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3.2.26) 말씀/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즐겁게 살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벌써 2월 마지막 주입니다. 다음 주면 3월 봄입니다.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가도 우리는 조급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는 늘 질문하며 살아야합니다. 인생을 단지 길이로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질과 내용이 길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길이로 따진다면 무드셀라보다 더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창세기 5장을 보면 당시대의 사람들의 나이가 나오는데 거의 900세를 넘습니다. 가장 적게 산 사람은 야렛으로 895, 라멕은 777세. 단명한 사람이 에녹인데 365세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가장 기억되는 사람은 300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입니다. 짦아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동물중에는 ‘찰스 다윈 거북’의 나이가 175살로 요즘 사람들보다 오래삽니다. 북극 고래는 200살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에게 밝혀졌습니다. 그렇다고 거북이 고래의 수명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한순간이라도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짧아도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있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년을 살아도 괴롭게 산다면 단 하루라도 행복하게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라 어떻게 살라고 합니까? 빌립보서 4:4을 보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다시 말하노니 반복하여 권면합니다.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행복하고 기뻐하며 즐겁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막상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현실의 처한 형편을 볼 때 주변을 볼 때, 가까이 가족들을 볼 때, 지구촌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 볼 때 즐겁게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속에 말씀에 대한 제동이 걸립니다. “하나님, 기뻐하는 것은 맞지만 항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제 형편이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기빠할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 맞습니까? 곤란하지 않습니까? 말씀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고, 항상 기뻐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항상, 절대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사랑도 배워야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도 배워야 하듯이 기쁘고 즐겁게 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울 때 저절로 되지 않고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고통을 감수하면서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즐겁게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즐겁게 춤을 추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깨달아야하고 삶을 즐거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일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와 따듯함, 굼 주림과 배부름, 죽음과 부활, 고통과 기쁨은 하나입니다. 하나만 취한다면 우리는 따듯함, 배부름, 부활 기쁨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잃어버린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른다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갖추었다고 해서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대에 사는 삶은 따듯한 것에 감사를 하지 못합니다. 헤럴드 에벗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식료품 점을 운영하다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백수가 되고말았습니다. 도시로 나가 새로운 일을 찾아보자 라고 결심한 그는 일단 여행 경비와 취업 자금응ㄹ 빌리기 위해서 은행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은행으로 가던 도중 애벗씨는 인생을 바꾸게 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경험하게되 었습니다. 그날 은행으로 향하던 그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였습니다. 잔뜩 풀이 죽은 그는 도대체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문득 건너편에서 한 명의 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롤러스케이트 바퀴를 단 작은 나무 받침대에 올라탄 채 손에는 나뭇가지를 들고 마치 배를 젓듯이 힘차게 달리며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애벗 씨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은 날씨가 참 좋네요." 그 남자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쳐흘렀습니다. 두 다리가 없는 불행함을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밝은 목소리였습니다. 애벗 씨는 생각했습니다. '이 남자는 두 다리가 없는데도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다 쾌활하고 자신감까지 넘치잖아. 그에 비해 나는 왜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던 걸까... 이렇게 나약한 소리나 하고, 풀이 죽어 있다니 한심해.'두 다리가 없는 남자에게서 용기를 얻은 애벗 씨는 도시로 나가 성공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이 경험을 평생 잊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말을종이에 써서 욕실 벽에 붙여두고 매일 아침 면도를 할 때마다 읽었다고 합니다. 그가 벽에 붙여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발이 없다'라며 풀이 죽어 있었다. 두 다리를 잃은 그 사람을 길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신발이 떨어지고 옷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마음껏 걸을 수 있는 두 발이 다는 것, 무엇이던지 잡을 수 있는 두 손이 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여전히 축복받은 사람이며, 희망의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이며, 할 일이 많은 사람인지 ... 한 사람은 신발이 없어서 불행했고, 한 사람은 두발이 없는데도 행복한 미소를 띠었습니다. 두발이 없는 사람을 보고 자기의 두 발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자인가 깨닫고 새롭게 살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항상 어떤 형편에서도 즐거운 삶을 살려면 두 가지를 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 행복과 불행 두 가지 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배워야하는 것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어절 수 없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겨라! 미래에 즐거움을 꽃 피우기 위해서 현재에 피땀 흘리는 인내와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땀 흘려 수고하는 과정도 즐거움의 일부라는 인식하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힘들지만 모든 예술 스포츠 선수들이 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메달을 따고 고난도의 기술을 익히고 세상에 보여줄 때의 기쁨을 위해서 현재적으로는 인내하는 과정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일 그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래 지속할 수 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목사님 들 중에서 제일 먼저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색소폰을 한다는 자체가 신기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피땀 흘리는 노력과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고 실력이 늘지 않으면 즐거움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 힘든 연습과정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계속하는 이유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면 힘든 훈련의 과정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것은 즐겁고 재미있게 살려고 하는 것인데...