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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
민 6:22~26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요 2:24).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면 죽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삿 13:22).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천하만민 가운데서 구별된 제사장 나라라고 하였습니다(출 19:6). 이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삶을 사는 사람을 ‘나실인’이라고도 합니다(민 6:1-21).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얼굴이 그들에게로 향하는 특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 은혜를 베푸시는 얼굴입니다.
25절에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 얼굴빛의 광채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시 4:6).
1) 조명하는 빛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빛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1:5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나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빛의 근원자입니다(창 1:3). 빛은 의와 진리와 생명을 상징합니다(요 1:4). 한편 어둠은 죄와 마귀와 죽음을 상징합니다(엡 6:12). 성경은 예수님이 없는 세상을 마귀가 지배하는 어둠의 권세라고 하였습니다(눅 22:53).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의의 빛, 진리의 빛으로 조명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 9:2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고 하였습니다.
2) 치료하는 빛입니다.
말라기 4: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하였습니다. 의(義)의 태양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 하시고 빛을 지으신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창조 당시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빛을 보내셨습니다. 그 빛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빛이 되었습니다(요 1:4). 의학계에서 엑스 레이(X-Rey)나 레이져(laser) 광선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빛이 죽음 아래 있는 영혼을 치료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시 80:19).
3) 인도하는 빛입니다.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길을 여행하면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밤중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등불을 비춰 주시고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승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요 14:6).
2. 평강을 주시는 얼굴입니다.
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향하는 곳에 은혜가 있고 그 은혜의 결과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엡 1:2).
1) 평강의 근원지는 예수님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곳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평강을 잃었습니다. 창세기 3:8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고 그 결과 두려움과 불안이 지배하게 됩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찾아오셨습니다(사 9: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4:27).
2) 얼굴을 마주 대할 때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요 4:24). 그러나 신령한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마 5:8). 다윗은 주의 얼굴빛이 비춰지는 곳에 참된 기쁨과 평강이 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시편 4:6-7에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하게 됩니다(욘 1:3). 시편 73:27에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28절).
3)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평강이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한다는 것은 서로 눈을 맞추며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옛날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길을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그의 뜻을 받아 백성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3:11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4:10에도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마주하는 것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교통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관계라 하더라도 얼굴만 대하고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빌 2:5).
3. 보호하시는 얼굴입니다.
24절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였습니다.
1) 지극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세상 가운데서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신 7:8).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
하실 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으로 비유하였습니다(말 3:17).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한계가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이사야 49:15-16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때때로 시험을 당하거나 마음속에 회의가 밀려들다가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사랑의 체온을 의식할 때 새 힘을 얻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적극적인 손길을 의미합니다.
시편 121:5-6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이 마주하는 곳에 어떤 어두운 세력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밤과 낮의 구별 없이 항상 자기의 얼굴 앞에 두시고 지키며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32:10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1:10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이 너를 붙들리라”고 하였습니다.
3) 임마누엘의 축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예측 못하는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눈앞이 캄캄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게 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가족들을 먼저 보내놓고 자기만 혼자 남았을 때 하나님과 마주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환도뼈가 부러지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져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때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하며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습니다(창 32:30).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승리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김광일 목사 / 네게 복을 주시고 (6: 22-27)
조창인 작가는 본래 장래가 촉망되던 기자였습니다. 어느 날 취재한 사건이 잘못되면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이 수감된 감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한번은 두목이 그를 부릅니다. “너 교회 다녀?” “안 다닙니다.” “찬송 아는 것 있어?” “잘 모릅니다.” “그럼, 성경은 읽어 봤어?” “예, 성경을 다 읽지는 않았고 대학 다닐 때 서양 문화사 시간에 관심이 있어서 신약성경만 읽어보았습니다.” “그럼, 됐어. 오늘부터 예배인도하고 설교도 해.” 거절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시키는 대로 찬송 부르고 억지로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폭 두목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가 놀랐습니다.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저 사람이 나를 놀리나?” 그러다가 독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폭 두목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지적 교만으로 성경을 무시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아왔지만 이제 성경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나가자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시인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연루되었던 사건이 해결되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내와 같이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기자 생활을 못하고 작가로 나섰지만 실패하고 7년동안 반백수로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아내와 함께 믿음으로 극복하여 나갔습니다. 