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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金永蘭 (1894 ~ 1922)】 "비밀결사 숭의단과 공성단 조직, 군자금 모금 및 친일파 처단 활동"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과 고종의 인산이 겹치면서 3·1운동은 전 민족적 거사가 되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
1894년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신창면(新倉面) 신창리(新倉里)에서 태어났다. 가계나 양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집안의 4대 독자였던 것으로 전한다. 어릴 때의 성장과정이나 독립운동 이전의 청소년기에 대해서도 알려진 사실이 없다.
1919년 당시 기독교 신자로 고향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때 교회 조직을 바탕으로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연계되어 신창면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 무렵 중국 동북지방(만주) 서간도의 류허현(柳河縣)에 망명하여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웃 성천군(成川郡) 출신의 최병갑(崔炳甲)이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최병갑과 접촉하고 성천군 출신의 김병항(金炳恒) 등 동지들을 만나 1919년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조직 숭의단(崇義團)을 조직하였다. 그 뒤 성천군 삼덕면(三德面) 사무소 직원 김홍록(金洪錄)을 규합하여 단인(團印)을 새기게 하고 군자금 영수증 인쇄를 맡겼다. 이후 독립운동 동지의 확보에 주력하여 그 해 12월 22일 김병항·주기정(朱基鼎) 등과 함께 순천군 출신 윤홍수(尹弘洙)를 설득하여 숭의단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로 평양의 숭실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이창해(李昌海)와 조기수(趙基洙)도 동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의논하여 군내 각지의 부호를 방문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군자금 헌납을 권유하고, 부호들이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민족반역자로 처단키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창해는 권총 2정과 실탄 9발을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1919년 12월 27일 동지들과 함께 성천군 삼덕면의 정현조(鄭鉉祚) 집을 방문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견원이라고 밝히고, 독립운동자금 헌납을 요구하였다. 정현조가 성천경찰서에 밀고하여 성천경찰서 순사들이 급거 달려와 주기정과 김병항을 체포해갔다. 이에 숭의단원들은 정현조를 민족반역자로 처단키로 하였다.
조기수·한국언(韓國彦)·최태준(崔泰俊) 등 3인과 함께 1920년 1월 1일 정현조의 집에 불을 지르고, 집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 뒤 동지들과 함께 평남 성천군 일대에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1월 5일 성천군 삼덕면 쌍림리의 김덕팔(金德八)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 기부 약속을 받아낸 뒤 300원(圓)을 수령하였다. 2월 17일에는 이러한 방법으로 거둔 1,600여 원의 자금을 박돈수(朴敦洙)에게 맡겨 임시정부에 전달토록 하였다. 이 계획은 일본 경찰의 감시가 엄중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숭의단원들은 1919년 11월 평남 개천군에서 조직된 공성단(共成團)이란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 6일에는 김홍록과 함께 성천군 천성면 천성리(天成里)에서 독립운동 자금 150원을 징수하였다. 이튿날에는 최병갑과 함께 같은 군 최치민(崔致珉)에게 군자금 200원을 거두었으며, 4월 4일 다시 그 집을 방문하여 300원을 추가로 징수하였다.
이러한 군자금 모금활동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동지 박돈수가 1920년 5월 16일 평양에서 붙잡힌 뒤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었다. 이에 성천군 사가면(四佳面) 신흥리(新興里)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성천경찰서의 일본 경찰이 5월 29일 은신처를 급습하여 최병갑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1922년 4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방화 및 살인 미수 등의 혐의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그 해 7월 12일 평양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목차
“그 이전까지의 모든 민족운동은 3․1운동으로 통하고, 그 이후의 모든 민족운동은 3․1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3․1운동은 우리 민족사의 큰 분수령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지역과 종교를 초월하고,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오직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하는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지표 삼아 3․1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218개 군 모두에서 무려 1,500여 회의 독립만세시위운동이 봉기하였고, 또 거기에는 남녀노소는 물론 유생·교사·학생·종교인·상공인·농민·노동자 등 각계각층 200여만 명의 우리 민족이 동참하였다. 그 결과 3․1운동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성립시켜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의 맥을 잇게 하였고, 만주·노령에서는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촉발하고 확산시켜 갔다.
