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출정에서 약간의 전공을 세우고 용산에 있던 78연대로 다시 돌아온 나는 그 후 오랫동안 찬바람재[이태원]를 넘어다니면서 부대에 출퇴영 하게 됐다. 나는 당시 연대 중기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소좌가 되어야만 비로소 탈 수 있는 말을 대위 때부터 타고 다녔다. 중기관총은 말이 끄는 것이라 우리의 중기대에는 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탄 장교란 언제나 어린이들에 있어서는 퍽 매력과 흥미 있는 대상인 모양이였다. 어렸을 때 구한말 한국군부대에서 노백린 장군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넋 잃고 바라보다간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때 나는 노장군이 뭐라고 말 한마디라도 걸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하는생각에서 곧잘 나를 따르는 어린이들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장난을 치기도했다 너희들 집이 어디니? 부모님은 뭘 하시느냐? 학교에 다니니? 앞으로 크면 뭣이 되고 싶으냐? 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금방 내가 조선 사람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정답게 대답해 주었다. 이와같이 어린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동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이 너무나 불우한 환경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랬다. 집이 가난한 것도 가난한 것이지만 도대체 말탄 나의 뒤를 따르는 어린이들 중에 학교를 다닌다는 아이들이 한 아이도 없었으니 말이다. 개중에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가까운 곳에 학교가 없어서 못다닌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뭔가 큰일이라도 난 것같은 기분에 부랴부랴 알아 보았더니 당시 이태원에는 보통학교 조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당이란 것이 꼭 두군데 있었으며 동네 구장인 이홍순이 세운 조양학원이라는 사설 강습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 흡사 창고 같은 데서 아이들 몇몇을 가르치고 있었다.말하자면 이것이 그 고장 유일한 교육기관의 전부였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교육. 그렇다. 순간 나의 머리 속에는 “교육”이라는 두 글자가 커다랗게 아로새겨졌던 것이다. 교육 교육을 시켜야 한다.이땅에서 무지와 몽매를 쓸어버려야 한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고도 하지 않던가.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국민을 각성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올바른 교육 뿐이 아닌가. 순간 나는 만주출정시 그 곳 주민들이 너무나도 우매하고 무지했던 사실도 상기했다. 그즈음 마침 나는 논공행상금으로 들어온 7백원을 어떻게“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 유효 적절하게 쓰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라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었을런지도 모른다. 7백원.사실 이 7백원이라는 돈은 아이들의 배움터를 만드는데 있어선 너무나도 적은 돈이었다. 하지만 한 알의 작은 꽃씨가 수 백송이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수도 있지 않은가? 한 알의 작은 꽃씨를 땅에 심는 마음으로 나는 이 7백원을 우리 불쌍한 동리 아이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는데 보텔 생각으로 이 꽃씨를 심는다.
PS: 학교 설립자가 장군 김석원(金錫源1893~1978)이다. 1917년에 일본륙군사관학교 졸업.1920~1938년까지 룡산부대 근무. 1932년 리태원 보통학교 설립. 1938년 원석학원 성남중학 설립. 광복이 되어 1945년에 성남중학교교장․재단리사장. 1956년 륙군소장으로 예편했다. 1956년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리사장이 되었다.
장군 김석원이 하루빈(河淚濱) 안중근(安重根) 선생을 존모하게 되어 그것이 교훈으로 된 것이다.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자’가 하루빈 선생이 걸었던 길이다. 하루빈[안중근 의사의 호]선생을 존모하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 인물이 되는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어요.. 전설처럼 잊어질 수도있는 ...그러나 그 글속에서 김석원 장군님의 큰 뜻을 볼 수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