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주일학교 운영, 이 점을 살피라!
멘토링
알바교사가 아니라 도제(徒弟)교육으로 가라!
서울에 있는 S교회의 유초등부 교사를 하는 대학생 아무개 교사. 모태신앙인 순혈(純血) 기독교인이다. 부모 모두 교회 중직자다. 어려서부터 영유치부를 다녔고 지금도 청년부예배에 열심히 출석하며 부모의 강요도 있지만 자의반 타의반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교사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경상식이 없다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라면 당연히 성경지식이 풍성해야 한다. 집에서건 예배당에서건 어려서부터 성경과 친숙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도 성경지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빈약한가, 불분명한가를 절실하게 느낀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물어보거나 공과에 없는 내용이라도 덧붙여 전달하려면 헷갈리기 십상이다.
왜 그럴까? 학교 공부를 20년 이상을 했다면 굉장한 실력과 상식을 소유하는데 성경내용은 왜 이리 안 들어올까? 무엇이든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이 없어서 아이들 앞에서 땀깨나 흘릴 때가 많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다보니 신앙심은 물론 주일학교 교사도 건성이다. 교사는 착실한 사람이다. 교회를 떠난 적도 없고, 남들처럼 부모 속을 썩인 적도 없다. 남들 보기에는 성실한 젊은이요, 교회 청년이다.
그런데도 믿음의 확신도 없고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한 사명감이나 기대감도 없다. 어차피 1년이 지나면 헤어지던지 자신에게 사정이 생기면 미련 없이, 자연스럽게 주일학교를 떠나면 그만이다.
아무개 교사는 지금 이렇게 교회 반사(班師) 생활을 하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이런 예는 몇몇 교사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교사들로 교회학교가 채워지고 있으며, 청년부가 구성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일/교회학교가 맥 빠진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학생들은 들락날락거리며 학생들 역시 성경에 대해 뭐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고 비록 알고 있는 성경이라 해도 아이들의 삶에 영향력을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하면서 아래서부터 지반(地盤)이 약해지고 있다.
왜 이런 문제가?
성경교육이 왜 이렇게 아이들의 삶에 능력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교육 자체에 문제가 있지만 아이들과의 인격적 만남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사들이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케어(care)를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교사들이 성경을 전달해 주는 ‘알바’로 끝나고 아이들이 눈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무런 ‘주간돌봄’이 없기에 아이들은 건성으로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한다. 듣기는 들어도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마음에 와 닿은 시간들이 1년에 한 차례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지난날과는 다르다. 누군가 믿음으로 돌봐주는 목자가 없다면 우리 아이들은 방목(放牧) 상태에서 야생마가 되어버린다. 부모가 아이들을 방목하는 것은 때때로 유익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친 교육열이 아이들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교육은 다르다. 교회교육은 주중(週中) 내내 방목보다 더한 방치(放置) 상태에 놓여있다. 교회에 다니는 부모들도 일반 공부에는 닦달을 하면서도 성경으로 아이를 교훈해주거나 가정예배를 단 한 차례도 드린 적이 없다. 아이들은 1주일 내내 성경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주일이면 다시 설교를 듣고 공과를 배운다. 물론 설교나 공과의 텍스트는 성경이다.
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이라는 단어에 젖어있는 세대이다. 성경의 내용들은 이미 과부하가 걸려있다. 자동차가 헛바퀴를 도는 것처럼, 나사못이 헛돌 듯 성경말씀을 읽어도 그야말로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기’ 식의 믿음생활이 계속된다. 들을 때는 생각이 나고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 하루만 지나면 남는 것이 없다. 들은 기억이 있어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이거 같던데…’ 라는 아리송한 내용으로 남는다.
성경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믿음은 언제나 초보(初步) 상태이고 사정이 생기면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길 간다’는 심정이 되어 하던 봉사도 쉽게 놓아버리고 심지어는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고등부까지 키워내느라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의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알바식 성경교사들이 사라져야 한다. 교사 숫자만 채우려고 아무나 데려다 세우는 교회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 성경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암기하게 하는 것으로 교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교사들이 정리되거나 훈련받지 못할 때 주일학교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성경교사들은 주일 한날의 교사가 아니다. 주일학교의 ‘주일’이라는 말은 어느 한 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교회학교의 ‘교회’라는 단어 역시 교회의 공간만은 아니다. ‘주일’ ‘교회’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 신앙인의 모든 삶의 공간이다. 그곳이 교육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
1주일 내내 삶 자체가 주일학교, 교회학교가 되고 교회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면 인도자가 있어야 한다. 핼퍼이다. 이 핼퍼가 ‘멘토’이다. 멘토는 어느 한 부분만을 담당하지 않는다. 아이를 맡긴 부모가 원하는 성숙된 모습이 나타나도록 양육하고 키워야 한다.
이는 내가 멘티(학생)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 인도자라는 위치를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함을 뜻한다. 맡긴 멘티를 위한 커리큘럼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 책임감을 말한다. 집중성을 말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놓으신 멘티는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심정에 스승으로 남는 멘토링사역으로 가야 어린이들은 영적으로 진보한다.
교육 멘토링사역, 어떻게?
멘토링은 일종의 도제(徒弟)이다. 도제는 서양의 중세에, 일정한 분야의 전문적 기능을 가진 스승 밑에서 그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기 위하여 견습 생활을 하던 어린 직공을 일컫는다. 도제제도는 중세 유럽의 수공업 기술자 양성제도이다. 이 제도 안에서 기술을 익히는 과정을 ‘도제살이’라고 한다.
유럽 도시에는 동직조합(同職組合:길드)이 있었는데, 내부조직은 도장인(都匠人)·장인(匠人)·도제라는 3가지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제제도의 역사는 독일에서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는 도장인 자격으로서 일정 연한의 도제수업을 필요로 하는 일은 없었다. 이것이 의무로서 제도화된 것은 14세기 후반부터이다.
수업기간은 대륙에서는 2∼8년, 영국에서는 약 7년이었는데, 이 기간은 도장인 집에서 침식을 함께 하면서 기술을 연수하였다. 도제가 되는 연령은 10∼16세이며, 도제 기간을 마치면 다시 3년 정도의 장인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장인 기간을 마치면 도장인 시작품(試作品)을 동업조합에 제출하여 기능심사에 합격해야 했고, 그 이후라야 한 사람의 도장인으로서 독립할 수 있었다.
도제제도의 교육적 특징은 무엇일까?
-교육자(도장인)와 도제는 인격적 관계였다.
-기술교육과 인간교육이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장래의 지위를 보장하는 교육이었다.
이처럼 도제는 한 장인(匠人) 밑에서 기술과 인격교육을 동시에 받았다. 기술만 전수받는 장인이 아니라 스승의 인격까지 고루 갖추었기에 전문 직종에서는 성공과 출세가 보장되었고 존경도 받았다. 학생인 도제는 곧 스승의 인정품이다.
그만큼 인격을 갖춘 한 사람의 장인(匠人)을 만들어 내기 위해 교육자(도장인)는 오랜 세월 함께 모든 것을 전수했고 그를 책임 있게 장인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생략) 1월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