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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 4월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二. 4.19혁명의 배경
4.19혁명은 8.15해방과 분단 이후 성립된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에 대한 변혁의 요구를 배경으로 발생했다.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정기 이후 불완전한 농지개혁, 귀속재산 불하, 미국의 막대한 원조 등에 의한 구조적 요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미국의 경제침체와 동북아시아 전략구도에 입각한 대한정책(對韓政策)의 변화로 원조에 의존한 자본축척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요인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원조물자와 그 판매대금에 의존한 독점자본이 형성되고, 생산활동에 대한 투자보다는 유통상업 부문에서의 폭리와 원조에 의존하여 자본축척에 의한 자생적인 생산력 발전이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더욱이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과 생활필수품의 독점가격 형성은 국민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의 빈궁과 농촌의 황폐를 가져왔고, 증가된 이농민은 도시노동자의 과잉공급을 초래하여 실업, 빈곤, 저임금의 구조를 악화시킨 채 도시빈민을 형성했다.
정치적으로도 이승만 정권은 6.25전쟁 후 국군과 경찰력의 증강 등으로 국회에서 취약한 지지기반을 물리적으로 보완하려 했다. 이러한 반민주주의 경향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성격과 정권의 핵심을 이루는 친일 관료, 경찰집단의 비민주적 성향과 어울려 강화되었다.
이처럼 미국의 원조정책 변화에 따른 경제적 위기, 자본주의 발전에 의한 사회적 분화, 이승만 정권의 억압적 지배경향, 민중의 궁핍화현상 등에 의한 근본적 변혁요구가 증대하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유레카백과사전>
三. 4.19혁명의 발발
1. 발발 원인
◎ 간접적 원인
4.19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종신집권(終身執權)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의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이승만은 환국 이후 다른 어떤 민족 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에게 ‘나밖에 없는’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또한 이것은 그의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독재권력의 강화를 위해 온갖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도 감행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상실해갔다. 그는 6.25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감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다.
또한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 시작하였다.
52년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 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부산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연금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백골단’'민족자결단’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출신구에서는 난데없이 국회의원 소환을 외치는 성토군민대회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소위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으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신망은 더욱 멀어졌다.
54년 11월 이승만은 재차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제한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소위 ‘사사 오입 개헌’이라는 기상천외한 개헌을 단행하였다. 당신의 개헌안 가결 정족수는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2/3인 136명이므로 개헌안은 부결된 것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다음날,투표결과 135표를 얻었기 때문에 203의 3분의2는 135.333....으로 사사오입하면 135이므로 전날의 표결과를 뒤집어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으로써 사사 오입 개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의 급사로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자유당은 선거법에 언론규제 조항을 삽입한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켜,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언론을 봉쇄하고 관권에 의한 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였으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20%에 달하였고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분명히 밝혀졌다. 그리고 58년12월 자유당은 국회의사당에 무장경찰과 무술경찰을 배치하여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완력으로 막고,
‘2.4보안법파동'을 일으켜 언론규제와 야당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 직접적 원인
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지지 성황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를 하게 된 것을 기회로, 5월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15일에 실시하였는데,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음모의 내용은
① 사전투표율 40% 완료, ②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③자유당의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④ 야당참관인 축출, ⑤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⑥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⑦ 투표함 바꿔치기, ⑧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⑨ 득표수의조작 발표 등이었다.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의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그러한 때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사함으로써,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3월17일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선거라는 미명하에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그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 전국적인 시민혁명으로 전개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고 외치면서 마침내 데모를 벌였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의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세계대백과사전>
2. 4.19혁명 진행과정
(1) 제 1차 마산봉기(3월 15일)
3월 15일의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 민주당에서는 선거를 포기한다는 선언이 나왔고, 오후 3시에는 수천 명의 시민,학생이 '협잡선거물리치자'며 시위에 돌입, 괴한들로부터 곤봉세례를 받으며 투석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제1차 마산봉기 의 화약고가 터졌다.
