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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법(시3:1-8)-2018.9.30
우리가 살다보면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경험하고 싶지 않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위기를 당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건강의 위기, 물질의 위기, 관계로부터의 위기, 부모자식간의 위기도 있습니다. 그 위기는 가정으로부터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소속된 공동체 안으로부터 찾아오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다만 그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서 신앙의 유무와 신앙의 성숙도가 결정됩니다.
본문은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을 당하고 도망할 때 지은 시’라고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인생의 영욕을 모두 다 경험해 본 왕입니다. 이스라엘 왕정 역사에 다윗 왕처럼 존귀함을 받은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변함없이 존경을 받는 왕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안길을 보면 참으로 아픔이 많은 왕이요,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고독한 왕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는 심정을 아십니까?
다윗은 한 때 자기의 장인 사울 왕으로부터 쫓겨 다니는 도망자였습니다. 또한 왕이 된 후로도 자기 집안이 그리 평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남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강간하고 압살롬에 의해 살인을 당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왕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결국 압살롬의 반역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죽임을 당합니다. 다윗왕의 불행한 가족사는 다윗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슬픔의 위기였던 셈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반역했습니다.
위기 가운데 가장 아픈 위기는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위기, 즉 정신적 위기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음모와 배신은 가장 아픈 위기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 아들로부터 반역을 당해 도망칩니다(삼하15-18장). 기가 막힌 일입니다. 다윗의 일생에 가장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윗을 배신하고 등을 돌립니다. 시므이라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다윗을 향해 비루한 자여 가라고 저주합니다(삼하16:5-8).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천만인이 돌로 치려고 에워 쌓다고 표현합니다(6절).
하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도 다윗이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3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3절에서 자신의 ‘머리를 드신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신분이나 명예를 회복해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위기 앞에서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솔직히 지금 다윗이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들의 군대가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상황 중에서 편히 누워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억울하고 분해서 잠이 오겠습니까? 아니면 불안하고 두려워서 잠이 오겠냐는 말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편히 잠을 자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누워 자고 깨었다고 고백합니다(5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붙드셨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자식이 섭섭한 이야기만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1) 위기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과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위기를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위기는 사람에 따라 위험한 악재가 될 수도 있고, 호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위기를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성도는 위기를 기회로 삼는 자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인물들입니다. 위기를 보는 관점과 대하는 자세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납니다. 때문에 성도는 위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인 자세로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 돌파구가 생깁니다.
다윗의 위기는 보통의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다윗 곁에는 항상 대적들이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런 것 같아요. 따르는 사람이 많은 자는 안티도 많더라구요. 그것은 나라의 지도자나 교회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의 대적들이 나와 상관없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주변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의 대적들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대적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치려는 대적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1절).
굳이 수적으로 표현하면 6절을 보십시오. 천만인이 자기를 치려 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대적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대적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원수마귀 악한 것들이 천양의 얼굴을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접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난처한 입장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말씀을 한곳 찾아 읽어보십시다. 미가서 7장6절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이로다”.
원수마귀는 우리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상처를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만들어 상처를 극대화시키는 것입니다. 원수마귀는 우리를 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자존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르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하나이다”. 이 소리는 성도들의 영적 자존심에 상처를 가하는 치명적인 소리입니다.
이처럼 원수마귀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이간시킵니다. 다른 것보다도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이간시켜서 분리시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사이도 마찬가지고, 성도와 성도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악랄한 수법은 이간시키는 일입니다. 그것은 원수마귀의 고도의 전술입니다. 아마도 다윗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아들의 반역보다 원수마귀의 비난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2절의 내용처럼 하나님과 다윗 사이를 이간시켜 믿음을 파선하려는 수법이 다윗으로서는 가장 참기 힘든 위기였는지 모릅니다.
믿음이 있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통한 직접적인 피해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윗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의 고통은 자기 신앙을 하나님으로부터 이간시키려고 하는 사단의 계략에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 대부분 1절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고통은 2절에 있습니다. 이것을 진짜 위기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소리는 우리 영혼을 낙심케 하는 소리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이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편 50편15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하나님을 부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원수마귀 악한 것들은 도움을 얻을 수 없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연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믿음을 파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단의 전술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잘나갈 때 찾아오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고 연약할 때, 그리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인생의 위기 가운데 적극적으로 다가 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우리 주님이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시편27: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리를 왜곡시켜 이간시킵니다. 이간은 서로의 마음을 갈라 치는 것이요, 서로의 마음을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간놀음에 빠지면 빠져나오기가 힘듭니다. 성도들 사이에서도 이간놀음에 빠지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절대 이간을 당하지도 말고 이간을 시키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이간은 당하지도 말고 시키지도 말자”.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원수마귀라고 말하거나 원수처럼 대하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또 다시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귀가 아니라 그 사람 뒤에서 조종하는 흑암의 세력이 사단의 영입니다. 사단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동원하여 미혹합니다. 원수는 절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사실 나의 원수는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원수는 우리 가정 안에 있고, 우리 교회의 원수도 우리 교회 안에 있습니다. 새겨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원수도 다윗 안에 있었습니다. 젊은 날 끓어오르는 정욕이 다윗을 괴롭히는 최대의 원수였습니다. 그는 한때 자기 안에 있는 정욕이라는 원수를 이겨내지 못하고 밧세바의 품안으로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왕의 집안에도 원수가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버지의 피를 받은 장남 암논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끓어오른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말이라는 이복누이를 강간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비극이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물고 물리는 피의 보복이 집안에서 계속 일어난 것입니다. 다윗의 집안에 원수는 자기 아들들이었던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마귀가 노리는 꼼수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인정하든 안하든지 상관없이 원수마귀 대적은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원수마귀 대적은 아들 압살롬이었습니다. 물론 압살롬이 마귀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단이 압살롬을 악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압살롬은 원수마귀의 조종을 받고 넘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원수마귀가 항상 내 가장 가까이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영적 긴장의 끈을 풀면 안되는 것입니다.