글을 쓰면서 매 순간 자신의 지적 교만과 한계를 고백하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작가로 변해 갔습니다. 그는 글을 쓰며 한계에 부닥칠 때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앞에 엎드려 능력을 부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10만의 독자를 붙여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 드러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기도하며 쓴 소설이 나오자 하나님께서 무려 150만 독자를 붙여 주셔서 베스트셀러가 되게 하셨습니다. 기도로 만들어진 그 소설은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낸 ‘가시고기’ 라는 작품입니다. 조창인 작가는 간증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매순간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의 축도를 통해 약속하신 축복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원하시며, 원하노라’ 라는 구절입니다. 즉 보호와 은혜, 평강은 우리들이 받기 원하는 축복의 내용이지만 본문에 보니 보호, 은혜, 평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하노라’ 의 시제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고, 지키고 계시고, 앞으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축복은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렇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원하시는 내용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지키시기를 원하며
랍비 시몬 벤 요하이(Simeon ben Yo?ai)의 제자 중 하나가 외국에 나가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질투했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을 데리고 골짜기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후 외쳤습니다. “골짜기여, 골짜기여, 금화로 가득 차 흘러라!” 골짜기는 갑자기 눈이 부시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돈이 탐나는 사람은 갖고 가거라. 그러나 지금 이 돈을 갖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실거야” 제자들은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어도 여호와께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유대인을 세계에서 뛰어난 민족으로 축복받도록 만든 것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의 필요를 따라 풍성한 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복의 근원자이십니다. 여기의 '지키다'의 히브리어 '솨마르'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 라는 뜻입니다. 즉 세심하고도 철저하게, 주의 깊게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 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부터의 보호까지 의미합니다. 향후 죽음의 땅 광야를 행진해야 하며 사나운 이방 세력과 맞부딪쳐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고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 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보호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이 없이는 한시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전적으로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눈동자 같이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지키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서로 축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베푸시기를 원하며
피터 하밀(pete hamill)의 저서 ‘행복의 노란 손수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플로리다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움츠린 주인공 윌리가 앉아 있습니다. 허름한 옷과 덥수록한 수염, 굳게 닫힌 입술의 그에게 한 소녀가 접근하여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윌리는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뉴욕 교도소에서 4년 동안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가 힘이 들까봐 자신을 떠나 새로운 삶을 택해도 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형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혹 나를 기다렸다면 내가 집에 가는 날 집 앞 떡갈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달라고. 하지만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노란 손수건을 달지 말아달라고. 노란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버스가 마을에 이르자 승객들은 손에 땀을 쥐며 떡갈나무가 보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환영의 깃발처럼 떡갈나무에서 춤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환영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와 봉사와 전도와 찬양으로 은혜 받은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고 못 드립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기의 '얼굴을 비춘다' 는 것은 사심이 없이 온 마음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친 감정이 없이 다가와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은혜'의 히브리어 '하난'은 '긍휼히 여기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크게 보면 크게 볼수록 신앙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작게 보면 주님이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할 때에 의로운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나는 부족하다' 할 때에 완전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잘난 것도 버려야 되고 못난 것도 버려야 됩니다. 가난해도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식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질병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시기를 원하며
25년 동안 출판계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다 심한 허리디스크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던 아내가 누워서 심심하니 책이나 읽으라며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특히 잠언을 읽으라고 펼쳐 주었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성경을 읽게 된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며 책을 많이 읽고 원고 교정도 하였지만, 별 감동이 없었는데 잠언서를 읽는 순간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잠언 8장 32절 “내 말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강하게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잠언만 읽은 것이 아니라 전도서도 읽고 시편도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자 더 이상 누워서 허송세월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참석하는 동안 낫기 힘든 허리디스크가 치료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면서 그는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를 위해서 일했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배운 것이 출판일밖에 없으니 문서 선교하는 출판사를 세우고자 계획하고, 규장 문화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경영이 어려워서 빚더미에 올라앉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나니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어려운 고비도 넘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양재동에 규장 문화사 사옥도 신축하고 베스트셀러를 많이 내어 흥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규장 문화사 대표 여운학 장로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평강의 ’샬롬‘은 안전, 건강, 번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쁨과 생의 환희가 샘솟듯 솟아오르는 역동적 평강을 가리킵니다. 평강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축복의 절정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평강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평강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죄와 불의를 멸하시고 그를 믿는 이들에게 억제할 수 없는 평강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모시고 사는 것이 평강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계속 지켜주시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마음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요, 그 복을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부디 서로 축복하여 보호의 복, 은혜의 복, 평강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