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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늘 행복하세요님
님은
오랜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질문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님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해 드림으로
님의 용기에 조금이나마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합니다
1. 먼저, 님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민수기 14장 18절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말씀과 33절 상반절에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 라는 말씀이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란 예레미야 31장 30절의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성경해석을 보면 출애굽기 20:5-6과 민14:18을 오해한 데서 생긴 것인데, 거기서 뜻하는 바는 어버이가 지은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가 지은 죄의 부정적인 결과가 자녀들에게 미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해석이 명쾌하게 이해가 안 되고 모호합니다.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제가 설교에서 듣기론 출애굽의 그 말씀은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에 비해 그렇게 비유한 것이므로 문자대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이 해석도 바른 것인지요? 반역한 결과로 1세대 이스라엘 백성이 두 사람을 제외하곤 광야에서 죽임을 당했지요. 그것에 비춰보면 18절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 답변 : 예레미야 31:30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인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는 에스겔 18:2에서도 보게 됩니다. 이곳에서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 말씀은 이스라엘 땅에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무뎌있다).”는 한 속담이 퍼져 있는 것은 왜인가?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그의 아들의 이가 감각이 없이 무뎌 있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속담이 정당한가? 옳은가? 라고 물음으로써 아버지(조상)의 죄가 그 아들(자손)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고 있는 구절인 에스겔 18:3-32에서 일관되게 하시고 있는 말씀에서 잘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 퍼져 있는 그러한 속담을 어느 누구도 입에 담지 못하게 하겠다며, 아버지의 생명이든 아들의 생명이든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죄를 짓는 사람 - 우상 숭배에 있으며 악행함 - 이 죽을 것이니 아들이 죽는 것은 자기 아버지의 죄를 대신 받아서가 아니라 자기 죄로 죽는 것이며, 만일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죄에 있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 받지 않을 것이니 그는 결코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에서 그 누구도 “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함께 짊어지지 않느냐?”라고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까닭은 죄를 지음에 있어 왔던 아버지와 달리 그 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올바르게 살아 왔다면 그는 살아남음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은 당사자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지, 아들이 아버지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같이 아버지가 아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의의 전가’ 또는 ‘의의 연좌’를 말하지 않습니다. 전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연좌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죄(의) 때문에 죽음(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선지자 에스겔은 비록 아버지가 악한 죄에 있으므로 죽음의 형벌을 당할 것이지만 그 아버지의 죄값이 그 아들에게 함께 묶이지 않을 것임을 전하면서 그러나 비록 죄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 죄를 회개하여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실 것임을, 그러나 그 아버지가 지은 죄에 그 아들도 함께 있다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로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해서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죽을 죄에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죽음에 있지 않도록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라고 말씀하여서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시고 있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시므로, 출애굽기 20:5-6에서는 “나를 미워하는 아버지들의 죄를 아들들 위에, 삼대 위에, 그리고 사대 위에 갚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인자를 천대까지 행할 것이다.”는 자칫하면 조상들이 지은 죄의 값을 그 후손들이 받을 것이며, 부모가 지은 죄의 값을 그 아들들이 받을 것이란 ‘죄의 전가’, 또는 ‘죄의 연좌’를 뜻하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혹자는, 님이 언급한 “어버이가 지은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가 지은 죄의 부정적인 결과가 자녀들에게 미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라고 한 바와 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아버지(조상)가 지은 죄 값을 그 아들(자손)이 받게 한다는 처벌의 의미가 아니라 부모가 지은 죄에 따른 영향력이 그 아들들에게 미친다는 것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가계 저주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부모의 죄에 따른 저주가 가계(家系)에 흐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20:5-6에서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하나님께서 물으셔서 그 죄의 값을 치르게 하는데 삼사 대 후까지 치르게 하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데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 자비를 베푸실 것이란 것에서입니다. 여기서 삼사 대 후까지로 말해지는 것이든 수천 대에 이르는 것으로 말해지는 것이든, 그 모두는 ‘영원성’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의 값을 삼사 대 후까지 지불하게 하시면 그 죄의 값을 치르는 사람의 집은 영원히 가문이 닫히는 멸문의 화에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참으로 길 것이란 것에서, 곧 영원성의 개념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것이지 아버지가 지은 죄의 값을 그 아들들 삼사 대까지 묻는다 라거나 아버지가 지은 의의 값을 그 아들들 수천 대까지 복을 베푸시는 것으로 갚으심으로 자자손손이 조상의 덕을 보고 누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는 죄의 영향력이 삼사 대에 미쳐 아버지<조상> 때문에 그 아들들이 죄값을 톡톡히 치르는 심각한 문제에 있게 되거나, 또는 의(복)의 영향력이 수천 대에까지 그 아들들<자손>에게까지 대대로 미쳐 아들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아들들 대대가 아버지<조상>가 의에 있었던 덕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복을 받아먹게 될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님이 제시한 민수기 14:18인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에서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아버지가 지은 죄를 그 아들들의 대에 이르기까지 들추어 내서 아들들이 아버지의 죄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신다’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하나님께서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오래 참으심에 계시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악과 허물을 보심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사랑에 있으셔서 한결같이 어여삐 아끼시고 그들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여 끊임없이 보살펴 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의 전가’ 또는 ‘죄의 연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그러한 것이라면 이 내용 앞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전혀 그러한 의도의 이야기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요 그것은 말이죠. 