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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木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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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성 밖의 취보산(聚寶山)에 가면 유달리 매화
나무숲이 우거진 언덕이 나온다.
이곳의 이름은 매강(梅岡)이라고 하는데 우화대는
바로 이 매강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화대란 이름이 붙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내력이
있었다. 양무제(梁武帝)때 운광법사(雲光法師)가
이곳에서 경(經)을 읽을 때 하늘로부터 꽃비(花雨)가
가득 떨어졌다고 하여 우화대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우화대 주변의 경치는 절경(絶景)이 많은
금릉에서도 특히 아름다워 예로부터 천하의
명승(名勝)으로 이름이 높았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초경(初更)무렵.
우화대 앞에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크고 작은 두 개의 인영.
다름 아닌 엽단풍과 영호해상이었다.
영호해상은 막상 엽단풍을 따라 오기에는 했으나
우화대에 가까워 올 수록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혹시 그 흑상문신이란 늙은이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아닐까요?"
영호해상이 약간 겁먹은 얼굴로 쳐다보자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두려우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
아래 객잔에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그놈들을
혼내 주고 그리로 갈 테니."
영호해상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이곳에 있겠어요."
"왜 그러느냐? 내가 너를 떼어버리고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느냐?"
영호해상은 쌍심지를 돋우며 그를 흘겨보았다.
"꼭 그런 식으로밖에는 말을 못해요?"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 생각밖에는 안
드는걸 어떻게 하느냐?"
영호해상은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언젠간 꼭 당신의 그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쳐 주고
말 거예요."
"제길. 일전의 그 할망구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군."
엽단풍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영호해상은 급히 물었다.
"할망구라니요? 어떤 할망구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키는 난쟁이 똥자루 만하고 성질이 더러운
할망구가 있다."
"누군데요?"
"칠살파파인지 팔살파파인지 하는 할망구인데 처음
보는 사람 머리통 후려갈기는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지."
영호해상이 킥킥거렸다.
"그 할망구가 당신 머리통을 후려갈겼군요?"
엽단풍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 할망구가 십 년만 더 젊었으면 아주 쓴맛을
보여주는 건데....너무 늙어서 건드릴 데가 있어야지.
툭 치기만 해도 무덤 속으로 직행할 것 같아서 내가
참았다."
"호호...보나마나 당신이 그 할망구의 성질을 있는
대로 긁었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왜 처음 보는 사람의
머리통을 후려갈겼겠어요?"
엽단풍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왜 몰라요? 나도 가끔은 당신 머리통을 후려갈겨
주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런 제기랄....내 머리통이 무슨 동네북인 줄
아나? 보는 사람마다 후려갈겨 주고 싶게."
엽단풍이 이렇게 소리지를 때였다.
"웬 놈이냐?"
갑자기 싸늘한 폭갈과 함께 너 댓 줄기의 인영이
그들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난 신법은 표홀하기 그지없었다.
나타난 인영들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는데 하나같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렁치렁한 흑포(黑袍)를 걸친
앙상하게 마른 괴인들이었다.
폭갈을 내지른 인물은 그중 가운데 있는
흑포괴인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는 엽단풍과 영호해상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엽단풍의 어마어마한 체구에 약간
놀라는 듯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영호해상에게 향하자 전신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너는 혹시..."
그때 엽단풍이 주위가 쩌렁하게 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이 여자를 여기에
데려다 주기 위해 왔소."
흑포괴인은 다시 한 차례 영호해상을 살펴보다가
엽단풍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의 부탁이라니? 그게 누구냐?"
엽단풍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글쎄....그 사람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맞아. 당신처럼 새카만 옷을 입었어.
흑귀신(黑鬼神)이던가...?"
흑포괴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흑상문신을 말하는 거냐?"
엽단풍은 입을 쩍 벌리며 손뼉을 쳤다.
"맞아. 흑상문신. 바로 그런 해괴망칙한
이름이었소. 그 사람이 이 여자를 여기에 데려다
주라고 했소."
