보더니 똥 본 듯한 얼굴이 되어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 끝났다며."
"아, 꼭 시험기간에만 공부하는거야?"
나는 씩씩거리며 스피커 소리를 줄였다. 그러자 오빠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야, 야, 너땜에 모니터 안보이잖아, 어, 어? 에이, 썅..."
그러면서도 모니터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않는 오빠. 이런 원수떼기...
오빠 방에서 나오는데 엄마역시 여전히 가계부에 눈을 떼지 않는 채로 (누가 한 식구 아니랄까봐!) 말했다.
"너 왜 갑자기 하지도 않는 짓 하니?"
"왜?"
"공부말야, 공부. 평상시엔 하라고 해도 안하더니."
"아이씨, 대체 우리 가족은 왜 좋은 일도 못하게 하는거냐구!"
쾅! 큰소리 내며 뭄을 닫자 밖에서 세명의 사람들이 (물론 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다) 나에 대해서 제각기 중얼중얼 대는 소리들이 들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샤프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쓰던 것을 읽어보았다.
...평범한 것. 나는 지금까지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무미건조까지 한 18살의 여고생.
그런 내게도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평범함 속에 속하는 일들 아닐까..?
어쩌면 나 말고도 다들 그런 일들을 한번쯤 겪었는지 몰라. 그리고는 창피해서 나처럼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지난날의 꿈으로만 묻어뒀는지도 몰라.
백주대낮에 뚱딴지 같은 꿈을 꿨는데, 뭐, 그것이 사실은 예지몽이어서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거나 하는 것...
음, 그런데 대체 그걸 예지몽이라고 할 수는 있는걸까..?
나는 글씨를 쓰다말고 잠시 생각속에 빠져들었다.
지난 저녁 학교에서 의문의 폭발이 일어나 학교건물 일부와 운동장의 단상이 무너져내렸다. 단상 아래 공간은 체육시간에 관련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로 사용하는 곳인데, 마침 체육 물품들을 정리하고 계셨던 주임선생님이 그곳에 계셨다가 크게 다치신 것이다.
이 일은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일대 큰 사건이었다. 학생들은 혹시나 다음날 등교 안해도 되나, 하고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보니 주임선생님의 두팔과 다리가 몽땅 분질러졌다는 둥... 물론 소문이니 터무니없이 부풀려진게 없지않아 있겠지.
헌데말야, 하필 머리를 다쳤다거나, 폭발에 화상을 입었다거나, 그런 소문이 아니고 꼭 두 '팔과 다리'가 부러졌다는 건 그저 우연인 것일까..?
너무나 생생한, 무지무지하게 현실같은 꿈...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사건.
호, 혹시..? 난 아무래도 예언가의 기질을 지닌게 아닐까..??
나는 화들짝 놀라 글을 이어나갔다.
어쩌면 내게는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보면 엄마, 아빠는 내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 집앞에 버려진 의문의 아기, 하지만 알고보면 그 아기는 어느 신통한 무당 집의 아이였던 것...
거기까지 적다가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추측이란 말인가.
나는 입술을 만지작 거렸다. 그 붕어빵 장수들...
그럼 대체 꿈속의 그 붕어빵 장수는 뭘 의미하는 거지? 커다란 포크랑 식칼이라니...
.....아아아아!! 모르겠다. 이런 일들은 너무나 여리고 순수한 내게는 벅찬 일이야.
다이어리를 덮고 나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으니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른하니 잠이 몰려왔다.
방문 밖에서 엄마와 아빠가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시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오빠가 키보드와 마우스를 정신없이 두들기는 소리도 아른아른 들려왔다.
복잡한건 일부러 풀려고 애를 쓸 필요없어. 어머님 말씀... 마치 엉킨 실을 억지로 풀려고 잡아 당기면 더 엉켜버려서 오히려 풀기 어려워 지듯이...
차근 차근, 여유를 두고 바라보면서, 서로간의 일에 여유를 두고... 응... 하나씩... 서로간에 관계를 하나씩 시간이 흐르면서.... 풀면.... 중얼중얼....
토요일.
자그만치 그것도 노는 토요일. 놀토!!
...라고 해봐야 예비 고3이라고 자율학습이 있지만 후후훗....
나에게는 그딴것 신경쓰지 않는 비범함이 있지.
"저기... 나중에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지 않을까..?"
윤아가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아이스크림을 할짝 대며 말했다.
음. 5월이 곧 눈앞에 있다고는 해도 좀 더운 날씨인데. 나 역시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물며 말했다.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는 거야. 타인의 시선대로 살다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해. 알겠지? 자, 나를 봐. 또릿또릿한 눈 보이지?"