이 구절은 가나안 입성을 눈 앞에 두고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보내 멸한 후에 모세에게 그들보다 더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고 하심으로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어떤 일을 행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벌 받을 짓을 하였으면 그 아들들 삼사 대까지 그 벌을 내리실 것이라 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죄에 있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죄를 벌하심에서 이스라엘 백성 그 누구도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지, 아무도 하나님의 죄를 벌하심에서 벗어날 자가 없을 것인데, 만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벌하심으로 멸망을 당한다면 그것을 보는 애굽 사람들과 또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뭐라고 말할 것이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살펴 주셔놓고서는 이제와서 그들 모두가 광야에서 죽어나가는데 그들을 보고만 계시니 그들을 구원하실 힘이 없는 것은 아니냐고 조롱하지 않겠느냐는 것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해서, 민수기 14:18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에서,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죽음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애굽에서 죽는게 낫고 또한 이 광야에서 죽는게 낫겠다며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참으로 클 것에서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라고 하는 말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는 것에서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니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민수기 14:18과 출애굽기 20:5-6, 그리고 예레미야 31:30(또는 에스겔 18:2)은 전혀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성경 해석하여 설명<설교>하시는 분들은 이것을 오해하여 그릇된 이해에 의해서 왜곡되게 말하는 데다가 ‘가계 저주론’ 같은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엉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교회에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잘못된 신앙으로 미혹케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님은 이러한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잘못된 설명<설교>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의와는 다른 이해에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이제 님의 두 번째 질문을 보겠습니다.
님은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민수기 22:21-22에 관해서입니다. 22절에 발람이 감으로 인해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하지요. 20절의 말씀을 35절 상반절에 비춰보면 발람의 거짓말이 아닌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볼 때 22절의 상반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 답변 : 님이 읽은 민수기 22:21-22은 민수기 22장부터 시작되어 24장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짓 선지자 발람에 대한 이야기의 한 부분, 그러니까 일부입니다. 님이 제시한 성경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22:20절에서는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라고 하여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하는 모압 왕 발락의 청을 받은 발람이 모압 지도자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발람이라는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브돌’이라고 불리는 한 성읍에 사는 ‘브올’의 아들이다. ‘브돌’은 유프라데스 강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인 발람은 우상숭배에 있는 이방인으로서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런 그가 모압 왕의 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이 길을 떠남을 말하고 있는 22:21-22보다 앞에 있는 일인 22:20에서는 발람이 길을 떠나기 전인 발락 왕의 청탁을 받은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나타나셔서는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라고 일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5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 라고 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 구절은 그 앞에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진영으로 나아가고 있는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는 발람이 타고 있는 나귀가 가는 길을 막아 나섰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 설명은 민수기 22:22-35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에서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가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알고서 잘못을 빌며 이제라도 발길을 돌려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라고 하였으며, 그러자 발람은 모압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님이 의문을 품고 궁금해 하며 알고자 하는 것은 민수기 22:22절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청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가는 것을 하나님이 진노하셨는데 35절에서는 발람이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말하게 되는 것은 발람의 거짓말이 아닌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으로 보이니 이게 어찌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진노하셨는데, 어떻게 35절에서는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일러준 말을 하게 하시고 있는가 라는 것이죠. 해서 님은 “22절의 상반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님이여.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르는 대로 발람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한 말을 다루고 있는 곳이 민수기 23:7-10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발람은 말이죠 모압왕 발락으로부터 많은 재물<뇌물>을 받고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청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이스라엘 진영이 있는 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발람이 모압 왕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한 것은 그가 재물에 욕심이 많은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발람에 대해 크게 진노하시고 그의 길을 막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 길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으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서 발람이 탄 나귀를 막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귀를 막자 나귀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나귀가 왜 더 진행하지 못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나귀만 애꿋게 채찍질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하게 하여서 발람이 자신을 때리는 것에 대하여 부당함을 말하게 한 후에 그래도 발람이 깨닫지를 못하자 발람의 눈을 밝게 하여서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분이 여호와의 사자임을 비로소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을 하고자 하는 발람의 입을 어거하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닫게 하시며 대신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을 하도록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르는 대로 말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해서, 민수기 