흑포괴인은 급히 물었다.
"흑상문신은 어디에 갔느냐? 그리고 왜 너에게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이냐?"
"흑상문신이 어디로 갔는지는 내가 천지신명이
아니라서 도저히 모르겠소. 그리고 왜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느냐 하면 그건 내가 흑상문신이 아니라서
도저히 모르겠구려."
흑포괴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내게 농담을 하는 거냐?"
엽단풍은 정색을 했다.
"농담을 하다니? 내가 농담할 데가 없어서 이
백리를 달려와 이곳까지 와서 하겠소? 당신 눈에는
내가 미친 놈으로 보이오?"
"그럼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 부탁을 받았단
말이냐?"
"바로 그렇소."
흑포괴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너는 흑상문신과 어떤 사이이기에 그의 부탁을
승락했느냐?"
"그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오. 굳이 말하면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나 할까."
흑포괴인의 눈꼬리가 사나워졌다.
"그런데 왜 그의 부탁을 승낙했단 말이냐?"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건 내가 너무나 양심적이고 선량한 인간이기
때문이오. 나는 아무리 낮선 사람이라도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오."
흑포괴인은 잠시 그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그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하나 엽단풍의
안색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어서 그가 지금 무슨
꿍꿍이속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가 없었다.
흑포괴인은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힐끗
영호해상을 바라보았다.
"너는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엽단풍은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동해 뭐라고 하던데...잘 기억이
안나는군. 아무튼 아주 특이하고 예쁘면서도 귀여운
이름이었소."
흑포괴인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여자는 동해인요 영호해상이라고 한다."
"맞아! 바로 그런 이름이었소."
"우리는 지금까지 저 여자를 찾고 있었다."
"아! 그렇소? 그거 정말 잘되었구려."
흑포괴인은 싸늘한 눈으로 엽단풍을 쏘아보다가
잘라 말했다.
"너는 용무가 끝났으면 그녀를 놔두고 가거라."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그야 가지 말라 고해도 나는 갈 거요. 그런데..."
흑포괴인의 눈빛이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워졌다.
"그런데 뭐냐?"
엽단풍은 공연히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흑상문신이라는 자가 그녀를 이곳에 데려다
주면 당신들이 사례를 할 거라고 했는데...."
흑포괴인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가 얼마를 준다고 했느냐?"
엽단풍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아니오."
"돈이 아니라고?"
"나는 원래 돈 같은 신외지물(身外之物)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오. 돈이라면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한들
내가 그런 해괴한 인상을 한 작자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 같소?"
흑포괴인은 점차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사례를 하겠다고 했느냐?"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이곳에 그녀를 데려다 주면 무슨 불상(佛像)을
준다고 했소."
흑포괴인은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불상이라고?"
"그렇소. 나는 원래 부처님을 공경하는 독실한
신자요. 그가 이곳에 오면 금불상(金佛像)을 준다고
했소. 하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지."
흑포괴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나 하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엽단풍은 사방으로 침을 튀기며 열띤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돈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인데 하물며
금을 탐하겠소? 그래서 안된다고 했더니 그 자가
그러면 금 대신에 나무로 만든 불상이라도 가져가라고
했소."
"나무로 만든 불상...?"
흑포괴인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엽단풍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목불상(木佛像)말이오. 그러니 빨리 내게
목불을 주시오."
흑포괴인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음성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냉혹한 살기로 뒤덮여 있었다.
"네 놈은 누구냐?"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아니 방금까지 얘기하고도 모르겠소? 나는
흑상문신의 부탁을 받고 저 여자를 ...."
그의 말이 채 반도 나오기 전에 흑포괴인의 눈에서
줄기줄기 끔찍한 살광(殺光)이 흘러나왔다.
"이곳에 와서 허튼 수작을 부리다니 죽으려고
작정을 한 놈이로군."
그가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그의 좌우에
있던 두 명의 흑포괴인이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엽단풍에게 쏘아져 왔다.
스으으...
그들은 그야말로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접근해 왔다.
