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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에 엘레이손
시편 123:1-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이다. 오늘 갑자기 날이 쌀쌀해 졌다. 점점 대기가 차가워지는 것은 겨울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예후이다. 얄팍한 달력은 한해의 끝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다.
이젠 누구나 겨울을 준비한다. 겨울은 난방비로 생활비가 많이 들어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노약자들에게 훨씬 힘겨운 계절이다. 새벽기도회에서 돌아오면서 출근길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본다. 초여름의 아침과 늦가을의 아침은 참 다르다. 이미 밖이 환한 여름철은 출근길 표정이 마치 금요일 아침 같다. 그런데 아직 출근길이 컴컴한 늦가을에는 그 표정이 항상 월요일 아침 풍경이더라.
날이 추우면 누구나 따듯함을 찾게 된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누구나 영혼의 등불을 찾게 된다. 저마다 자기만의 등불을 하나씩 마련하기 바란다. 내 밖을 비추어주고, 내 안을 밝혀 주는 그런 등불이 꼭 필요하다.
한 해를 돌아보고, 나를 돌아본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위기가 참 많았다. 사드, 미사일과 핵, 군사훈련. 늘 전쟁타령으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끝없이 뉴스거리가 되는 적폐들, 아직 갈 길이 멀다. 속히 이 민족이 모두 함께 감사제를 드릴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또 우리 자신도 내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감사와 기쁨의 결실을 마음의 창고에 갈무리하길 바란다.
1)
시편 123편은 순례자의 노래이다. 한 순례자가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성전을 방문하였다.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그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순례의무를 지키기 위해 왔을 테지만, 성전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듯하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모두 열다섯 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란 제목이 붙어있다. 순례자의 노래이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참 다양하다. 감사와 가정의 행복이 있고, 찬송과 간절한 소망도 있으며, 깊은 아픔과 원망으로 깊은 탄원도 있다.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와 노래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를 그 실례로 보여준다.
이제 한 순례자가 하나님께 나아왔다. 그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한다. 그는 자신과 자기 민족을 괴롭게 하는 자들의 비웃음과 멸시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대개 ‘내’가 주어다. 늘 내 문제, 내 사정, 내 소망이 우선이다. 거창하게 국가의 위기와 민족의 소망에 대해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시편 123편은 다르다. 기도를 보면 1절에서는 기도의 주체가 ‘나’로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로 바뀐다. 즉 개인의 탄원시에서 공동체의 탄원시로 변화한다. 마치 대표기도가 우리 모두의 간구를 담아내는 것과 같다. 그는 마치 자신이 백성의 대변자나 되듯 하나님께 간구한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나는 내가 중보하려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시는 바벨론 포로로 사로 잡혀 간 사람들의 아픔을 담고 있다고도 하고, 포로에서 귀환한 느헤미야 시대에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담고 있다고도 한다. 겨우 4절이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모두 담아낸다.
여기 기도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러 온 순례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오는 사람을 대표하고 있다. 마치 홀로 임금님과 독대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고,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고 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고대 근동에서는 눈, 곧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였다고 한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신분의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호의의 표시였다. 눈을 맞추는 일(Eye to Eye)은 신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내가 눈을 든다’는 표현은 강한 신뢰를 나타낸다. 기도를 드리는 순례자의 시선은 절실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자의 시선은 얼마나 간절한가? 순례자는 인생의 고단한 길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였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그는 자신을 긍휼히 여김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주님을 향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는 행복하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감히 자신을 불쌍히 봐주실 분을 쳐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세상에, 어디 감히 지존하신 분의 얼굴과 마주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삶의 근원적인 것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내 인생의 제자리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를 가엾이 여기실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긍휼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얼굴을 쳐다 볼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축복의 의미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
2)
사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당장 나한테는 기댈 데가 있고, 의지할 데도 많기 때문이다. 집 안 친척 중에 순경 한 사람만 있어도 든든하던 시절이 있었다. 만약 믿음을 지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의심스럽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신앙적 결단이다.