22:22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발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신 것과 민수기 22:35에서 그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는 말만 하게 하신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22:35에 따라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한 말은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게 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발람을 향하여 크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대로 발람을 놔두지 않고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고자 의도하신 대로 발람이 말을 하도록 그에게 할 말을 주심에 따라서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제 님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창세기 39장에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요셉에게 쓰인 "형통"이란 말은 "찰라흐"(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뤄져가는 삶,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신이 목적한 목적지 까지 가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흔히 번영을 일컽는 "셀라흐"완 다르다구요. 그렇다면 39장 3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찰라흐)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말씀이 있지요 그것을 본 사람이 "그의 주인이"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주인이 찰라흐의 의미 즉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 답변 : 창세기 39장은 님이 말한 바와 같이 요셉의 이야기인데,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성실함을 주인에게서 인정을 받아 집안 일뿐만 아니라 집의 재산 관리까지 맡아 일하는 중에 겪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2-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여기에 보면 요셉의 주인이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님이 질문하는 것에서 말한 단어인 ‘형통’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가 님이 말한 대로 ‘짤라흐’(jl'x;)입니다. 이 단어는 ‘앞으로 나아가다’, ‘발전하다’, ‘번영하다’, ‘형통하다’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통하다’는 뜻은 여러 뜻 중에 하나입니다. 님이 ‘번영’의 뜻을 지닌 것으로 말한 단어인 ‘솰라흐’(jl'v;)도 ‘퍼뜨리다’, ‘내뻗다’는 것에서 ‘번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짤라흐’도 ‘번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성경에서의 이 단어를 우리 한글성경은 ‘형통’의 뜻으로 번역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형통’을 단지 ‘번영’, ‘발전’의 뜻에서가 아닌, 이것은 님이 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뤄져가는 삶,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신이 목적한 목적지 까지 가는 것”의 개념적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의 뜻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케 하셨으며, 그래서 요셉이 하는 일마다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이 마음에 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는 일 모두에서 그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며,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침으로 인해서 보디발은 요셉을 크게 신뢰하여 신임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이 일을 잘하지 못하면, 그래서 문제를 일으키면 보디발이 그를 신뢰할 수 없으며, 그러한 요셉을 신임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요셉의 주인 보디발은 그 요셉에게서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복 주심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혜택은 고스란히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이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해서 요셉에게서 그 처지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비록 요셉이 주인인 보디발의 신뢰와 신임을 얻고 있다지만 이는 보디발이 그를 통해서 자기 집이 잘되고 있다는 자기 집의 번영을 보기 때문일 뿐입니다. 정작 요셉 자신은 그대로 보디발의 종<노예>으로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하는 것은 요셉의 주인으로 있는 보디발의 집이 잘되는 번영에서 보는 형통이겠는지요. 아닙니다. 요셉이 형통하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에서 쓰이고 있는 말이며, ‘요셉이 하는 일’ 모두에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대로 요셉의 삶<인생>을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형통한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그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결과로 큰 죄인이 갇히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되며, 거기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는 것이 요셉이 형통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이 감옥에서 만난 이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하여 주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된 후에 요셉의 청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음으로써 계속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 있는 것이 요셉이 형통하는 것이었으며, 후에 애굽 왕 바로가 꾼 꿈을 인하여 비로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 내어 왕에게 요셉을 이야기함으로 요셉이 마침내 바로 왕 앞에 나아오게 된 것이 요셉이 형통한 것이었으며,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하는 것을 통해서 바로 왕 다음 가는 권세가 있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 풍년과 7년 흉년의 때에 애굽을 다스리는 것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과 그들의 재산이 애굽 왕의 것이 되는 것이 요셉이 형통하는 것이었으며, 이 일을 통해서 야곱의 가족이 요셉을 만나게 되어 애굽 땅으로 들어오게 됨으로써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에서 400년 동안 객이 되었다가 4대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 후손이 올라오게 되는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될 것에 있는 것에서 요셉의 형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39장에서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하였다는 것에서의 ‘형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셔서 이루실 일을 위하여 요셉을 통해서 하실 일의 정하심대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진행하여 나가시는 되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요셉에게서 말해지고 있는 ‘형통’이란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심에서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렇다면, 님이 질문한 창세기 39:3에 “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짤라흐)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말씀이 있지요 그것을 본 사람이 ‘그의 주인이’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주인이 ‘짤라흐‘(형통)의 의미, 즉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요?” 라고 물은 것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형통(짤라흐)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는 말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말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라고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면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해 나가고자 하시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뜻하신(작정하신) 바대로 이루어지더라.”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단어가 창세기 39장에서 보게 되는 ‘형통’이란 단어입니다.