그 신법은 지잠조월(地蠶操越)이라는 것으로
마도(魔道)의 최상승신법중 하나였다.
동시에 그들의 쌍수에서 칼날 같은 경력이 엽단풍의
전신을 향해 퍼부어졌다.
쐐쐐쐐쐐....
장력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마치 수십 개의 칼이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엽단풍의 몸이 그 예리한 장력에 갈가리 찢기려는
찰나,
돌연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하하...그까짓 나무 불상 하나 주는 게 아까워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내가 부처님을 대신해
당신들을 응징해 주지."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큰 것 같은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활짝 펼쳐졌다. 그 순간,
콰콰콰콰콰...
그의 손바닥이 수십, 수백 개가 되어 장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그야말로 거대한 폭풍 노도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막 엽단풍의 몸을 가격하려던 두 명의 흑포괴인은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린 채 몸이
굳어졌다.
콰콰쾅!
북치는 듯한 음향이 터져나오며 두 명의
흑포괴인들이 내갈긴 장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그들의 몸은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십
여장 밖으로 퉁겨져 나갔다.
"크아악!"
"으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어두워 오는 하늘을 뚫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두 흑포괴인의 몸은 피분수를 뿌리며 십 여장 밖을
날아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들이 절명(絶命)해 버린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남아 있는 세 명의 흑포괴인의 안색은 완전히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네...네 놈은 대체 누구냐?"
우두머리 흑포괴인이 떨리는 눈으로 엽단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엽단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방금 말했지 않소? 부탁을 받고 여자를 데려온
사람이라고."
흑포괴인의 입꼬리가 실룩실룩거렸다.
"이름이 무엇이냐?"
엽단풍은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어째 보는 놈마다 내 이름을 알고 싶어 안달을
하는 거지? 그러면서도 자기들 이름은 안 밝히니
버르장머리 한 번 고약하군."
말이 혼잣말이지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 흑포괴인은
자신의 귀에다 대고 소리친 것처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흑포괴인의 얼굴에 분노에 가득 찬 빛이 떠올랐다.
"미친 놈! 제법 한 수가 있다고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당신은 하늘 높은 줄 안단 말인가? 이것 참.
강호무림에 또 한 명의 천재가 나타나셨군."
흑포괴인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 남은 두 명의 괴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미친 놈!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건드린
이상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을 마라!"
이어 그들 세 명의 괴인들이 엽단풍을 향해
덤벼들려고 하는 순간,
"갈홍(葛洪)! 그 자를 들여보내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괴이한 음성이 들려
왔다.
2
그 음성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음성에 고저(高低)와 장단(長短)의 변화가 전혀
없이 일정했던 것이다.
대개 사람의 음성은 그 말하는 내용이나 상황에
따라서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은 굴곡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 들려 온 음성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기계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음의 높이도
일정했고 말과 말 사이의 간격도 똑같았다.
인간의 음성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 음성은 왠지 듣는 이의
마음을 섬ㅉ하게 하는 기이한 마력(魔力)이 담겨
있었다.
그 음성을 듣자 금시라도 엽단풍을 향해 달려들려
하던 흑포괴인들의 안색의 몸이 그대로 멈춰 섰다.
동시에 그들은 일제히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명(命)을 받들겠습니다."
그들의 음성에는 공포와 경복(敬伏)의 빛이
가득했다.
그들은 감히 그 자리에서 고개를 쳐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엽단풍은 그것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이 자들은 염라대왕이라도 본 것 같이
얼어붙었구나. 하지만 염라대왕이 나타났을 리는 없고
가짜 부처님이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세 명의 흑포괴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엽단풍은 돌연 영호해상의 손목을 잡더니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도저히 궁금해서 안되겠다. 안에 들어가서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지."
엽단풍은 영호해상을 끌다시피 하고 우화대로
올라갔다.
우화대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우화대는 매강의 중앙에 돌로 쌓아 만든 높고
커다란 대(臺)였다.