"응, 응? 응..."
"바로 이거라구.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아무도 나에게 시비 걸지 못해."
이것은 아버님의 가르침이지. 자신감에 차있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하면 감히 다른 사람이 시비 걸지 못하고 나를 따르게 되어있다는 것.
따라서 난 확고한 눈으로 자율학습을 빼먹고 시내에 놀러나오는 내 인생의 길을 개척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단 말야.
그리고 그 길에 불쌍한 내 친구를 끌어들인 것이지. 아, 물론 이 길은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는 선의 길로써...
"아, 나왔다, 나왔다."
사람들이 제각기 박수를 치거나 하며 길 한가운데로 나온 금발의 미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백인 남성은 멋드러지게 한팔을 들었다 내리며 인사한 후 들고 나온 기타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누구야..?"
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면서 말했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요즘 소문에 유명하더라구. 시내 명동에 나와서 기타도 치고 노래부르는데 잘생긴것도 그렇고 노래도 좋대."
나는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넣은 후 우물거리며 그를 보았다.
확실히 잘생기기는 했다. 영화배우 뺨치듯이. 요즘 왜 이렇게 잘생긴 사람들이 길거리에 널부러진 거지?
주위 남자들 시선을 보니 뭐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특히 커플들.
크흐흐흐... 솔로천국 커플지옥~!
"부드러운 해가 내려앉을 때, 속삭이는 달이 떠오를 때,
대지 위 깊은 그 곳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그 곳,
나는 날아올라 바라보네, 기억 속 그 곳을,
누구도 잊지못할, 그러나 이제는 기억되지 않는 그 곳을..."
와... 진짜 목소리 죽인다. (얘, 얘, 너는 그런식으로밖에 표현 못하겠니?) 어쩌면 사람의 목에서 저런 미성이 나올 수 있을까?
천사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목소리 일것 같다. 너무나 부드러운, 너무나 감미로운 목소리...
흔들림 없이, 그러나 듣는 사람의 가슴은 흔들리게 하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
발음이 불분명한 것도 아닌데도, 그 목소리 때문에 가사가 들리지 않을 정도다.
아니, 그리고 분명 외국인인것 같은데 한국말을 왜 저렇게 잘하는거지? 이 노래만 죽어라고 연습했나? 하지만 이런 노래는 처음 들어보는 걸. 이렇게 좋은 노래라면 방송에서 뜰 법도 한데.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이 크게 박수를 치며 앙콜을 외쳤다. 살짝 바람이 불며 그의 긴 금발을 흐트러뜨렸다.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로 답하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데 모아 묶고는 다시 기타를 잡았다.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이 아까 그가 내려놓은 모자에 돈을 넣었다.
"길거리 공연...? 언제부터 한거래..?"
윤아가 수줍게 그의 모자에 돈을 넣고 와서는 물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오래되지는 않았구, 올해 초부터..."
나는 들었던 소문을 생각하다가 그만 살짝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학교앞 붕어빵 장수가 나타났을때랑 시기가 비슷하잖아? 아, 왜 하필 그 재수없는 검은 머리가 생각나는 거냐구.
그때 노래를 하던 그가 이번에는 내쪽을 바라보았다.
딱히 의도해서 그런건 아니고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쳤던 건데 순간 그가 나에게 찡긋 윙크했다.
와! 깜짝이야. 심장이 두근거려서 터지는줄 알았어.
그렇게 영화배우 뺨치는 얼굴로 윙크하면 사람 놀라잖아. 나도 모르게 순간 신데렐라 스토리를 떠올려버렸어.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무것도."
후아, 후아. 순간 내가 공주님이 되어 왕자님이 멋진 궁전으로 날 데려간다는 그런 시덥잖은 상상을 했다고는 죽어도 말 못해.
"그러고 보면 요즘 참 외국인이 많아진것 같애.."
지나가는 은발머리의 꼬마를 보며 윤아가 말했다.
지금은 쇼핑중. 그래봐야 주로 사는 것은 나이고 윤아는 구경만하며 들러리만 설 뿐이지만서도.
나 역시 윤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쇼윈도에 서있는 마네킹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네킹 옆에 있는 작은 TV에서는 F.O.H.라는 세계적인 회사의 이미지 광고를 하고 있었다. 아, 이 가게 F.O.H.그룹 계열사였구나.
"그러게. 세계화라느니 어쩌느니 그래서 그런가..."