교회의 전통 가운데 키리에(Kyrie) 송이 있다. 기도를 하는 사이사이에 이 기원문을 반복하거나, 노래로 부른다. ‘키리에 엘레이손’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이 기도는 늘 가난한 마음을 품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불쌍한 고아가 된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 하나님만 붙잡게 된다.
대체로 현대인의 위기는 당장 물질적인 기반을 상실하는데서 온다. 갑자기 직장을 잃거나. 건강을 잃거나, 누군가를 잃거나, 관계가 깨지거나 할 때 얼마나 두려운가! 마음에 불안과 걱정이 들이닥치고, 삶의 질이 뚝 떨어진다. 그동안 편안하고 편리하게 살 때는 몰랐는데, 이젠 모든 것이 벽처럼 느껴진다. 사람도 두려워지고, 도전도 쉽지 않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동안 물질을 더 많이 얻는 문제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다보니, 더 소중한 삶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 사실 위기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은 채, 표류하는데서 온다.
이제 기도하는 순례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의 손을 지켜본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시인은 순례자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실감나게 설명한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기도자는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 간절함이 마치 종들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것 같고, 여종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위로부터 오는 긍휼을 기대하는 모습이다. 그는 취한 마음과 자세는 예배자의 모습이다. 어디서 드리든 기도는 일상에서 드리는 예배와 같다.
우리가 기도자가 되는 까닭은 하나님의 손 안에 해결의 방안이 있기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은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고, 무엇을 공급해 주고, 보호해 주며, 판단도 하고,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 손이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사람은 기도할 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만한 존재이고,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할 존재임을 아뢴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힘 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이다.
프랑스 엠마우스 공동체를 만든 피에르 신부가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이다. 피에르 신부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 이해한다.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이다.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과 공감하는 자’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럼으로써 남을 향해 은혜의 창을 열 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사람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내 생명이 지금 살아있고, 그의 은혜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내 삶의 존재감을 누리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성전을 찾아온 순례자가 향한 시선은 바로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는 땅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어 하늘의 보좌를 향해 눈을 들었다. 이 땅에서 안전과 평안을 찾지 못하여,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3).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
당시 기도자의 백성은 이방 민족에게 심한 멸시를 듣고 있다. 이미 정치적 주권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신앙적 주권마저 흔들릴 수 없다. 이제 와서 오직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뿐이다. 만약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마저 끊어지면, 그 때야 말로 정녕 마지막이다.
처음에 순례자는 자유인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왔다. 그런데 종의 눈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더 큰 힘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됨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삶을 상상해 보라. 내가 누려온 삶 그 어느 시간도 하나님의 은총과 무관한 때는 없다. 내가 무지하고 교만해서 이러한 은총을 부정하거나,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자신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온갖 질병과 상처와 가난과 심지어 죽은 사람의 문제까지 가지고 나아왔다. 그들은 단순히 이런 말로 호소하였다.
맹인 두 사람의 기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20:30).
세리의 기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그들은 자신을 가엾게 여기도록 예수님께 사정을 아뢰었고, 또 응답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얻으면, 은혜를 입게 되면 반드시 회복될 것임을 확신하였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한 채, 종종 마음의 독재자로 살아가지 않는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집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을 미루지 않는가? 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의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가난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회개의 기도는 나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 탄식의 기도는 나를 하나님과 더 긴밀히 결속하게 한다. 감사의 기도는 나를 평화로 이끈다. 결단과 도전의 기도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한다. 기도 안에 해답이 있다.
인간의 삶은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무관할 수 없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지만,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는 쉼 없이 계속 되어야 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기도는 모든 기도의 으뜸이요, 기본이다. 내 삶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제 자기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본다면 나 자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 안에 있음을 실토하게 될 것이다. 은총의 빛 가운데 살아왔고, 살아가며, 살아갈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눈길이 은혜를 바라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도우심으로, 평화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