돌들은 오랜 풍상(風霜)에 시달렸으면서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우화대의 풍경을 한층 더
고풍(古風)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엽단풍이 영호해상을 이끌고 우화대의 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한 것이 두 개가 눈에
띄었다.
하나는 청의를 입은 사람이었는데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청의인은 간편한 무복(武服)을 걸치고 있었는데
나이는 대략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표정이
극도로 무심(無心)한 것 외에는 별로 특이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른 하나는 우화대의 가장 큰 위치에 서 있는
하나의 불상이었다.
불상은 얼핏 보기에 나무로 조각한 것 같았는데
우화대 아래를 굽어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엽단풍은 청의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 나무
불상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합장을 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이런 곳에서 부처님을 보게
되다니 이건 바로 나의 홍복(洪福)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영호해상과 청의인이 바라보는 가운데
정중하게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고는 히죽 웃었다.
"이 나무상은 정말로 정교하게 만들어 졌군.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하니 말이야. 그 흑상문신인가
하는 노인네는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그는 불상의 바로 아래까지 다가오더니 불상을
올려보며 연신 감탄성을 발하는 것이었다.
"저것 좀 봐. 저 입술하며 콧등...목 아래 있는
주름까지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같군. 대단치도 않은
부탁을 들어주고 저런 불상을 얻을 수 있다니 나는
정말 운도 좋아."
그는 금시라도 훌쩍 뛰어올라 나무 불상을 끌어내릴
태세였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말이 없이 서 있던 청의인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하는 천하광자 엽단풍이로군."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나를 아시오?"
청의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천석평에서 당신을 보았지. 당신이 이곳까지 온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것 참. 당신은 나를 아는데 나는 당신을 모르니
당최 대답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구려."
청의인은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담중업이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이 제보니 담형(譚兄)이었구려. 반갑소."
담중업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밝히시지."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오늘에만 벌써 서너 번 똑같은 말을
하는데....나는 흑상문신이란 노인네의 부탁을 받고
이 여자를 데려다 주러 온 거요."
담중업은 영호해상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엽단풍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살짝 입을
열었다.
"사실 당신이 바른 대로 말하든 말하지 않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엽단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하오?"
담중업의 무심한 눈에 차가운 안광이 피어올랐다.
"당신이 무슨 목적을 가졌든 일단 이곳에 온 이상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한다는 것이지."
엽단풍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조금전에 흑의인도 그런 말을 하던데 당신네들은
어떻게 입을 열 때마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하는
거요?"
담중업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단지 두 눈에 어린 안광만이 더욱 섬ㅉ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전에 보니 당신은 광도번천수(狂濤飜天手)를
익혔더군."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대단한 안목이오."
"단봉무영신법에 난화지, 거기에 광도번천수마저
익혔다면 능히 당금 무림에서는 최정상의 고수라 할
만하지."
엽단풍은 그답지 않게 겸손을 부렸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하지만...."
담중업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사이(邪異)하고 음독하기 짝이 없는
무시무시한 미소였다.
"그 정도로는 절대로 내 적수가 되지 못해."
동시에 그는 번개같이 우수를 내밀어 엽단풍의
목덜미를 잡아왔다.
그의 손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단지 빠를 뿐이었다.
엽단풍이 눈앞에 무언가 희끗한 것이 어른거렸다고
느낀 순간 어느 새 담중업의 우수는 엽단풍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속도는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엽단풍은 순식간에 목덜미를 제압 당한 채 어이가
없는지 눈을 멀뚱멀뚱 뜨고 담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중업은 우수로 엽단풍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뼈골이 시릴 듯 냉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무공은 그런 대로 쓸 만하지만 내
추뢰수(追雷手)를 당할 수는 없지. 엽단풍. 너는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담중업은 엽단풍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공력을
돋구었다.
한데 그가 막 엽단풍의 목뼈를 부러뜨리려는 순간,
돌연 목이 붙잡힌 채 멍하니 서 있던 엽단풍이 그를
바라보며 히죽 웃는 것이 아닌가?
"당신도 이렇게 쉽게 나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니었어."
