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4일 아침.
오래간만에 모두 모였다. 개학이다.
나는 습관처럼 항상 헤아린다. 숫자에 대한 불안감이 원인일 것이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선생님두분. 모두 열한 명.
그대로다. 숫자만 헤아리고 바로 내려왔다.
2월 15일 아침 토지초등학교 본교 강당. 84회 졸업식이다.
이곳에서 행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강당은 너무 넓다.
물론 지역의 다른 행사를 진행할 요량이 있겠지만 강당의 넓이와 높이는
지금의 시골학교 현실을 너무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장소에서 나의 촉각은 분교 아이들에게로만 향해있다.
그것은 명백하게 편향이고 집착이다. 네 명의 분교 졸업생이 같이 앉아 있다.
대부분의 본교 행사에서 분교 아이들은 같이 있다. 그것은 서로를 위한 보호막이다.
통상 시골에서 면민은 읍민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부동산 가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정서다. 구례군민의 70%는 구례읍에 집중되어 있다.
교육기관의 암묵적인 서열화 또한 이런 배열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분교 아이들은 스스로 구분된다. 같이 있을 땐 서로의 갈급함을 몰랐지만
좀 더 넓은 집단으로 내려오면 서로를 찾게 된다.
졸업장 수여식 등의 1부 행사가 끝나고 졸업하는 아이들을 위한 2부 행사가 시작되었다.
4학년들이 준비한 오카리나 연주가 있었다. 무대 위해 전화기를 올려놓고 연주를 녹음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오카리나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지금 흐르고 있는 곡이다.
헤아려 보니 열세 명이다. 이 아이들은 2015년 2월에 졸업생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5학년들은 합창을 준비했다. 마이크가 문제가 있었지만 아이들은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헤아려 보니 열세 명이다. 이 아이들은 2014년 2월에 졸업생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6학년 두 녀석의 답사 및 듀엣 공연이 있었다.
녹음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잘 불렀다. 성숙했다.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벼락처럼 성장하고 바람처럼 떠나간다.
학부형 대표의 편지 낭송이 있었다.
낭송이 끝나고 역시 기타를 잡았다. 상록수를 불렀다.
아이들을 보내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긴 편지의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너희들 덕분에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
그리고 본교와 분교의 두 6학년 담임선생님들이 떠나가는 아이들을 위한 편지를 읽었다.
김미행 선생님은 본교로 내려올 것이고 최관현 선생님이 분교로 올라갈 것이다.
부부 교사는 그렇게 역할을 교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하는 아이들의 답사와 답song이 있었다.
열다섯. 2013년 신입생이 열다섯 명이 될까.
최전방 바로 뒤 후방 상황도 그렇게 양호하지는 않다.
구례 전체 도시락 숫자는 이천 개를 넘지 못할 것이다.
같은 면의 중학교로 가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읍내 중학교로 가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일부는 구례를 떠나 중학교를 갈 수도 있고 그렇게 아이들은 분산되고 떠나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 마을’은 ‘내 고향’으로 변해갔다. 지난 50년 동안.
졸업생들의 노래가 끝이 나면 1학년 후배들이 꽃을 들고 무대로 올라갈 것이다.
아림이와 지강이는 먼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왔고 찬이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4학년들은 오카리나를 불고 졸업생들과 선생님들은 합창을 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꿈꾸지 않은지 이십 년 정도 된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있어 이룬 일이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그 사람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좀 더 쉽다.
김선행 교장선생님. 1년이 되지 않았지만 이분의 든 자리가 아닌 난 자리를 상상하면 그렇다.
배운다는 건(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시골학교의 졸업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작은 면에서 인근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종종 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적어서 애틋하다.
본교에서의 졸업식 이틀 전 2월 13일 아침.
분교는 분교만의 조촐한 졸업식 행사를 가졌다.
혁준, 유림, 다현, 하은.
네 아이를 떠나보낸다.
그러면 이제 다섯 아이가 남게 된다.
아홉 명의 아이들과 두 분의 선생님, 주무 선생님, 세 분의 학부형 그리고 나.
열여섯 사람이 함께 하는 조촐한 모임.
여섯 아이로 2012년을 출발했고 여름 방학과 함께 1학년 은희가 본교로 내려갔고
2학기에 네 명의 아이가 전학을 왔다. 2012년 연곡분교는 분명히 학교의 존폐를 건
위기가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파도를 넘었다.