4. 이제 끝으로, 위 질문과 함께 가진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을 드 립니다.
님이여.
님은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주셨기에 성령의 조명을 통해 충분히 깨닫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소원하는 바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그분의 마음, 그분의 존재. 그런데 가끔 설교를 듣다보면 ‘원문으로는 이렇고 이런 뜻으로 되어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원어를 모르는 저 같은 사람은 깊이 있게 성경을 깨달을 수 없는건가? 란 낙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전 늘 갈급함이 있어 설교를 많이 듣는 편인데 궁금점이 있으면 물어볼 때가 없는 게 너무 속상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그런 부분들을 채워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알기에 충분하고 충족된 진리라고 하는 것이며, 명료하고 명확하게 그 뜻을 드러내시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님이 설교를 듣는 중에 가끔 ‘원문으로는 이렇고 이런 뜻으로 되어있다’ 라고 하는 말을 들은 것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만일 그렇게 원문을 들먹이며 그 뜻을 설명하는데, 이것이 바른 해석에 의하여서 설명을 제대로 해 주는 것이라면 님은 참으로 감사하셔야 합니다. 왜나하면요. 우리가 소유하여 읽고 있는 번역성경은 때로는 원문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를 단어적인 의미에서나 문맥적인 의미에서나 충실히 번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꽤나 있는데다가 정작 원문에 의한 번역은 잘 되었는데 그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며 설교<설명>하는 분들이 여기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되게 설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 속에서 성경 원문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충실히 설명해 주시고 있다면 이는 님이 수고하여서 알아야 할 것을 덜어주는 일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번역성경이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진리(원리)에 미흡하고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한글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진리를 알기에 번역이 대체적으로는 아주 잘 된 것이며, 이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알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오나, 그 드러난 구원의 뜻을 보다 온전히, 그리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번역성경을 교정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보다 번역이 잘된, 그래서 보다 나은 번역 성경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되기까지 설교자에 의해서 성경 원문의 의미가 바르게 번역되고 해석이 된다면 참으로 좋은 일일 것입니다.
헌데, 우리네 주변 교회에서 되어지고 있는 설교의 상황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본의에서 멀어져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본의와는 거리가 먼 설교가 되어지고 있는 형편이며, 이는 성경 본문(원문)에서 알게 해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로만 채워져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우리네 교회적 상황 속에서 성경 본문(원문)이 지니고 있는 뜻을 잘 드러내서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해 준다면 얼마나 바람직한지요. 하지만 님은 그러한 성경 원문을 누구나 쉽게 대하고 읽으며 그 뜻을 해석할 수 있지 않다는 것에 과연 그러한 것이 옳은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 원문에 사용되고 있는 글이요 말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아는 사람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이러한 과정을 마친 목회자 말고 성도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님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염려에 있지 않아도 됩니다. 님이 여건이 되고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고 님이 의욕이 있어서 성경 원문에 사용된 글과 말을 배우고, 그래서 성경 원문을 알아가려고 한다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교회의 선생으로 있는 목사님(설교자)를 통해서 바르게 번역되고 해석된 설교를 들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는 성도를 섬김에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침으로 봉사의 일에 있는 그분들이 해야 할 일이며, 님은 그분들의 수고를 통해서 도움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어를 모르는 저 같은 사람은 깊이 있게 성경을 깨달을 수 없는건가? 란 낙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전 늘 갈급함이 있어 설교를 많이 듣는 편인데 궁금점이 있으면 물어볼 때가 없는 게 너무 속상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그런 부분들을 채워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라고 하였으나, 님은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님이 하실 일을 목사님(설교자)이 잘하시면 되는 것이며, 님은 잘 가르침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님이 아닌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원어를 가르친다고 하는 분들의 태반이 성경 원어를 자의적으로 엉뚱하게 자기 마음대로 풀어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는 성경 원문의 단어를 가지고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문장과 문맥을 무시하고 단지 단어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멋대로 해석하여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럴 경우, 성경 원어를 가르치는 분들에 의해서 매우 잘못된 성경 이해를 갖게 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오니, 성경 원어를 가르치고 말하는 자들을 무조건 신뢰하지 마시고 참으로 주의하고 경계하여서 살펴야 합니다.