말과 동시에 엽단풍의 오른 손이 담중업의 아랫배를
그대로 가격했다.
쾅!
폭음이 터지며 담중업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엽단풍은 쓰러진 그를 내려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추뢰수는 정말 빠르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군."
그때 바닥에 쓰러졌던 담중업이 천천히 일어났다.
엽단풍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신의 일격을 맞고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중업의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해 있었다. 더구나
입가로는 연신 시커먼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필사적으로 일어난 채 엽단풍을
노려보았다.
"엽단풍....과연 대단하군....내가 잘못 생각했어."
입을 열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시커먼 선혈이
흘러나왔으나 그는 추호도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나를 쓰러뜨리려면 적어도 이
정도로는 안된다."
담중업은 한 손으로 아랫배를 부여잡으면서도 다른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손이 조금씩 쳐들릴 때마다 벌떼가 몰려오는
듯한 음향이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엽단풍은 그의 손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가는
광경을 보고 나직한 탄성을 토해 냈다.
"혈옥수(血玉手)로군."
담중업은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비장한 표정을
떠올렸다.
"한 눈에 혈옥수를 알아보는군. 그렇다면 이것의
위력도 알고 있겠지?"
엽단풍은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문득 희미하게
웃었다.
"혈옥수라면 어쩌면 나를 다치게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혈옥수를 시전하고 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요."
담중업은 무표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다. 혈악의 고수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담중업."
어디선가 하나의 괴이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것은 음정의 고저장단이 전혀 없는 바로 그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듣자 담중업의 몸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괴이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담중업. 물러서라. 너는 그 자의 적수가 아니다."
담중업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한 차례 기이한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에 따라 그의 손에
떠올라 있던 붉은 기운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호해상은 그 음성이 어디서 들려 온 것인지
알아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 저 불상이에요. 저 불상이 말을 했어요."
그녀는 손으로 우화대 위에 있는 나무 불상을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엽단풍은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나무 불상을
바라보았다.
나무 불상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나 조금만 더 안력을 돋구어 살펴본다면
아무런 빛도 없던 나무 불상의 눈에서 한 줄기 기이한
신광(神光)이 이글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로 만든 불상의 눈에서 어찌 신광이 흘러나올
수 있겠는가?
엽단풍은 잠시 그 불상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히죽 웃었다.
"말하는 나무 불상이라....부처님의 영험함이
드디어 이곳까지 미쳤군 그래."
그때 나무 불상의 입술이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살짝 열리며 예의 그 괴이무쌍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을 제압 당하고도 공력을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은
천하에서 오직 하나밖에는 없지. 너는
경하기(傾河氣)를 익혔느냐?"
엽단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레? 과연 신통한 불상이로군.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무 불상은 얼굴 표정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눈에서 흘러나오는 신광이 조금 더 짙어졌을
뿐이다.
"본불(本佛)이 알기로 경하기를 익힌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자는 이십 년 전에 죽었지."
엽단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소? 그럼 나는 그걸 어떻게 익혔지?"
"본 불도 그게 의아스럽다. 그래서 지금부터 너의
내력을 알아볼 생각이다."
"어떻게 말이오?"
나무 불상은 아무 말없이 그 자리에 앉은 채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아무런 파공음도 일지 않았다.
그런데 엽단풍은 무언가 괴이한 기운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꽝!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엽단풍은 한 줄기 괴이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나무 불상은 한 차례 몸을 휘청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내공이 엽단풍보다 정심(精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 불상의 표정 없는 얼굴에 희미한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네 경하기는 구성(九成)수준이로구나. 당년의 그
자도 겨우 십성(十成)밖에는 오르지 못했거늘 그
나이에 구성이라니 과연 대단하다."
엽단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절정에 달한
목표음장(木杓陰掌)보다는 못하오."
나무 불상의 눈에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렸다.
"네가 어찌 본 불의 목표음장을 아느냐?"
엽단풍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목표음장이
목음지(木陰指)와 고목산수(枯木散手)와 함께 당신의
삼대절학중 하나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소?"
