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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산악회 제282차 산행결과.
일시 ㅣ 2024년 07월 14일(일)
장소 : 경기도 남한산성
참가 : 조이산악회장 안형순외 51명
신규참가 : 28회 서민 40회 이승남 임진강
환영합니다.
간식 : 홍어무침 왕족발 파김치 막걸리
중식 : 개미집 닭 오리백숙 막걸리 소주
찬조 : 장원의 3만원 강경화 20만원 서민 20만원
협찬 : 성용호 산행과자셋트 55개
첨부 : 실시간 동영상 이미지 동문 산행기
만나서 반가왔습니다. 또만납시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2024년 07월 14일
재경조대부고 조이산악회 회장 안형순 배
실시간 동영상(1)
실시간 동영상(2)
실시간 이미지.
촬영 : 종종균 윤영동 문병국 치우 정동중 성용호 안형순 김광근 조삼훈 이기수 동문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이산악회 282차 남한산성 산행기
남한산성에는 나라가 망하고 항복의 더러운 역사가 흐른다. 아침 일찍 오늘의 산행집결지인 5호선 마천역으로 향했다. 역이름이 왜 마천역일까? 병자호란때 용마(龍馬)가 나와서 임경업 장군이 타고 출전하였다고 전하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천동이라 한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하여 있었다.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거하여 경기도 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 이 지역에 있던 자연부락 돌무더기ㆍ가운뎃말 등을 병합하여 마천리라 하였다.
위와 같이 동이름이 우리나라의 치욕의 역사인 병자호란과 관련이 깊다.청태종은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침략에 나섰는데 이전쟁이 병자년에 발생했음으로 병자호란 이라 부른다.
전쟁이 발생하기 전 동북아정세를 살펴본면 중국대륙의 명나라가 망해져 가고 있고 백두산에서 나라의 기원을 삼은 금나라의 나라를 세우고 나중에 청나라로 개칭한다.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해 1차 침입하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하니 이 전쟁이 정묘년에 발생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부른다.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 · 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조선에 대해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 · 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자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으고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은 인조는 당초 강화도를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오늘 오르게 된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했다.
한편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조선과 청의 군사적 대치는 청의 병력이 20만을 넘는데 반해 조선은 1만3000에 불과하니 전쟁은 하나 마나이고 경상, 충청 전라에서 올라온 근왕병은 남한산성에 도달하기도 전에 청군에 의해 격파된다.
남한산성으로 구원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성중은 안과 밖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차차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주화파(主和派)는 주전파(主戰派)와의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편 청군은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성안에 들어와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 · 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가 함락되고빈궁과 봉림 · 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이 청군에 의해 붙잡혔다는 소식에 조선의 조정은 망연자실한다.이윽고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蘊)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청에 항복하기로 한다.
홍서봉 · 최명길 · 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또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 · 마부태 등의 사신이 우리 성안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끝에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나라가 망하고 왕과 신하, 백성의 목숨이 없어져야 할 판국에 국가간 밀고 당기는 협상이나 협의는 애시당초 없고 일방적인 조건이자 명령이였다.
항복조건은 가혹하고 처참했다.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다섯째, 청이 철산가도(椵島, 椴島라는 설도 있음.)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여섯째, 성절(聖節) · 상삭(上朔) · 동지(冬至) · 중궁천추(中宮千秋) · 태자천추 · 경(慶) · 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올량합인(兀良合人) 여진족의 일파를 "올량합"이라고 일컫다가 이 말이 변해 '오랑케'로 변했다)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 (歲幣조선 시대에, 해마다 음력 10월에 중국에 보내던 공물) 를 보낼 것 등이었다. 드디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오늘 산행의 목적지 남한산성 서문으로 출성 (出城)하기로 한다.
조선 왕과 세자, 신하들이 항복하러 나오는 문이 남한산성 정문인 지화문이 아닌 서문으로 정한 것은 청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청의 명령인즉 "조선왕과 세자, 군신은 청에 항복한 죄인의 신세임으로 남한산성 정문인 지화문(至和門) 으로 출성할 자격이 없음으로 출성 할 때 서문으로 하라" 는 것이다.
오늘 서문에 오르는 길을 보라 서문으로 오르는 길이 지금처럼 돌계단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파르니 왕과 신하들이 내려오자면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굴러야 하는 험한 길이다. 2월 24일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친히 자신과 세자 대군, 신하를 이끈 어가(御駕)는 한강을 건너 삼전도로 향한다
이리하여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거행하게 돼는데 이 항복식을 보면 기가 막힌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인데 왕은 물론 세자 대군, 신하에 이르기 까지 "청태종을 향해 절을 세번 하는데 절을 할 때마다 이마를 땅에 찧을 때 이마 찧는 소리가 높은 항복단에 앉아있는 청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하라"는 것이다.
