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양 천년사찰 만월산 명주사(明珠寺)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길 93-229 (현북면 어성전리 산59)
2025.1.18(토) 홍천에서의 형제모임을 위하여 오후 2시경 동해(자택)를 출발하여 홍천으로 이동중
약 30여분 동안 양양 명주사 탐방시간을 갖는다(14:50~15:25)
14:40 어성전 사거리
이상향의 마을인 어성전리는 '물이 깊어 고기가 많고 주위의 산은 성과 같으며
밭이 기름져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기르기에 좋다' 는 뜻을 갖고 있다.
어성전 사거리에 명주사의 이정표(1.km) 지점에서 콘크리트로 포장된 금강송이 늘어선 소나무 숲길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약 5여분 남짓 산길을 지나면 만월산 명주사 일주문을 만난다.
양양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의상대사의 홍련암과 낙산사, 원효대사의 영혈사
고려시대 목종 12년(1009) 혜명대사와 대주대사가 창건한 명주사가 있다.
명주사 입구의 돌탑
명주사의 천년주목
14:55 명주사 주차장
만월산(滿月山)에 자리한 명주사는 1009년 고려 목종 12년 혜명(惠明)과 대주(大珠) 스님이 창건하여
비로자나불(毘盧咨那佛)을 모신 화엄종 계통의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사찰명은 두 창건주의 이름을 따서 명주사(明珠寺)라 하였다.
1123년(인종 1) 청련암(靑蓮庵)과 운문암(雲門庵)을 세우고 1673년(조선 현종 14) 수영(水瑩)이 향로암(香爐庵)이 부속암자로 창건되었다.
이 중 운문암은 본래 다른 이름이었으나 나중에 김시습(金時習)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1701년(숙종 27)에는 벽옥루(碧玉樓)를 세웠으며, 1781년(정조 5) 연파(蓮坡) 영주(永住)가 원통암(圓通庵)을 세우고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이후 헌종 15년(1849)과 철종 4년(1853)에 원통암이 수 번 소실되었으나 두 번 다 중건되었다고 한다.
철종 11년(1860) 화재가 산 전체를 뒤덮어 명주사와 인근 암자가 모두 불타버렸다.
1861년(철종 12) 불이 나자 이에 곧 월허(月虛)스님이 명주사를 인허(仁虛)스님이 운문암과 향로암을
그리고 1864년 학운(鶴雲)스님이 원통암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1879년(고종 16)에 다시 불이 난 것을 1880년에 중건하였다.
1897년에도 불이 나 본사를 원통암으로 옮겼는데 이후 원통암 자리에 편액을 달아 현재의 명주사 자리가 되었다.
1911년 건봉사(고성군의 소재인듯) 말사가 되었으며 이후 중건이 계속되어 원통암(圓通庵) 30칸을 비롯한
독성각(獨聖閣), 산신각(山神閣), 어향각(御香閣), 응향각(凝香閣), 진영각(眞影閣), 선방(禪房)인 현위실(弦葦室),
강원(講院)인 만수실(曼殊室) 등 총 15동 95칸의 대찰의 면모를 갖춘 큰 가람을 이루었다.
1917년에 백월(白月)이 중창하고, 1923년 윤설호(尹雪昊)가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되었으며, 근간 수해피해로 손실되었던 것을 8년의 각고끝에 홍진스님께서 중창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예로부터 선원(禪院)으로 이름나 많은 학승을 배출하였다.
월정사 주지를 지낸 종욱(鍾郁: 1884∼1969)도 이곳 출신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을 중심으로 삼성각과 종무소, 요사채 등이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과 석등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은 <대적광전>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법당 현판은 <극락전>이다.
명주사 극락전 현판
극락전 내 불전
아미타불(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며 설법하는 부처)을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사찰마다 법당의 현판이 <대웅전>, <대적광전>, <약사전>, <미륵전>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명주사 극락전 아미타불
종각내 명주사 동종(銅鐘)
사찰의 주차장에서 제일 먼저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좌측에 종각이 있다.
양양 명주사 동종 안내도
1704년(숙종 30) 제작. 높이 84.2㎝. 1980년2월 2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범종으로 높이 83㎝, 둘레 2.6m 이다.
종뉴에는 쌍룡이 조각되어 있으며,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이 연결되어 있다.
쌍룡(雙龍)의 용뉴(龍鈕 : 종의 꼭지부분 장식)와 하대(下帶)를 지닌 혼합형 종으로서
하나의 가느다란 몸체로 이루어진 두 마리의 용뉴는 그 머리가 왜소하면서도 휘어진 혀와 이빨이 강조되어
괴수처럼 표현되었으며 턱 밑에 붙은 보주가 천판(天板)까지 연결되었다.
천판 외연에는 1조의 융기선이 돌려지고 상대(上帶) 없이 종신(鐘身) 상부에 바짝 붙여 방형의 연곽(蓮廓)을 4면에 두었다.
이 연곽대에는 호형(弧形)을 이루며 엇갈리게 표현된 파도문을 시문하였고
내부의 연뢰(蓮蕾)는 원권(圓圈)을 두른 5잎의 연화 위에 얕게 돌기된 형태이다.