하나 그 말을 듣자 나무 불상의 얼굴에 처음으로 한
가지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 처질 정도로 끔찍한
살기, 바로 그것이었다.
나무 불상은 한동안 엽단풍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예의 무감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 불에 대해서 알고 있군."
"당신이 목불이라는 건 장님이 아닌 다음에야 척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니오?"
"본 불의 삼대절학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데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부처님의 영험함이 나의 머리를 일깨워 주셨소.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그런걸 알겠소?"
목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하나 다시 엽단풍을 쳐다보았을 때 그의 얼굴은
처음처럼 무표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십 년 전의 그
자와 관련이 있든 없든 너를 없애 버리면 그만이다."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소?"
"너는 경하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나 본데 구 성의
경하기로는 본 불의 손을 피하지 못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목불의 몸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3
그의 움직임은 몹시 특이했다.
여전히 두 다리를 결가부좌한 채로 몸이 허공으로
붕 뜨며 엽단풍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영대좌가(靈臺坐伽)로군."
엽단풍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날아오는 목불을 향해 두 주먹을 번개처럼
내질렀다.
쾌애액!
두 가닥 뇌전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그의 주먹은 무서운 위력을 동반한 채 목불의 몸을
금시라도 박살낼 듯 다가들었다.
목불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깡마른 오른손을 장난처럼
흔들었다.
수수수....
그의 주름진 손이 마치 수십 그루의 나무로 변한 듯
푸르스름한 광영(光影)이 장내를 뒤덮었다.
"고목산수로구나!"
엽단풍은 짤막하게 중얼거리며 내뻗었던 두 개의
주먹을 번개같이 회수하며 다시 아홉 권(拳)을
갈겨댔다.
첩첩이 날아오는 아홉 개의 주먹을 본 목불의
입에서 무감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구벽신권마저 익혔군..."
그는 피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신의 수영(手影)을
엽단풍의 권풍(拳風)과 격돌시켰다.
콰콰콰쾅!
그의 손과 엽단풍의 주먹은 연달아 허공에서 아홉
번이나 부딪쳤다. 엄청난 경기가 주위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엽단풍의 거구가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목불의 신형 또한 허공에서 멈춰진 채 한 차례
비틀거렸다.
하나 다음 순간 목불은 더욱 빠른 속도로 엽단풍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파파파파....!
그의 비쩍 마른 열 개의 손가락에서 열 가닥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지력(指力)이
우박처럼 퍼부어졌다. 바로 목불의 삼대절학중 하나인
목음지가 펼쳐진 것이다.
엽단풍은 물러서던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오른
손을 기이하게 구부려 세 개의 작은 고리를 만들어
냈다.
우우웅!
철비파수의 가공할 공력이 목음지력에 마주쳐 갔다.
까까깡!
목음지가 철비파수에 부딪치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엽단풍은 목음지에 격중된 오른손에 마치 예리한
송곳으로 찔린 듯 격심한 통증을 느끼고 안색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목불은 엽단풍의 코앞으로 다가들며
괴이무쌍한 일장을 갈겨댔다.
"이제 마지막이다!"
우우웅....
무언가 형체도 보이지 않는 노도와 같은 압력이
엽단풍의 전신을 향해 물밀듯이 몰아닥쳤다.
그것은 바로 목표음장이었다.
지금의 목표음장의 위력은 조금전 목불이
엽단풍에게 시전했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엽단풍은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이 자신을 금시라도
짓누를 듯 밀어닥침을 느꼈다. 그 압력이 얼마나
막중하던지 그의 흑의가 여기저기 갈라 터지기
시작했다.
엽단풍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목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움직이듯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하나 그에 따라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고오오...
그가 느릿느릿 내민 손바닥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쏟아졌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목불이 갈겨 낸
목표음장의 공세와 정면으로 격돌하고 말았다.
콰콰콰....
너무도 엄청난 굉음에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악!"