특히 3․1운동을 거치면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국내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즉 비밀결사(秘密結社)들은 3․1운동을 전파하고 대중화하는 데 전위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919년 말부터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독립운동을 지속하여 갔다. 3.1운동으로 인해 고양된 민족적 독립열망을 바탕으로 일제기관의 파괴나 친일배의 처단 등과 같이 강력하고 실천적인 강령을 추진해 갔다. 군자금 모집의 경우에도 1910년대의 비밀결사가 주로 회원의 회비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1920년에는 무장에 의한 군자금 모집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1919년 전반기의 비밀결사조직이 만세운동의 추진, 선전물의 배포를 통한 독립의식의 고취 및 임시정부의 선전 등에 주력한 데 비해 1919년 후반기 이후에는 친일배의 처단, 일제 식민기관의 파괴와 같은 강력한 행동지침이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군이나 면 단위의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같은 비밀결사는 임시정부나 만주 독립군 등 국외 독립운동세력과 연계를 맺고, 주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갔다. 김영란 선생이 조직하여 평안남도 순천군(順天郡)과 성천군(成川郡) 일대에서 활동한 숭의단(崇義團)은 그러한 비밀결사의 전형(典型)이었다.
선생은 1894년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新倉面) 신창리(新倉里)에서 4대독자로 출생하였고, 여기에서 성장하였다. 선생의 성장과정과 독립운동 이전의 활동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1919년 11월 선생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기독교 감리교 신자로 순천군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순천군과 성천군은 평남은 물론 전국에서도 3․1운동 기간 중에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희생자가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 군내에서 최초로 만세시위운동이 발발하여 7일까지 이어지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 순천군에서는 3월 2일 은산면(殷山面)에서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천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이어 3월 4일 자산면(慈山面)에서도 천도교인들이 중심되어 만세시위운동을 벌였고, 3월 5일 신창면에서는 장날을 기하여 기독교인들의 선도로 3천여 명의 장꾼들이 봉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읍내에서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여 2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며 치열하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곳이 신창면이었다. 신창면의 만세시위운동은 기독교 감리교인이던 박창빈(朴昌彬)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와서 이곳에서 담임하고 있던 이윤영(李允榮) 목사에게 전달하면서부터 준비되었다. 그리하여 감리교도들은 현직 신창면 면장까지 포섭하여 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에 진출하여 장꾼들과 함께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날의 만세시위운동으로 50여 명의 시위 운동자들이 피검된 것을 보아도 그 시위의 격렬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항일의 열기가 높았던 곳에서 생장하고, 또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일제의 야만성과 시위운동의 한계를 피부로 느낀 선생은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결사의 조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중국 만주의 유하현(柳河縣)에 망명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성천군 천성면(天成面) 출신의 최병갑(崔炳甲)이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귀향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와 상의하여 성천군 출신의 박돈수(朴敦洙)와 김홍록(金洪錄), 순천군 출신의 주기정(朱基鼎), 태천군(泰川郡) 출신의 김병항(金炳恒)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9년 11월 비밀결사 숭의단을 조직하였다. 그런 다음 성천군 삼덕면(三德面)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여 인각(印刻) 경험을 가진 김홍록으로 하여금 단인(團印)을 조각케 하고, 또 그가 재직하였던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몰래 이용하여 영수증을 인쇄하게 함으로써 군자금 모집 준비를 마쳤다.
아울러 동지 확보에도 주력하여 선생은 12월 22일 김병항·주기정 등과 함께 순천군 출신 윤홍수(尹弘洙)을 설득하여 숭의단에 가입시키고, 또 이창해(李昌海)와 조기수(趙基洙)도 동참시켰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숭의단 동지들은 군자금 모집 방안에 대해 논의한 결과, 군내 각지의 부호를 방문하여 군자금 헌납을 권유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민족 반역자로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이창해는 소지하고 있던 권총 2정과 실탄 9발을 내놓았다.
