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마지막주이자 주님변모주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출34:29-35; 고후3:12-4:2; 눅9:28-36
매서운 추위 끝에 따스한 봄이 왔습니다. 한겨울 차가운 공기를 뚫고 들어오던 햇살은 이제 따스한 온기와 함께 온 세상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얼어붙었던 모든 것을 녹이고 있습니다. 호수공원 곳곳에서도 봄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특히,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호수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지난 주, 저는 투명한 물 위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빛이 이렇게 반짝이는구나, 우리 안에도 이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빛이 있겠구나, 아니, 우리가 이 빛이구나!’ 이런 생각들이 마음에 일었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님변모주일입니다. 주님변모주일은 주현절 마지막 주이자,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 주일에 지킵니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기 전에 주님변모주일을 지키는 것은 무척 뜻깊습니다. 사순 시기에 우리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 실존의 조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즉,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로 들어갑니다. 주님변모주일은 이 광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는 일이 먼저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의 빛을 드러낸 모세와 예수, 그리고 그 빛을 새롭게 해석한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본문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계명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돌아오지 않자, 백성들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던 두 돌 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이후에 모세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다시 증거판을 받아 돌아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출34:29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의 얼굴의 가죽이 광선들을 발했다.”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이 강렬한 광채는 백성들 앞에서 모세의 신뢰성을 회복시켰고, 하나님께 부여받은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을 보며 사람들은 두려움이 일어나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과 말할 때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하나님과 이야기하러 갈 때에는 수건을 벗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오래된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재해석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높은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지만, 그 목표를 이룰 힘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는 말은 율법적인 종교는 잠정적이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사륵스, 육체인 인간들의 연약함과 악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인간 실존의 조건과 율법은 인간을 계속해서 절망으로 몰아갑니다. 인간들은 그런 절망스러운 현실을 감추려고 온몸을 너울로 휘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 광채가 아닌, 수건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모세가 대표하던 모든 것들의 껍데기만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수건은 진리로부터 그들을 단절시키는 휘장이 되어 그들의 눈을 가렸습니다. 마음이 아닌 밖으로 드러나는 겉모습에 그들은 온통 시선이 가있었습니다. 모세조차 하나님과 만날 때는 수건을 벗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완고함이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자기를 허용해주고, 애정 어린 눈길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봐주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열등감, 불안, 분노, 수치심, 슬픔 등을 감추려고 너울을 뒤집어씁니다. 이 너울이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한다는 생각이 들면, 더 많은 너울들을 몸에 칭칭 휘감습니다. 모세의 강렬한 빛이 자신에게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안에서 그 어떤 빛도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온 몸을 꽁꽁 감추고 가립니다.
인간의 시선은 언제나 더 크고, 더 좋은 것들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성과물을 움켜쥐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시선이 주로 밖을 향해있다 보니, 돌보지 않아 소외된 내면은 공허하고 쓸쓸합니다. 그 허한 마음을 잠시 알아차리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할 수 용기가 없어서 다시 밖을 헤맵니다. 마음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다보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갈팡질팡 흔들립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모세가 아니라는 사실에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것에 현혹되어서 우리 안에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어서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런 현실을 직면하게 한 다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고후4:16)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모세의 얼굴의 광채와 신적 능력이 아닌, 알아차릴 때마다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작은 발걸음, 가벼운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향이 멀어지고 흐트러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돌아서는 작고, 가벼운 움직임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너울로부터 우리를 점차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돌아섬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릴 때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니 살아있는 동안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번에 모세처럼, 주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돌아섬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의 일상은 분명 변화되고 달라집니다. 우리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자유를 향한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을 딛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3:17)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까지 우리를 돌아서게 하고, 변화시키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너울을 온몸에 칭칭 감고 있는 우리가 그것들을 벗어버리도록 성령님은 우리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바람, 물, 불을 일으키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완고해지고 경직되지 않도록 자유를 향하여 끊임없이 흘러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완고함에서 돌아서면, 우리 앞에는 끝없는 자유가 펼쳐집니다. 이 자유는 집착하고 욕망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이 자유는 우리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지라도, 그것들이 어떻게 흘러가고 변형되는지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불안 아래에 있는 평화를, 혼돈 아래에 있는 고요를, 슬픔 아래에 있는 기쁨을, 분노 아래에 있는 사랑을, 의심 아래에 있는 신뢰를 만나게 합니다. 자유는 우리가 바탕과 접촉되도록 안내합니다.
심연의 깊은 어둠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한줄기 빛이 우리의 존재의 본질입니다. 불안과 혼돈, 슬픔, 분노, 의심이 우리 안에 뒤엉켜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있는 그대로 온전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비추는 빛을 발견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주님의 빛은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감싸 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작은 발걸음과 몸짓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식에까지 이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3:18)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열려서 흘러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다가 정체되고 경직되어 완고해지기 쉽습니다.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신비체험을 했던 베드로처럼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대로 자기 삶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얼굴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희어진 주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를 그곳에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일이 있은 뒤에 제자들은 얼마 동안 침묵했다고 누가복음에서는 말씀합니다. 산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물러나는 고독의 자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침묵 가운데서 주님의 빛은 우리 내면의 소리가 되고 길이 되어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안내합니다.
이번 주 재의 수요일에 사순 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달갑지 않는 그림자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광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본질은 빛이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 위의 물처럼, 우리는 찬란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입니다.
우리의 심연에는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찬연한 한줄기 빛이 있습니다. 우리의 불안을 평화가 떠받치고 있고, 우리의 혼돈을 고요가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 밑에는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고, 의심 밑에는 단단하고 든든한 신뢰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곳에서 우리의 깊은 슬픔과 기쁨은 우리를 분열시키거나 나누지 않고, 하나로 아우르는 온전함이 됩니다. 성령님께서 이것과 저것으로 분리시키지 않는 자유를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거룩함, 성스러움을 향하여 주님께로 끊임없이 돌아서십시오. 거룩한 산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십시오. 그리고 이 거룩한 산에서 그만큼의 침묵과 고요 가운데 머무십시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너울을 벗어버리고 우리는 빛이 되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신 우리 주 하나님, 모든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우리 안에 성령의 바람과 물과 불을 일으켜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