멀찌감치 떨어져서 조마조마한 눈으로 이들의
격돌을 구경하고 있던 영호해상이 충돌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십 여장 밖으로
날아갔다.
사방이 온통 움푹 파이고 돌덩이가 미친 듯이
허공을 비산(飛散)했다.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십 여장 밖으로 날아갔던 영호해상은 통증도 잊은
채 허겁지겁 장내를 주시했다.
"아....!"
그녀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내는 그야말로 완전한 폐허를 이루고 있었다.
중앙에는 깊이가 거의 삼장에 달하는 엄청난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 웅덩이의 중앙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가부좌를 풀지 않았던
목불은 앙상한 다리로 위태롭게 선 채 엽단풍을
응시하고 있었다.
엽단풍은 가뜩이나 봉두난발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곤두서서 그야말로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입가로는 가느다란 실핏줄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고 있는 흑의는 여기저기가 아예 먼지처럼
사그라져 피멍이 든 살갗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그야말로 낭패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목불은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입고 있는 빛 바랜 누런 가사(袈裟)도 그대로이고
얼굴 또한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괴이한
광망이었다.
목불은 기광(奇光)이 번쩍이는 눈으로 엽단풍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복마곤룡장마저 익혔을 줄은 몰랐다. 너는
그의 제자냐?"
엽단풍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아니라....아들이오."
목불의 몸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떨렸다.
"아들이라고...? 그럼 그가 살아 있었단 말이냐?"
엽단풍은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쓰윽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년 전까지만 해도 그 분은 분명히 살아
계셨소."
목불의 떨리는 몸이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네 성이 엽(葉)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그의
아들이었다니...그가 어찌 이십 년 전에 죽지
않았을까?"
"낸들 그걸 알겠소?"
목불은 한동안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엽철흔(葉鐵痕)의 자식 손에 죽는다면
결코 억울한 일이 아니지...! 엽철흔...너는 과연
대단한 인물이다!"
목불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다가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쿵!
쓰러진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광소를 터뜨리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는 비록 외상은 전혀 입지 않았으나 그의 내부는
이미 복마곤룡장의 엄청난 위력에 산산이 짓이겨진
상태였다.
엽단풍은 묵묵히 목불의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허리를 굽히며 피를 토했다.
"우욱!"
영호해상이 깜짝 놀라 그에게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당신..괜찮아요?"
엽단풍은 한 차례 몸을 휘청거리다가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영호해상은 다급하여 황급히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엽단풍....정신 차리세요."
엽단풍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힘없이 그녀의
품속에 누워 있었다.
영호해상은 철탑같이 강인하기만 했던 그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변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졌다.
"단풍...당신 정말...."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품속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엽단풍이 한쪽
눈을 살며시 뜨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놈은 갔느냐?"
영호해상은 그가 정신을 차리자 기뻐서 활짝 웃다가
급히 물었다.
"그 놈이라니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왜 그 있잖느냐? 담중업인가 뭔가 하는 녀석."
그 말에 영호해상은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과연 담중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갔나 봐요."
"보기 보단 약삭빠른 녀석이군."
엽단풍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품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호해상은 깜짝 놀라 급히 그를 불렀다.
"안돼요. 당신은 더 누워 있어요."
엽단풍은 그녀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누워 있으란 말이냐? 하긴...네
품속은 생각보다 한결 따뜻하더군."
영호해상은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화를 낼 겨를도
없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내상(內傷)이 심할 텐데 그런 농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엽단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상이라니? 다치긴 내가 왜 다쳐?"
영호해상은 어이가 없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과연 그의 안색은 혈기가 감돌고 탄력이 있는 것이
언제 피를 토하며 그녀의 품속에서 혼절(昏絶)했느냐
싶게 멀쩡하지 않은가?
그녀는 놀랍고도 의아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소리를 질렀다.
"이제 보니 당신은 조금도 부상을 입지 않았군요?"
엽단풍은 싱겁게 웃었다.
"아니 그럼 내가 그런 나무로 만든 불상 하나도
이기지 못할 줄 알았느냐?"