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일이 아니라 놀이를 앞에 두어야 한다. 가수, 의사 건축가, 음악가, 소설가 세일즈맨 무엇이든지 자기가 그 일을 좋아하고 즐겨할 수 있는 사람이 프로다. 무엇인던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이 품위 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다. 그 예로 음악 밴드 크라이인을 소개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록계를 달려온 펑크록의 최강자라고 합니다. 영어 이름을 해석하면 ‘호두가 운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호두가 우는가? 너무 배가 고파서 호두과자로 끼니를 때우며 집으로 가던 중 밴드 이름으로 생각해 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밴드 그룹이 책을 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무엇인가 철학적인 사고를 가진 음악 밴드임이 분명 합니다. 그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좋아한다면 까짓것 부딪쳐’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말 달리자가 그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책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비유를 맞추는 노래가 아닌 자기들이 좋아하는 펑크록 음악을 들고 세상과 부딪혀서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겨 하면서 소신 것 거친 인생살이를 살아간다면 성공 아니냐고 합니다. 성공은 돈이 아니라 소신적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단지 세상적 즐거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즐거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잃어도 즐거워할 수 있는가? 내가 지금 당장에 죽음 앞에 서도 감사하며 즐거워하며 세상을 떠날 수 있는가? 그런 즐거움이 진짜 즐거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아 8: 1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요즘 이런 즐거움을 이런 기쁨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사는 분이 있지요? 김재중 집사님! 지난 금요일 카톡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언제 부터인가? 이른새벽 눈뜨면 나의 영혼을 먼저 깨워주시고,기도의문을 여시고, 하루를 시작하고... 성경앞에 눈과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고 하나님과 예수님 생각하고 현재 나를 바라보며, 묵상하고.. 매일매일 제게 주신저의 삶을 걷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어느 때보다 이와같은 인생의 호황기를 누리는 제게는 정말 다시없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이 기쁨과 행복이 지치고, 방황하는 분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는 예수님께 인도하는 능력이 있기까지 저를 성장하게 하여주십시오. 건강이 약화 되어 죽음까지 체험한 사람이지만 그 처지를 넘어서 영혼이 고백하는 즐거움아닙니까? 주 안에 즐거움이 이런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 안에서 이런 속에서 울어나는 즉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려면 남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돈이 많지 않고 재물이 많지 않아도 주 안에 있다면 얼마던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 밖에서는 행복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그냥 껍데기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근본 문제를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죄 문제, 죽음 문제, 질병과 고통의 문제들...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받고, 치유 받고,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이미 세상을 이긴 자들이 되었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영생을 얻고 천하를 다 가지고 주를 보시거 사는 자가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그러니 주 안에서 우리는 당연히 항상 기뻐하며 즐겁게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소자를 섬기면서 소소한 작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우유를 배달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과거 신앙을 보면 많이 우울하고 어둔 삶을 살았습니다. 저 자신의 족벌 학력을 볼 때, 누가를 비롯해서 자녀들을 볼 때, 열악한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 사역을 볼 때 기뻐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굴도 무겁고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서 낙척적이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 그리고 그 행복을 나누며 사는 것이 삶의 철학 신앙 철학아 되었습니다. 이제는 말씀을 즐길 줄도 알고, 음악을 즐길 줄도 알고, 독서, 여행을 줄길 줄도 압니다. 인생을 그냥 의무적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캠퍼스와 교하밖에 몰랐던 사람이 이제는 우주적 마인들를 가지고 우주적 복음화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8월에는 우리 단체 목사님들 중에 아무도 꿈꾸지 못하는 이태리 돌로미티 로마 15일 세계 독서 트래킹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일볻도 갑니다. 간다고 하니까 디모데 선교사님 지금부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즐기면서 선교사님도 만나서 위로하고 힘도 주고 올 수 있습니다. 정말 즐겁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이렇게 즐거은 줄은 전에 미쳐 몰랐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즐겁게 살면서 관념이 아닌 진짜 행복의 복음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끝으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근거는 주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라면 아무리 행복해도 반쪽입니다. 이 행복이 흘러넘쳐서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아야, 나와 세상이 함께 행복해야 진짜 행복이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나누며 사는 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84년, 일본 도쿄에서 진행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한 무명의 마라토너 야마다 혼이치(山田本一)가 우승컵을 차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밀라노에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그는 또다시 금메달을 따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기자들이 비결을 묻자 그는 2년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머리로 달렸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도대체 머리로 달리다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비밀은 10년 뒤 선수생활을 은퇴한 그가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출발선을 나서면 선수들의 목표는 40k미터밖의 결승선에 걸린 깃발 이었습니다. 길고 긴 거리를 달리면서 선수들의 흥분과 긴장은 점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0km를 달리고 나면 이미 지쳐서 자신도 모르게 속도가 늦추어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야마다 혼이치도 고민을 하였습니다. 머리를 썼습니다. 목표는 크지만 실천은 작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표점을 작게 나눈 것입니다. 주변 도로, 건물, 상표, 나무 등등, 한 코스 한코스를 목표로 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력해서 달릴 수 있었고, 40km까지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재능 있는 선수도 아닌데 1등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점은 분명히 저 천국 맞습니다. 최고의 목표점입니다. 그러나 실천은 작게 잡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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