(2) 제 2차 마산봉기(4월 11일)
제1차 사건 때 행방 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무참히 학살된 시체가 때마침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걸려 나왔을 때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극도에 달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학살 경관 처단', '재선거','살인범 처단' 등을 외치며 자못 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3) 고대생 피습 사건(4월 18일)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4) 경무대 진출, 계엄령선포( 4월 19일)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 시위를 하자, 하오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하오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하오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5) 이승만대통령 하야(4월 26일)
25일 하오 5시 45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은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26일 상오 10시 이대통령은 비로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학생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고 혁명은 성취된 것이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 과 이박사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허 정 과도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었다.
四. 4.19 혁명의 의의
4.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으로 휘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삭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 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년 3.1독립운동과 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19혁명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가장 민주적이며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민주주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세계대백과사전>
五. 4.19혁명의 한계
4.19혁명에 의해 과도 정부인 허 정 내각이 들어섰고 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독재를 청산하고자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막을 기대했으나 61년 5.16 쿠데타로 그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후속과업을 성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서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六. 4.19혁명 연표
◎ 4.19혁명 연표
장기 독재 정치
- 48.8.15 정부 수립
- 52.7.4 발췌 개헌
- 54.11.27 사사오입 개헌
- 58.12.24 보안법 파동
- 59.4.30 경향신문 강제 폐간
4.19 혁명
- 60. 2.28 대구 학생 시위
- 60. 3.15 부정선거
- 60. 3.15 마산의거
- 60. 4.18 고대 시위
- 60.4.19 시민혁명 발발
- 60.4.25 교수단 데모
- 60.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 60.7.29 제 5 대 국회의원 선거
- 60.8.13 제 2 공화국의 탄생
4.19 혁명 당시 정치권 일지
1960.4.20 이승만 박사의 담화문 발표
- 질서 회복 후 소요사태 조사
- 자유당의 국민 담화문 발표
-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
1960.4.21 전국구 의원 사표 제출
1960.4.22 국회 비상시국 위원회 구성
1960.4.23 장면 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1960.4.24 이승만 자유당 총재직 사퇴
이기붕 모든 공직 사퇴
◎이승만 사임서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 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단기 四二九三년(서기1960년) 四월 二七 일 - 리승만-
◎시민혁명
4월 20일 이후 전국은 비상계엄령 상태지만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로 정권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1960년 4 월 26일 오전 10시 30분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자 거리는 시민의 환호성으로 가 득 찼다. 이로써 자유당 정권은 종지부를 찍고 5월 29일 이승만 부처는 하와이 망명길에 올 랐다. 그 후, 8월 13일 제 2 공화국이 탄 생하였다.
七. 현대사회에서 4.19혁명에 대한 평가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해 유지되었던 정치 권력이 학생들을 선봉으로 한 반독재 대중에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집단행동에 의해 기존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민주 시민혁명이다.
1. 4.19정신 계승
◎ 책 출간
<이 책을 말한다> "새 천년과 4.19정신"
뉴 스 명 : 문화일보
등 록 일 : 99/04/15
등록시간 : 09:16:12
크 기 : 1.1K
4.19혁명의 포교사이자 파수꾼임을 밝혀온 안동일 변호사가 94년
이후 언론 에 발표한 글을 모았다. 1960년 스무살의 나이로 4.19운동에 참여한 당시를 정리한 ‘기적과 환상- 4.19 학생 운동기’와 97년 4.19정신의 중요성을 강조 한 ‘새로운 사·일구’에 이은 4.19관련 세 번째 칼럼집이다.