"하지만 아까는..."
"하하...그거야 담중업이란 놈이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까 잠깐 엄살을 부린 거지."
그제서야 영호해상은 그가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숨겼었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금전 그와 목불의 대결은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가공할 격전이었다.
엽단풍의 무공이야 그전부터 봐 와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목불의 무공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천하제일의 고수로
알고 있던 그녀의 할아버지조차 목불에게는 약간
뒤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고수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니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영호해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당신은 대체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지요?
그러다가 만일 정말 목불의 손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엽단풍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아까 목불이 내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손을 썼을
때 나도 그 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두었지. 그래서 그 자를 간신히 이길 수 있을 만큼만
실력발휘를 한 거란다. 조금도 위험한 게 아니다."
"하지만...왜 그런 짓을..."
"그거야 내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그
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지."
엽단풍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생각해 보아라. 내가 목불을 단숨에 해치워 버리면
다음에는 저 자들이 벌떼같이 덤벼들게 아니냐? 내가
비록 천하에 둘도 없는 고수라고 해도 목불 같은
고수가 서너 명만 덤빈다면 횡사(橫死)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저 자식들은 목불 만한 고수가 아직도
십 여명이나 있단 말이야."
영호해상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정말 그들에게 목불 만한 고수가 그렇게 많이
있어요?"
그녀는 목불 같은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엽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불은 혈악의 십대고수 중에서 가장 말석(末席)인
자다. 말 그대로 볼품없지."
"그러면 십대고수의 나머지 사람들은 목불보다
강하단 말이에요?"
"최소한 그보다 뒤쳐지지는 않지. 게다가 혈악에
십대고수만 있는 게 아니거든."
영호해상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대체 혈악이란 곳이 어떤 곳이길래 그렇게
절정고수들이 많아요?"
엽단풍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혈악은 무림사상 최강의 무인(武人)들로만
이루어진 집단(集團)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백여 년
전에 결성되었는데 그들 중 이류급에 속하는 인물들도
무림에 나오면 초절정고수로 군림하며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을 정도지."
영호해상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무림에는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요?"
"알려지지 않긴. 지금부터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강호의 명숙(名宿)들은 모두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혈악은 무림을 제패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거지."
영호해상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부림을 제패할 생각이 없다면 왜 지금 그들이 다시
나타나는 거지요?"
"이십 년 전에 혈악에 한 가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지. 그 뒤로 혈악도 변질되고 말았다."
영호해상은 귀여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난 사건이라니요?"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그 말을 하자면 하루 밤새 지껄여도 안된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내가 자세히 말해 주지."
영호해상은 잠시 알쏭달쏭한 표정이다가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 당신은 혈악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아요?"
"하하...그거야 부처님의 영험함이 내 머리를
일깨워 주셨으니까 그렇지."
영호해상은 입을 삐쭉거렸다.
"그 말은 아까 써먹었잖아요."
엽단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가? 그러면 산신령께서 정령을 보내
알려주셨다고 할까?"
"피. 그건 나한테 제일 처음에 쓴 말이잖아요."
"그럼 뭐라고 하지?"
엽단풍은 궁리를 하다가 손뼉을 탁 쳤다.
"그렇지. 그건 바로 천지신명께서 나를 어여삐
보셨기 때문일 거야. 틀림없어. 바로 그거다."
영호해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또 당신의 그 못된 버릇이 발동했군요. 말해 주기
싫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엽단풍은 억울하다는 듯 두 팔을 쩍 벌렸다.
"내가 왜 말을 안하느냐? 방금 말했지 않느냐.
천지신명께서 나를 어여삐 보았다고."
영호해상은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이런 거짓말쟁이."
엽단풍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너는 드디어 나의 가장 큰 비밀마저 알아
버렸구나. 이제 나는 무슨 수로 남을 속이지?"
그는 껄껄 웃으며 영호해상의 작고 귀여운 몸을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첫댓글 즐독
ㅈㄷㄱ~~~~~``````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잘밨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