더러운 조선역사에서도 가장 더럽고 비참한 역사였다.나라가 망해 도망치는 왕과 대통령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까지 도망쳤고 이괄난 때 인조가 공주로 도망갔고 조선말 고종은 일본군의 등살에 못이여 엄씨의 도움아래 여자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망하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이라 한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발발해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었다는 급박한 비보를 받고도 "북진통일"을 외치다 전세가 악화되자 부산으로 기어내려간 이승만도 적군에 잡히지 않아 이런 굴욕의 역사는 피해갔다.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끝으로 청나라군이 철수하는데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청나라에 청(淸)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 뒤 중국 선양으로 끌려가 참형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세 명의 학사(學士)와 50만명의 부녀자를 잡아가 성의 놀이개와 노비로 살게 했다.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지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호곡 소리가 가득한 산성을 뒤로하고 하산해 내려가 기로 하고 항복을 하고 만다.인조가 청태종에게 나아가 “천은이 망극하오이다” 말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전한다.
결국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병자호란의 후유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청군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여성의 문제 또한 심각하였다.
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속가(贖價)를 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싸도 1인당 25~30냥이었고, 대개는150~250냥이었으며 비싼 경우에는 1,500냥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 빈민이라 속가를 내고 찾아올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이혼 문제가 조선의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 뒤부터 청나라의 남자와 잠을 잔 여자를 "환향녀(還鄕女)"라 부르게 되었다.(지금도 정조관념이 없이 아무나 섹스를 해대는 여자나 갈보를 일컬어 환향년이라고 한다) 비록 두 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미증유(未曾有) 의 국난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었고,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屈辱)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服屬) 되었는데, 이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10년에 걸친 볼모 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병자호란으로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일반백성들을 참혹(慘酷)하고 비참한 삶을 표현할 길 없다. 역사속에 교훈은 국가의 지도자가 전쟁 등 환란을 맞을 때 영리한 판단과 실용외교력으로 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는데 이미 망해져간 명나라를 섬기다가 망국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정묘, 병자호란 발생은 인조의 외교력 부실이 초래한 국란(國亂)이라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국제정세도 마찬가지다 동북아의 정세가 러시아 북한 중국과 한국 일본 미국의 동맹축으로 형성되 동아시아 상황이 극도의 불안정한 대립 상태이며 무식 무능한 윤석열정권이 북방외교 (北方外交)를 완전히 박살내고 러시아와 중국을 적으로 취급해 외교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경제적 손실은 물론 전쟁발발의 의험도를 높히고 있다.
오늘 남한산성 산행을 하는데 장마철이라 비가 내리면 어쩌나 노심초사 (勞心焦思)했는데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아서 안도감을 느꼈다. 이번 남한산성 산행에 참여한 선후배 인원이 무려 52명에 이른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데 조이산악회에 52명이 이룬 것은 조대부고의 단결력과 화합의 힘을 과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11회 안태호선배님, 13회 장원의선배님, 김원기 선배님 15회 정종수선배님, 안종윤 선배님 17회 곽종환선배님, 강성필선배님, 이종옥선배님 18회 양재만선배님 등 원로선배님께서 자리를 함께 해주셨다
바쁜 지방일정때문에 이번 산행에 참석하시지 못한 19회 박찬선 선배님께서 동문들께 아쉬움과 미안하다는 뜻을 전해 오면서 다음 산행에 꼭 참석하겠다고 하신다.21회 임정길선배님도 발목관절염으로 투병중이여서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의 뜻을 전해왔다. 임정길 선배님 쾌차하셔서 8월산행에 함께 하옵길 기원합니다.
25회 윤영동동문은 중적골골절로 치료중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산에는 올라가지 못하지만 한사코 참여해 점심을 같이 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성용호 사무총장 동기생인 40회에서 성용호사무총장,송종길,이승남,임진강후배님들이 참석해 주시니 대환영이고 조이산악회의 영광이다 오늘 산행 뿐만아니라 앞으로 열성적으로 참여해 주셔으면 간절한 바램이다.