(2) 위기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이처럼 모든 인생은 위기가 있습니다. 다만 위기가 사람마다 다른 옷을 입고 찾아오기 때문에 분별이 어려울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단순하게 위기만 바라보고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면 안됩니다. 마음을 놓아버리거나 낙심하는 것도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를 극복한다는 핑계로 분주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서서히 사단의 작전에 당신이 휘말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위기 앞에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위기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위기가 찾아오면 대개 이런 반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두려워하거나 당황해하거나 분주해합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그것을 가장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장 먼저 생각났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어떤 것이 떠오르십니까? 믿는 자는 위기보다 크신 하나님이 떠오르고 생각나야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 사람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추를 가장 잘 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기 가운데 죽음보다 더 큰 위기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낍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죽음도 위기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을 받으며 자유함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죽음도 위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지금 내안에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이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절박한 위기 앞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당황했습니까? 아니면 분주했습니까? 아니면 불안했습니까?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은 위기보다 크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다윗의 모든 위기를 가장 선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강점이고, 우리가 다윗을 존경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다윗이 죄가 없어서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 편으로 넘어졌습니다. 죄악 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자기 방패라고 고백합니다. 방패는 전쟁도구입니다. 전쟁 중에 방패는 대적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해주는 가장 안전한 도구입니다. 이런 확신은 일찍이 다윗이 소년시절부터 경험해왔던 것입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 목동시절부터 이런 경험을 수없이 해 왔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고기 맛을 알고, 은혜도 맛본 자가 은혜의 맛을 압니다. 다윗의 고백은 몸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고백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영광이시요, 자신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신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자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가장 최상의 고백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그런 와중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오히려 안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시27:3).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시23:4).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삶 가운데 하나님은 지팡이가 되셨고 막대기가 되셨습니다. 지팡이는 그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주는 안내자와 같았고, 막대기는 자기를 대적하는 원수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 주는 권능의 도구와 같았습니다. 때문에 모든 위기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위기를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콩나물과 콩 나무의 차이를 아십니까? 콩나물은 어둔 곳에서 매일 물을 뿌려줍니다. 남의 손에 의해 자랍니다. 때문에 1회용 반찬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콩 나무는 밝은 햇빛아래 땅에 심어지고 스스로 자양분을 빨아드리며 자랍니다. 때문에 수많은 콩을 생산하여 수많은 용도(콩조림, 콩볶음, 콩가루, 청국장, 된장, 간장 등)로 사용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어떤 위기가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의지하십니까? 다윗과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자신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어야합니다
사람들은 위기 앞에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으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간절함이 있다는 것이지요.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기에 결코 나무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는 대상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던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씨름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고,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립니다. 그러다가 탈진을 하고 극단의 선택을 취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시편146:3-5절입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직 하나님밖에 의지할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은 허탄하고 망령된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일이 꼬이고 꼬일 뿐입니다.
다윗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본 것으로 끝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분께 나아가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4절을 보십시다.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목소리로 부르짖었습니까?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내가 직접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기도해 주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말합니다. 중보기도는 기도의 꽃과 같습니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기도는 자신의 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보다 진솔한 기도가 없고, 간절한 기도가 없으며 확신 있는 기도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끼리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좋습니다. 기도의 빚 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기도부탁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누군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영적인 신뢰가 없으면 어렵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기도부탁을 받을 때 영적 책임감을 갖습니다. 다른 기도보다 우선 기도하고 집중합니다. 기도에 대한 책임감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기도부탁을 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성도는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의 맛을 아는 성도입니다. 불행하게도 본인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 부탁을 잘 하지 못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4절).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긴다는 내용보다 더 능력 있는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때문에 다윗이 환난 중에 있으면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5절). 솔직히 전쟁 중에 잠을 자고 일어난다는 것이 보통 배짱입니까? 대적들이 언제 들어 닥칠지 모르는데 누워서 자고 깬 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을까요?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8절). 그리고 자신의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7절). 다윗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오, 전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때문에 어떤 위기 앞에서도 굴종하지 않고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윗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나를 평안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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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