저자는 4.19의 정신을 한마디로 ‘민주이념’이라고 말한다. 4.19혁명은 독재와 부패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대의정치의 침몰과 선거제도의 파괴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의 복원이 4.19의 진정한 실체라는 것이다. 지난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제언의 글이 지금 도 설득력이 있는 것은 양김의 통치 행태가 지난 정권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며 씁쓸해한다. 새로운 천년을 맞는 이제야말로 4.19가 남긴 법치, 순리,예측을 따르는 참다운 민주주의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외에 변호사로서 겪은 경험과 가족에 관한 기억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후대나 미래를 위해 개혁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주위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겠노라고 대학시절 오랜 사색 끝에 결정한 좌우명 ‘자손을 위한 창조적 봉사’에 얽힌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정리=안진경>
◎4.19단체 활동
[박정희] 4.19단체 '박대통령사업지원 반대' 성명
뉴 스 명 : 한겨레신문
등 록 일 : 99/05/20
등록시간 : 21:10:56
크 기 : 895B
4·19혁명부상자회(회장 박종구), 4·19혁명희생자유족회(회장 윤재락) 등 4·19혁명 관련 4개 단체들은 20일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사업 지원을 약속한 것과 관련한 성명을 내어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은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고 장기 집권과 민권탄압을 미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지원계획의 철회를 촉구했다.
단체들은 “김 대통령은 독재자와 화해하기 앞서 민주화 투쟁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했거나 감옥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 과 명예회복부터 먼저 해야 한다”고 밝혔다.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연사연구회 등 3개 학회도 이날 “민주주의, 인권, 분배정의 등의 가치가 부정된 박정희식 근대화를 기념하는 것은 현정권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적 지향에 배치된다”며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 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권혁철 기자
◐ 99년05월20일21시09분
2. 4.19 기념 활동
◎4.19 기념탑,4.19 기념관 설립, 4.19 기념행사 등
김종필 총리] 4.19혁명 기념사
뉴 스 명 : 한국일보
등 록 일 : 99/04/19
등록시간 : 10:07:15
크 기 : 2.3K
김종필(金鍾泌) 총리는 19일 "우리는 4.19의 민주이념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21세기 조국의 희망찬 미래를 열어 나가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고 말했다. 김 총리는 이날 오전 수유리 4.19묘지에서 열린 `제 39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통해 "자유.민주.통일의 4.19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뤄내야 할 수많은 일들, 그리고 나아가야 할 민족사의 방향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또 김 총리는 "4.19혁명은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와 부정에 맞서 궐기했던 민주시민혁명"이라며 "4.19를 계기로 한 민족적 각 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구현과 자주민족국가 건설의 대장정 에 나설 수 있었다"고 강조했 다. 이어 김 총리는 "비록 지금 우리가 여러 가지 국가적 난제를 안고 있지만 , 우리 모두 역사의 기적을 창조했던 국민적 에너지를 다시 한번 모아 나 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희망의 천년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합】
◎ 4.19논쟁
[정가접속] 4.19 논평 3당3색
뉴 스 명 : 중앙일보
등 록 일 : 99/04/19
등록시간 : 19:25:48
크 기 : 710B
4.19혁명 39주년을 맞아 서울 수유동 희생자 묘지를 찾은 정치 지도자들은 각기 정치적 입지에 따라 의미를 부여.
김대중 대통령은 헌화.분향을 마친 뒤 유족들에게 "4.19 민주 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이 이 땅의 민주주의 역사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이 됐다" 면서 현 정권이 4.19를 이어받은 민주 정부임을 강조.
정부 행사를 주관한 김종필 총리는 "4.19를 계기로 한 민족적 각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구현과 자주민족국가 건설의 대장정에 나설 수 있었다" 며 은근히 5.16 이후 근대화와 연결시켰다.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4.19정신은 반독재.민주주의 실현" 이라면서 "오늘날 같이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상황에선 4.19정신의 재현 필요성이 절실하다" 고 역설.