그리고 연곽과 연곽 사이에는 원권의 범자문(梵字文)을 상부에 배치하고 이 범자문 아래로 연꽃가지를 들고 구름 위에 서있는 보살상이 1구씩 부조되었다.
일반적인 범종의 범자문이 상대처럼 종신 상부에 돌려지는 것과 달리 연곽과 연곽 사이에 배치됨으로써
그 수효가 4개로 줄어들었고, 그 바로 아래 보살상이 매우 작은 크기로 배치된 점이 이색적이다.
한편 종신 하단부를 돌아가며 크고작은 방형의 명문판(銘文板)을 별도로 붙여 양각시켰으며
종구(鐘口) 부분에는 하대를 만들어 연당초문을 장식하였으나 문양이 거칠고 매우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원래 태백산 대흥사(大興寺)의 대종으로 100근(斤)의 중량을 들여 개주(改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어성전에서는 어성팔경(魚城八景)이라 해서 산사모종(山寺暮鐘)
즉 명주사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를 팔경중의 하나로 쳤다고 한다.
달마대사 두상
이 사찰에서 특이한 것은 법당 외 스님들이 거쳐하는 건물의 기둥과 창호지에서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창호마다 진한 묵향을 풍기며 그려진 달마도와 수묵화의 그림들 속에 새겨진 서채가 무릇 병풍을 쳐 놓은 듯 아늑함을 더해 준다.
종무소
1 얼마나 울어야 가슴이 열릴까
2 얼마나 사무쳐야 하늘이 열릴까
어두어 한 가지에 같이 자던 새
날 새면 서로 각각 날아가나니
보아라 인생도 이와 같거늘
무슨 일 눈물 흘러 옷을 적시나
3 얼마나 미워해야 사랑이 싹트고
창호마다 그려진 시화
4 얼마나 속아야 행복하고
5 얼마나 버려야 자유스러울까
6 얼마나 태위야 오만이 없고
7 얼마나 썩어야 종자로 열고
8 얼마나 닦아야 거울마음 닮을까
삼성각
삼성각 내부의 칠성단, 독성단, 산신단
입구를 내려다 보는 포대화상
나무로 만들어진 상,중,하로 나누어진 독특한 모습의 샘 수로
수로 중탕
명주사 요사채
'근심 더는 곳' 해우소
사찰 입구의 명주사 부도군(강원도 문화재자료)
만월산 명주사 일주문을 지나면 우측으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된 <양양 명주사 부도군>이 있다.
이 부도들은 명주사의 역대 고승들의 부도로 조선시대 후기의 부도 중 도내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부처님의 사리는 탑에, 스님의 승사리는 부도에 모신다고 한다.
원당형부도와 비석
남아있는 부도는 모두 12기로 원당형이 7기, 석종형이 5기이고 승탑외에 4기의 비석이 있다.
승탑과 비석은 원래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4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 및 복원헌 것이다.
<원당형 부도>는 탑신(탑의 중심부)이 대부분 공 모양이나
기단부(납신의 받침 부분)와 옥개석(탑신의 지붕)은 모두 8각으로 고려시대 이후의 팔각원당형의 전통을 잘 따르고 있다.
<석종형>은 종모양으로 만든 부도를 일컫는다.
이 부도들의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파당 부도는 짝을 이루는 탑비에 의해 조선 순조 18년(1818)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에는 부도와 함께 모두 4기의 비석이 있는데, 순조 12년(1812)에서 고종 20년(1883) 사이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높이 2.5m의 중봉당선사탑(中峯堂禪師塔)을 비롯하여 무하당(無瑕堂) 인허당(麟虛堂) 추암당(楸庵堂) 설봉당(雪峰堂) 호월당(皓月堂)
안곡당(安谷堂) 연파당(蓮坡堂)의 부도와 성월당(晟月堂)의 치사리탑(齒舍利塔), 상정거사탑(尙淨居士塔) 등 모두 12기가 있다.
탑비로는 학운당(鶴雲堂)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비롯하여 연파당·인곡당(麟谷堂)·용악당(聳嶽堂)의 것이 있다.
이 가운데 용악당비는 용악 보위(普衛, 1817~?) 스님의 것으로, 제자 오진(旿珍) 등이 스승의 덕행을 사모하여
스님의 나이 67세 때 허훈(許薰)의 글을 받아 건립하였다.
승려로서 생전에 행적비를 세운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매우 희귀한 일이다.
글을 지은 허훈은 호가 방산거사(昉山居士)인데 유학자로서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비석, 경상북도 구미 도리사의 사적 등 불교에 관련된 글을 쓴 것이 몇 편 있다.
<설봉당>
동사열전엔 설봉거일, 설봉완점, 설봉회정 등 이름이 나오지만 이분들 회정은 행적이 있다.
설봉 회정(雪峯懷淨), 숙종 4년(1678) 태어남. 영조 14년(1738) 해남 미황사에서 입적
<중봉당>
중봉 혜호(中峯彗皓), 동사열전 승려 '남호 영기; 행적이 이름이 나온다.
<연파당>
연파 혜장(蓮坡惠藏), 설봉 회정의 증손자뻘 제자
전남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 연파 34세, 정양용 44세, 이 두 분의 우정이 두텁다.
세수 40세, 대둔사(해남 대흥사) 북암에서 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