어느새 내 손에는 몇개의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뭐, 명품같은건 꿈도 못꾸고, 그나마 싸고싼 옷들 중에서 몇개를 산건데, 그래도 이렇게 들고 시내를 걸어다닐 때면 성숙한 여인네가 물씬 풍기는 어른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몇 개의 미니스커트를 꺼내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그걸보던 윤아는 혀를 조금 내밀더니 말했다.
"와 엄청 짧다. 레깅스 없이는 못입겠는걸."
"응? 아, 응..."
그러다 순간 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윤아를 발끝부터 쭉 훑어보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자, 이건 아무리 봐도 너에게 딱 어룰릴 것 같아."
"응? 나는 이런 것 못입어..."
"아냐아냐. 이 아이는 아무리 봐도 널 위해서 태어났어."
"나 교복말고 치마 같은거 안입는거 알잖아."
"요봐, 요봐. 색깔도 그렇고 이 모양새가 너의 다리에 딱 길고 어울리게.. 일단 입어는 봐. 입는다고 돈달라고 안해. 자, 자. 어서."
혹시 또 알아? 맨날 바지만 입고 다니는 윤아도, 이렇게 초미니한 스커트를 입다보면 걸핏하면 넘어지고 하는 산만함이 없어질지.
....오, 오, 잘 어울려.
지지배, 맨날 널널한 바지만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나보다 다리가 더 길어 보이잖아? 췟.
"나, 괘... 괜찮아...?"
"응. 흠... 한바퀴 돌아봐봐."
"이... 이렇게..?"
윤아는 초미니한 스커트 때문에 다리도 제대로 벌리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한바퀴 돌았다.
어, 같은 여자지만 솔직히 그런 모습이 귀엽다. 익숙하지 않아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두 볼도 그렇고.
...응 ... 응? 어, 나, 여, 여자라구. 그, 그런 취미 없단 말야.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솔직히 친구니까 그렇지, 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애들이 윤아를 보면 별난 애라고 싫어하지.
얼빠지고 멍하지, 말끝마다 살짝씩 늘어진 말투하며 산만해서 걸핏하면 넘어지는... 그런데도 이상하게 성적은 잘나오는 애!
그런데 말이지, 이상하게 이게 남자애들한테 어필이 되는 것 같단 말야.
이건 비밀인데, 알고 보니까 인터넷에 윤아를 추종하는 남자애들의 모임이 있더라구..?
물론 이건 비밀인데, 라고 하는 말은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어하는 말을 꺼낼때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둬.
어쨌거나 그 점 등등이 여자애들에게 미움을 사서 윤아는 전에도 곧잘 여자애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는 했던 모양이야.
그런 아이를 바로 내가! 이 몸이 구원해준 것이란 말씀이지.
올해 같은 반이 되어 알게된 윤아는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벗어나 내가 지금껏 잘 보살펴준 덕분으로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지.
아, 물론 뭐, 내성적이고 시키는 것을 군말없이 잘 들어주기에 부하로 삼기에는 그만인....
...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 아니야. 흠, 흠. 아무렴. 어디까지나 상부상조 정신으로... 에라이, 이러니까 꼭 내가 악녀가 된것 같잖아.
"어, 어라라? 어라라라..."
"에엣?! 윤아야, 조심..!"
아코... 쿵... 아무래도 안되겠다.
어머멋, 이 지지배가, 야, 너 지금 초미니스커트 입고있단것 잊었어?!
난 황급히 몸으로 그녀의 엉덩이 쪽을 가리며 (이상한 자세가 됐다!!) 황급히 잡아 일으켜 탈의실 안으로 집어넣었다.
"고마워, 민영아."
탈의실 안에서 쿵탕쿵탕 거리며 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날 쳐다보는 사람들을 휙휙 쏘아보아주었다.
다, 다시는 입히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
우리는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약간 길을 돌아 공원을 통과해 가기로 했다.
주말을 맞아 공원에는 많은 가족들과 연인들이(에라, 다시한번 솔로천국 커플지옥!) 나와있었다. 저 멀리 강아지를 좇아 아장아장어리며 뛰어가는 어린이의 모습이 보였다.
몇 마디 시시콜콜한 되도않는 말도 주고받으면서 공원을 걷다보니 금방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좇아 놀던 아이의 가족들도 짐을 싸며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아이가 더 놀자고 보채자 엄마는 아이를 안아들고서 다음에 또 나와 놀자고 달랬다.
나와 윤아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잠시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있잖아."
윤아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나 있지, 너한테 많이 고마워. 아주아주 많이많이. 나 무척 행복해."
"얘가, 갑자기 왜그래, 민망하게."