다음날인 12월 23일 선생을 비롯한 숭의단원들은 이창해의 집을 출발하여 순천군 신창면 사평리(沙坪里)의 윤모 외 3인을 방문하여 군자금 헌납을 요구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2월 27일에도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성천군 삼덕면 문원리(文源里)의 정현조 집을 방문하여 상해 임시정부 파견원이라고 칭하고 군자금 헌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현조가 이를 성천경찰서에 몰래 고지함에 따라 일경에 의해 주기정(朱基鼎)과 김병항(金炳恒)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숭의단원들은 정현조를 민족 반역자로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선생과 조기수·한국언(韓國彦)·최태준(崔泰俊) 4인은 1920년 1월 1일 정현조 집에 방화하고 도망하는 자들에게 권총을 발사함으로써 군내 부호들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나머지 동지들은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이치범(李致範)의 집을 근거지로 하여 성천군 신창면 신이리(新二里) 최홍주(崔洪柱)와 신사리(新四里) 최홍규(崔洪奎) 등 7명으로부터 군자금 수합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그리고 1월 5일에는 성천군 삼덕면 쌍림리의 김덕팔(金德八)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 헌납 약속을 받아낸 뒤, 300원을 수령하였다. 2월 17일 선생을 비롯한 숭의단원들은 이같은 방법으로 수합한 1,600여 원의 군자금을 박돈수를 파견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납입하도록 결정하여 실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현조의 집 방화사건으로 일경의 추적이 진행되는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을 비롯한 숭의단원들은 조국 광복을 위하여 군자금 수합 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숭의단은 만주 유하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현기정(玄基正)이 귀향하여 1919년 11월 평남 개천군(价川郡)에서 결성한 공성단(共成團)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그것은 두 단체가 공통의 목적을 갖고 있었고, 또 두 단체의 핵심인물인 숭의단의 최병갑과 공성단의 현기정이 같이 만주 유하현에서 활동한 경험이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 아울러 숭의단의 주 활동 무대였던 순천군의 이웃이 바로 개천군이라는 지역적 근접성과 박돈수가 두 단체에 모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매개로 연계 활동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20년 3월에 들어서도 숭의단의 군자금 수합 활동은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선생과 박돈수는 3월 6일 성천군 천성면 석우리(石隅里, 돌모리) 석봉름(石峯廩) 집을 방문하여 1월 4일 김홍록·박돈수 등이 조국의 식민지 상황을 역설하면서 약속 받아둔 군자금 헌납을 요구하여 4백원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박돈수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선생은 김홍록과 만나 성천군 천성면 천성리 최모 집에서 군자금 150원을 징수하였다. 다음날인 3월 7일 선생은 최병갑(崔炳甲)과 함께 성천군 삼덕면 쌍림리 최치민(崔致珉)으로부터 군자금 200원을 거두고, 다음달 4월 4일 또 그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 300원을 징수하는 등 도합 500원을 수합하였다.
4월에 들어서도 선생을 비롯한 숭의단원은 4월 1일 성천군 천성면 회원리(檜源里) 홍치재(洪致載)의 집을 방문하여 자신들을 임시정부 요원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군자금을 요구하여 헌납 약속을 받아낸 뒤, 이후 2회에 걸쳐 군자금 16566원을 거두었다. 그리고 5월에 들어 선생은 5월 10일 숭의단 동지 2명과 함께 성천군 쌍룡면(雙龍面) 상평리(上坪里) 이진수(李珍秀)의 집, 5월 16일 다시 같은 마을의 조대술(趙大述)의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국 광복의 길을 열어 갔다.
그러다가 박돈수가 5월 16일 평양에서 피체된 뒤, 선생과 최병갑은 다가오는 일경의 촉수를 감지하고 성천군 사가면(四佳面) 신흥리(新興里)에 잠시 피해 있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을 탐지한 성천경찰서의 일경들이 5월 29일 은신처를 덮치자, 선생과 최병갑은 일경들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2년 4월 4일 평양복심(覆審)법원에서 이른바 「제령(制令)」 7호 위반, 살인미수 등으로 사형을 받고 상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선생은 7월 12일 평양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