그래서 금년 졸업생을 떠나보내기에는 마음이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아이와 어른,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넘어 식구라는 생각이 더 짙다.
2009년부터 촬영한 아이들의 모습을 같이 보았다.
잠시 하하깔깔.
그리고 모인 열여섯 사람의 이름을 랜덤으로 뽑아서 편지를 쓴다.
생각지 못했는데 난감한 상황이군. -,.-
아림이가 ‘보면 안 된다’고 토라졌지만 어차피 공개적으로 읽을 편진데 뭐…
김미행 선생님은 하실 말씀이 많다. 두 장을 쓰셨다.
또박또박 써 내려가는 집중력을 보고 있자니 분교를 떠나는 선생님의
아쉬움과 후회스러운 마음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생각과 달랐고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첫 해는 그랬다.
마음을 다잡고 혼신을 쏟았지만 쏟은 만큼 미련이 깊다. 그녀의 두 번째 해는 그랬다.
이제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서 제법 쑥스럽지만 편지를 읽는다.
찬서는 지강이에게 편지를 쓴다. 2학기에 느닷없이 등장한 연변에서 온 지강이.
몸집은 찬서보다 크고 서툰 우리말은 모두 낮춤말이다.
“지강아, 나를 보고 ‘찬서야’라고 하지 말고 찬서 형이라고 불러라. 제발.”
찬서의 한 맺힌 외침이었다.
그럴 것 같더니 결국 김미행 선생님은 혁준에게 보내는 편지를 잃고 눈물을 쏟았다.
나는 대략 김미행 선생님이 무엇을 아쉬워하고 아파하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분교 문제에서 내가 앓고 있는 속병과 맥락이 같을 것이란 짐작을
지난 2년 동안 간혹 느끼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2013년에 연곡분교는 6학년이 없다.
학교에서 최고 학년이 없다는 사실은 적은 숫자와는 다른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1학기가 가기 전에 그 자리가 채워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케이크를 준비했다. 모인 김에 2월과 3월 생일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모두 축하했다.
2012년을 시작할 무렵과 비교하면 분교는 많이 차분해졌고 많이 성숙해졌다.
분교를 지키자는 어른들의 악전고투도 그 안전성의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가 많이 성숙해졌다. 이곳에서보다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학교는 없다. 이해해야만 하기에 그렇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런 사실을 습득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마지막 밥을 나누었다.
다음 날인 목요일은 고학년들은 모두 졸업식 리허설 때문에 본교로 내려가기에
이 날이 마지막 급식이다.
아저씨가 3월이 오기 전에 밥상 한 번 마련할게.
분교에는 여전히 눈이 남아 있다.
날씨는 차가웠다. 3주일 후면 분교의 2013년 상황은 또렷하게 밝혀질 것이다.
희망적이다. 두 자리 숫자로 출발 할 것 같고 유치원도 부활할 것 같다.
자체 급식도 가능할 것 같다. 오백만 원을 구례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서은식 의원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맴돌고 있다.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조금 말 할 수 있다.
단 한 번의 취재였다면 속속들이 파고들어 아픔과 슬픔 모두 드러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관찰자가 아니라 같은 가족이기에 아이들과 가족의 아픈 대목을 기술할 수 없다.
나는 책으로서 연곡분교를 어떻게 마감을 할 것인지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떨쳐내고 싶기도 하고 떨쳐낼 수 없을 것이란 예감도 함께 한다.
분명한 것은 2013년에도 나는 연곡분교를 계속 찾을 것이란 사실이다.
다시 2013년 2월 15일 본교 졸업식.
김미행 선생님, 하은, 유림, 다현, 혁준.
아저씨는 사랑한다는 말 보다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졸업을 축하합니다.”
jirisan@jirisan.com
첫댓글 아~ 애잔합니다.
11명 중 4명의 졸업생~
다시 6학년 학생은 없고...
이것이 우리의 외지 곳곳에 일어나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실...
네학생의 졸업을 축하하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 쨘~합니다.
강원도에는 신입생이 없는 초등학교, 분교가 26개 정도 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한 때 저는 이런 학교에 저의 삼남매를 보내고 싶었으나 실현시키지는
못했네요. 심각한 대도시집중현상에 따른 백만가지 부작용 중 하나죠.
산골이야기가 아주 도시문화 못지 않아요 아기자기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