님은 “제가 현재 읽고 있는 성경은 대한성서공회 관주/해설 성경전서(개역개정판)입니다. NIV와 쉬운성경과 같이 보고 있지요. 표준새번역 성경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이 번역성경을 여러 한글, 영어 등 다양하게 보고자 하시는 것은 잘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주/해설은 추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며, 의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러한 성경에서 해설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성도에게 결코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으로서는 성도들이 성경을 보는 눈을 감기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해설이 붙어 있는 성경 보다는 해설이 없는 성경을 보실 수 있기를 바라며, 혹 성경 해설이 필요한 경우는 이에 관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좋은 책을 통해서 보실 수 있기를 권합니다.
한편, 님은 “성경을 읽을 때 도움 될 만한 책이나 문헌 있으면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주석은 아직 원치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석은 원치 않는다고 하셨으니 놔두구요. 성경을 읽을 때 도움 될 만한 책이나 문헌을 추천하여 달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제가 성경 각권을 추천해 드리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대략적으로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요즘 나오는 책에서 복음서에서 속한 책으로는 ‘헤르만 리델보스, 오광만 역, 마태복음, 여수룬’(이것은 주석에 속한 것이지만 성도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기에 소개합니다)과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선교회’, ‘김홍전, 예수님의 행적(1-10), 성약출판사’(이것 외에도 많이 출판되어 있습니다)를 비롯해서 기독교 서점에 가시면 앞에서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소개했듯이 ‘(마태복음, 시편, 에스겔 등 등)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보시기 바라며, 또한 도서출판 대장간에서 출판되는 책들과 도서출판 깔뱅에서 출판되고 있는 CNB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책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책을 보는 안목을 가지시게 되면, 무엇보다도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면, 님 스스로 책의 좋고 나쁨을 책의 제목과 목차, 서언 등을 통해서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하여간, 님 자신께서 책을 좋고 나쁨을 분별하며 보도록 하셔야죠. 제가 몇 권을 소개하기는 하였습니다만, 제가 추천하여서 이것이 님에게도 참으로 좋을 것이라고 하거나 또는 이 책은 나쁠 것이라는 책의 좋고 나쁨을 가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제 입맛에 맞아 제 입맛대로 추천하는 것에 님이 맛보게 할 수는 있습니다만 제가 즐겨 먹는 음식을 님 또한 즐겨 드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소개하는 것으로 소개받은 사람에게로부터 그 책의 좋고 나쁨의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님께서 다양하고도 좋은 책들을 두루 섭렵하시는 중에 서점에 가시면 님 자신의 마음이 가고 손이 가는 책들이 있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님이 주님께 가진 믿음의 부요를 이룰 수 있는 지혜의 풍성함에 있을 수 있기를 위해서 성령님의 은헤를 구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해가 부족한가봐요.. 첫째 답변의 4번째 문단에서" 출애굽기 20:5-6에서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하나님께서 물으셔서 그 죄의 값을 치르게 하는데 삼사 대 후까지 치르게 하신다는 것이요"라고 답하셨는데 제가 질문한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라는 말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요ㅠㅠㅠㅜ. 두번째 답변 5번째 문단의 내용은 제 질문을 오해하신듯 합니다. 제가 질문한건 20절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발람이 22절의 행동을 취하것이라면 왜 22절에 "그가 감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셨는가에 대한 것이였습니다. 35절의 상반절 내용은 20절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보아 "가라"는 명령이 발람의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 명하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발람은 말이죠 모압왕 발락으로부터 많은 재물<뇌물>을 받고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청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이스라엘 진영이 있는 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발람이 모압 왕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한 것은 그가 재물에 욕심이 많은 까닭" 이라 하셧는데 벧후 15-16에도 그렇게 나오지요. 저 역시 그게 궁금했는데 발람이 저주하러 간다는 것을 본문이 얘기하고 있는것인지요? 그렇다면 발락의 저주청탁에 대한 발람의 답변은 (18절, 38절) 진실한 게 아닌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