서승욱 기자
시위대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들 | |
한 여학생이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플랭카드를 들고 있다. | |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모여 있다. | |
가두를 행진하는 시민들 | |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 |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 4월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二. 4.19혁명의 배경
4.19혁명은 8.15해방과 분단 이후 성립된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에 대한 변혁의 요구를 배경으로 발생했다.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정기 이후 불완전한 농지개혁, 귀속재산 불하, 미국의 막대한 원조 등에 의한 구조적 요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미국의 경제침체와 동북아시아 전략구도에 입각한 대한정책(對韓政策)의 변화로 원조에 의존한 자본축척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요인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원조물자와 그 판매대금에 의존한 독점자본이 형성되고, 생산활동에 대한 투자보다는 유통상업 부문에서의 폭리와 원조에 의존하여 자본축척에 의한 자생적인 생산력 발전이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더욱이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과 생활필수품의 독점가격 형성은 국민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의 빈궁과 농촌의 황폐를 가져왔고, 증가된 이농민은 도시노동자의 과잉공급을 초래하여 실업, 빈곤, 저임금의 구조를 악화시킨 채 도시빈민을 형성했다.
정치적으로도 이승만 정권은 6.25전쟁 후 국군과 경찰력의 증강 등으로 국회에서 취약한 지지기반을 물리적으로 보완하려 했다. 이러한 반민주주의 경향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성격과 정권의 핵심을 이루는 친일 관료, 경찰집단의 비민주적 성향과 어울려 강화되었다.
이처럼 미국의 원조정책 변화에 따른 경제적 위기, 자본주의 발전에 의한 사회적 분화, 이승만 정권의 억압적 지배경향, 민중의 궁핍화현상 등에 의한 근본적 변혁요구가 증대하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유레카백과사전>
三. 4.19혁명의 발발
1. 발발 원인
◎ 간접적 원인
4.19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종신집권(終身執權)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의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이승만은 환국 이후 다른 어떤 민족 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에게 ‘나밖에 없는’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또한 이것은 그의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독재권력의 강화를 위해 온갖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도 감행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상실해갔다. 그는 6.25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감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다.
또한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 시작하였다.
52년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 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부산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연금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백골단’'민족자결단’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출신구에서는 난데없이 국회의원 소환을 외치는 성토군민대회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소위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으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신망은 더욱 멀어졌다.
54년 11월 이승만은 재차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제한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소위 ‘사사 오입 개헌’이라는 기상천외한 개헌을 단행하였다. 당신의 개헌안 가결 정족수는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2/3인 136명이므로 개헌안은 부결된 것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다음날,투표결과 135표를 얻었기 때문에 203의 3분의2는 135.333....으로 사사오입하면 135이므로 전날의 표결과를 뒤집어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으로써 사사 오입 개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의 급사로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자유당은 선거법에 언론규제 조항을 삽입한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켜,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언론을 봉쇄하고 관권에 의한 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였으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20%에 달하였고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분명히 밝혀졌다. 그리고 58년12월 자유당은 국회의사당에 무장경찰과 무술경찰을 배치하여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완력으로 막고,
‘2.4보안법파동'을 일으켜 언론규제와 야당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 직접적 원인
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지지 성황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를 하게 된 것을 기회로, 5월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15일에 실시하였는데,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음모의 내용은
① 사전투표율 40% 완료, ②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③자유당의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④ 야당참관인 축출, ⑤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⑥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⑦ 투표함 바꿔치기, ⑧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⑨ 득표수의조작 발표 등이었다.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의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그러한 때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사함으로써,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3월17일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선거라는 미명하에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그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 전국적인 시민혁명으로 전개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고 외치면서 마침내 데모를 벌였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의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세계대백과사전>
2. 4.19혁명 진행과정
(1) 제 1차 마산봉기(3월 15일)
3월 15일의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 민주당에서는 선거를 포기한다는 선언이 나왔고, 오후 3시에는 수천 명의 시민,학생이 '협잡선거물리치자'며 시위에 돌입, 괴한들로부터 곤봉세례를 받으며 투석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제1차 마산봉기 의 화약고가 터졌다.