윤아는 아이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널 알기 전까지 나 무척... 슬펐어. 뭘 해도 제대로 할줄 아는 것 없구.. 툭하면 실수하구.."
"응, 응, 알았으니까, 스톱. 내가 원래 좀 한 인물 하잖니."
윤아는 베시시 웃었다.
"후후... 민영이는 참 재밌어."
"개그맨해도 되겠지?"
"응응! 개그맨!"
어... 얘는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나는 살짝 김이 빠져서는 물었다.
"그러고보면... 넌 앞으로 뭐 될거야?"
순간 윤아의 얼굴에 어둠이 스쳤다. 너무나 짙고, 너무나 깊은 어둠이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그 표정이 머리 속에서 이후로도 잊혀지질 않았다.
"응... 대학... 가고싶어..."
대학... 가면 되지. 너라면 충분히 갈 수 있잖아..?
"무슨 과로 가고 싶은데..?"
"가면... 대학... 나는..."
이봐, 이봐. 갑자기 그런 표정이 되어서는, 아, 에, 또, 이런, 화제를 돌려야겠군. 무슨 얘기를 하면...
"언니는 대학 가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두, 넌 공부하나는 잘하잖아. 내 성적은 말야, 엉망이라구. 뭐, 대학 가고싶어도 성적이 안따라줘서 말이지."
윤아는 갑작스럽게 발랄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약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말야, 난 장사나 할려구. 내가 이래뵈도 볶음밥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하거든? 그래서 볶음밥 전문점 하나 차릴려구. 뭐, 처음부터 가게차리고 할만한 돈은 안되니, 우선은 포장마차같은, 그니깐, 왜, 쪼끄만 트럭 위에서 음식파는거 있잖아, 그렇게 시작해서 할거야.그리고 나중에는 전 세계의 요리재료를 적절하게 섞은 다양한 퓨전!! 볶음밥 전문점을 할거란 말이지."
윤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곧 베시시 웃었다.
"그 볶음밥... 나도 먹을 수 있을까..?"
"물론! 당연하지! 너한테는 내가 특별히, 그래, 메뉴 이름은 '윤아를 위한 세레나데'라고 하지. 특별히 윤아를 위한 세레나데 볶음밥을 해줄게."
과장된 내 표현과 몸짓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잠시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사그러 들때쯤 다시 말을 꺼냈다.
"너는 하고 싶은 것 없어?"
"하고.. 싶은것...?"
"그래, 하고 싶은것. 누구나 하고 싶은 것 하나쯤은 있다구. 우리 아빠가 그러셨어."
"아빠..."
윤아의 얼굴이 다시 흐려질라 그래서 나는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하고 싶은 것! 아, 물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한에서 말이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야. 남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그 사람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잖아. 내 삶은 내가 사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다른 사람 시선은 잠시 접어두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져."
어, 나 조금 멋진 대사 한것 같지 않아? 물론 이건 아빠가 평상시 내게 이것저것 주입시킨 것이긴 하지만.
윤아는 뭐라고 조그맣게 몇마디 중얼 거리다 날 보며 미소지었다.
"고마워, 민영아.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얘는, 민망하게..."
정말 이 지지배는 소설속에나 나올 법한 말투나 구사하고 그래, 이런 징그러운 닭살 같으니.
해가 저물면서 인공호수위에 아름다운 붉은 물결을 만들어냈다.
붉은 빛은 사방으로 다시 반사되어 나무위에, 땅 위에, 다시 윤아의 얼굴위에 아름다운 빛을 뿌려대었다. 안그래도 귀여운 그녀의 얼굴이 더욱 귀엽게 도드라졌다...
나도 참... 미쳐도 제대로 미쳤나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왜 대체 침을 삼킨거지?!) 민망해져서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붉은 빛의 물결... 빛과 빛... 호수...
호수는 태양빛에 또다시 새로운 빛을 만들어내었다.
하얗고 눈부신... 그리고 네모난...
네...모난...?
난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윤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날 올려다보았다.
"민영아...?"
"도망가..."
"응...?"
"도망가야해!!"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멋도 모르고 얼떨결에 끌려온 윤아는 몇발자국 못옮기고 금방 넘어지고 말았다.
윤아는 무릎이 까졌는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영문을 모른채 나에게 칭얼댔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놀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그리고 그 네모는 여지없이 서서히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보니 마치... 문이 열리는 것과도 같았다.
심연의 어두움 속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리는 문...
눈부신데도, 온통 어두운, 그러나 나에게만 보이는 빛...
나는 얼굴을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