조이산악회 깃발 아래 산행이 시작됐다. 산행의 길목에 장원의 선배님께서 나오셔서 선후배의 안전산행을 격려하시는 모범을 보이셨다. 바쁜 일정 때문에 ❤️ 산행을 못하시지만 조이산악회를 아끼고 동문들을 격려하는 마음을 마무리 칭송해도 부족할 것으로 본다.
때는 태양이 작열한 여름철에 짙은 녹색 숲 푸른잎이 태양 아래 빛나고 여름이 깊어감을 알리는 매미들의 자연 합창이 요란하다. 남한사성 서문을 오르는데 얼굴과 온몸에서 비오듯 땀이 흐르고 숨이 가파오른다. 조이산악회의 산행의 특징하나는 "홍어회무침에 파김치 막걸리 한 잔인 산행잔치다."
"형님 한잔! 아우 한잔!"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정겨운 장면은 조이산악회에서만 볼 수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남한산성 서문에 올랐는데 두사람 세사람, 여러사람들이 어울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일부는 남한산성에서 '수어청' 의 장수가 군사를 지휘했던 군사시설인 남한산성'수어장대(守禦將臺)'까지 오르는 극성을 보였다. 문화유산을 즐기려는 모습이 멋지고 자랑스럽다.
점심시간이 12시 30분으로 정해져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하산을 서둘러 내려왔다. 산행도 산행이려니와 점심시간이 조이산악회의 향연이다. "나주개미집"에서 열려 닭백숙에 소주 막걸리 맥주가 나오고 푸짐하고 맛있는 소찬이 일품이였다. 성용호사무총장님의 지휘아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시간이 왔다.
안형순회장님의 환영 말씀이 계셨다. "이 더운 여름철에 많은 동문님들이 나오셔서 너무 기쁘고 환영합니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 부디 건강하시라" 는 인사에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각기수별 참가현황 소개가 있었다.
11회 안태호선배님과 13회김원기선배님,장원의선배님에 이어 모범적으로 많이 참가한 34회 아우들이 만장의 박수를 받았으며 멋지고 잘 생긴 34회 휴배들이 자랑스럽다.
오늘 산행출발에 앞서 성용호사무총장께서 사비를 들여 참가자 전원에게 영양갱과 숙취해소제, 사탕봉지가 들어 있는 선물세트를 증정해서 입을 즐겁게 해 🌞 주시니 은혜롭다.
15회 정종수선배님께서
남한산성 산행을 독려하기 위해 60번째 참가등록하는 동문께 '사랑의선물'로 스니커즈 땅콩과자 24개를 내걸었는데 60번째 참가자가 없어 오늘 산행에 참여한 일부 동문들께 배포돼었다.
또한 정정수선배님은 유광렬선배님의 쾌차를 기원하는 묵념을 올리자고 제안해 조이산악회 전원이 기립해 쾌유를 염원하는 기도를 함께 했다.조이산악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병고와 투병중인 유광열선배님께서 쾌차하셔서 산행에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빌어본다.
또한 산행 찬조금도 답지해 24회 강경화동문이 20만원, 28회 서민이 동문이 20만원을 후원했다.귀한 성금을 후원해주신 24회 강경화동문님과 28회 서민동문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동문제위들께도 오래 기억하는 귀감이 될 것으로 본다.
다음 8월 산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성" 역사문화탐방인데 많은 내외국인들로 찾아와 성황을 이룬 곳으로 인기있기 있는 관광지이다.올해 신집행부가 출발하고 깜박했는지 교가제창이 없어졌는데오늘을 행사 말미에 "막히면 뚫어 더 막히면 더 뚫어" 로 시작해 교가제창을 힘있게 불렀다.
교가제창에 24회 강경화 전회장남께서 교가에 따라 '손풍금?'을 가지고 나와 연주했다.
그 준비성과 연주실력에 박수를 보낸다.오늘의 남한산성 산행행사를 준비하고 차질없이 진행해 주신 안형순회장님과 성용호 사무총장님의 수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높히 평가하고자 한다.
조이산악회 산행은 산을 오르기 위한 산행 모임만이 아니고같은 학교을 졸업한 동문들이 모여 학창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고 선후배간 사랑과 정을 나누는 어울림의 향연(饗宴)이 동문 제위님들께 행복과 행운이 함께 하옵길 간절히 빌어본다.
○ 글쓴이 김경준은 조대부고 22회 졸업생
편집에 협조하여 주신 동문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댓글주시면 편집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내는 좋아하는데 네가싫어하는 댓글은 한번 더 생각하여 보시고 올려주시면 동문들간에 화합과 단결에 많은 도움이 될것입니다.--- 편집자 15회 정종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