(2) 제 2차 마산봉기(4월 11일)
제1차 사건 때 행방 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무참히 학살된 시체가 때마침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걸려 나왔을 때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극도에 달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학살 경관 처단', '재선거','살인범 처단' 등을 외치며 자못 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3) 고대생 피습 사건(4월 18일)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4) 경무대 진출, 계엄령선포( 4월 19일)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 시위를 하자, 하오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하오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하오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5) 이승만대통령 하야(4월 26일)
25일 하오 5시 45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은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26일 상오 10시 이대통령은 비로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학생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고 혁명은 성취된 것이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 과 이박사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허 정 과도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었다.
四. 4.19 혁명의 의의
4.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으로 휘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삭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 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년 3.1독립운동과 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19혁명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가장 민주적이며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민주주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세계대백과사전>
五. 4.19혁명의 한계
4.19혁명에 의해 과도 정부인 허 정 내각이 들어섰고 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독재를 청산하고자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막을 기대했으나 61년 5.16 쿠데타로 그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후속과업을 성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서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六. 4.19혁명 연표
◎ 4.19혁명 연표
장기 독재 정치
- 48.8.15 정부 수립
- 52.7.4 발췌 개헌
- 54.11.27 사사오입 개헌
- 58.12.24 보안법 파동
- 59.4.30 경향신문 강제 폐간
4.19 혁명
- 60. 2.28 대구 학생 시위
- 60. 3.15 부정선거
- 60. 3.15 마산의거
- 60. 4.18 고대 시위
- 60.4.19 시민혁명 발발
- 60.4.25 교수단 데모
- 60.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 60.7.29 제 5 대 국회의원 선거
- 60.8.13 제 2 공화국의 탄생
4.19 혁명 당시 정치권 일지
1960.4.20 이승만 박사의 담화문 발표
- 질서 회복 후 소요사태 조사
- 자유당의 국민 담화문 발표
-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
1960.4.21 전국구 의원 사표 제출
1960.4.22 국회 비상시국 위원회 구성
1960.4.23 장면 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1960.4.24 이승만 자유당 총재직 사퇴
이기붕 모든 공직 사퇴
◎이승만 사임서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 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단기 四二九三년(서기1960년) 四월 二七 일 - 리승만-
◎시민혁명
4월 20일 이후 전국은 비상계엄령 상태지만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로 정권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1960년 4 월 26일 오전 10시 30분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자 거리는 시민의 환호성으로 가 득 찼다. 이로써 자유당 정권은 종지부를 찍고 5월 29일 이승만 부처는 하와이 망명길에 올 랐다. 그 후, 8월 13일 제 2 공화국이 탄 생하였다.
七. 현대사회에서 4.19혁명에 대한 평가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해 유지되었던 정치 권력이 학생들을 선봉으로 한 반독재 대중에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집단행동에 의해 기존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민주 시민혁명이다.
1. 4.19정신 계승
◎ 책 출간
<이 책을 말한다> "새 천년과 4.19정신"
뉴 스 명 : 문화일보
등 록 일 : 99/04/15
등록시간 : 09:16:12
크 기 : 1.1K
4.19혁명의 포교사이자 파수꾼임을 밝혀온 안동일 변호사가 94년
이후 언론 에 발표한 글을 모았다. 1960년 스무살의 나이로 4.19운동에 참여한 당시를 정리한 ‘기적과 환상- 4.19 학생 운동기’와 97년 4.19정신의 중요성을 강조 한 ‘새로운 사·일구’에 이은 4.19관련 세 번째 칼럼집이다.
저자는 4.19의 정신을 한마디로 ‘민주이념’이라고 말한다. 4.19혁명은 독재와 부패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대의정치의 침몰과 선거제도의 파괴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의 복원이 4.19의 진정한 실체라는 것이다. 지난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제언의 글이 지금 도 설득력이 있는 것은 양김의 통치 행태가 지난 정권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며 씁쓸해한다. 새로운 천년을 맞는 이제야말로 4.19가 남긴 법치, 순리,예측을 따르는 참다운 민주주의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외에 변호사로서 겪은 경험과 가족에 관한 기억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후대나 미래를 위해 개혁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주위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겠노라고 대학시절 오랜 사색 끝에 결정한 좌우명 ‘자손을 위한 창조적 봉사’에 얽힌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정리=안진경>
◎4.19단체 활동
[박정희] 4.19단체 '박대통령사업지원 반대' 성명
뉴 스 명 : 한겨레신문
등 록 일 : 99/05/20
등록시간 : 21:10:56
크 기 : 895B
4·19혁명부상자회(회장 박종구), 4·19혁명희생자유족회(회장 윤재락) 등 4·19혁명 관련 4개 단체들은 20일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사업 지원을 약속한 것과 관련한 성명을 내어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은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고 장기 집권과 민권탄압을 미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지원계획의 철회를 촉구했다.
단체들은 “김 대통령은 독재자와 화해하기 앞서 민주화 투쟁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했거나 감옥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 과 명예회복부터 먼저 해야 한다”고 밝혔다.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연사연구회 등 3개 학회도 이날 “민주주의, 인권, 분배정의 등의 가치가 부정된 박정희식 근대화를 기념하는 것은 현정권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적 지향에 배치된다”며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 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권혁철 기자
◐ 99년05월20일21시09분
2. 4.19 기념 활동
◎4.19 기념탑,4.19 기념관 설립, 4.19 기념행사 등
김종필 총리] 4.19혁명 기념사
뉴 스 명 : 한국일보
등 록 일 : 99/04/19
등록시간 : 10:07:15
크 기 : 2.3K
김종필(金鍾泌) 총리는 19일 "우리는 4.19의 민주이념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21세기 조국의 희망찬 미래를 열어 나가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고 말했다. 김 총리는 이날 오전 수유리 4.19묘지에서 열린 `제 39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통해 "자유.민주.통일의 4.19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뤄내야 할 수많은 일들, 그리고 나아가야 할 민족사의 방향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또 김 총리는 "4.19혁명은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와 부정에 맞서 궐기했던 민주시민혁명"이라며 "4.19를 계기로 한 민족적 각 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구현과 자주민족국가 건설의 대장정 에 나설 수 있었다"고 강조했 다. 이어 김 총리는 "비록 지금 우리가 여러 가지 국가적 난제를 안고 있지만 , 우리 모두 역사의 기적을 창조했던 국민적 에너지를 다시 한번 모아 나 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희망의 천년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합】
◎ 4.19논쟁
[정가접속] 4.19 논평 3당3색
뉴 스 명 : 중앙일보
등 록 일 : 99/04/19
등록시간 : 19:25:48
크 기 : 710B
4.19혁명 39주년을 맞아 서울 수유동 희생자 묘지를 찾은 정치 지도자들은 각기 정치적 입지에 따라 의미를 부여.
김대중 대통령은 헌화.분향을 마친 뒤 유족들에게 "4.19 민주 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이 이 땅의 민주주의 역사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이 됐다" 면서 현 정권이 4.19를 이어받은 민주 정부임을 강조.
정부 행사를 주관한 김종필 총리는 "4.19를 계기로 한 민족적 각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구현과 자주민족국가 건설의 대장정에 나설 수 있었다" 며 은근히 5.16 이후 근대화와 연결시켰다.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4.19정신은 반독재.민주주의 실현" 이라면서 "오늘날 같이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상황에선 4.19정신의 재현 필요성이 절실하다" 고 역설.
서승욱 기자
시위대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들 | |
한 여학생이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플랭카드를 들고 있다. | |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모여 있다. | |
가두를 행진하는 시민들 | |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시키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