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서울시우지에 게재된 수필[청백리의 말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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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소나무
淸白吏의 末路
韓 吉 洙
조선조에서 청백리라 하면 황희, 맹사성 등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 당시 조정에서도 널리 치하하고 온 백성들이 떠받들었으니 이는 가문의 영광이요, 당사자에게도 커다란 영예였을 것이다.
참고자료에는 청백리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청백리는 성품과 행실이 올바르고 무엇을 탐하는 마음이 없는 관리다. 조선 시대 정이품 또는 종이품 이상의 고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우두머리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아치이다. 역사상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칭송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다. 청백리들이야말로 우리 공직 사회의 윤리를 유지하고 있는 지주라고 할 수 있다]
내가 1976년 총무처에서 시행하는 사무관시험에 합격하여 성동구청(지금의 성동구와 광진구가 분리되기 이전) 민방위과장으로 발령받아 부임해 보니 바로 옆방에 보통고시 출신인 김 모라는 분이 산업과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공직선배인 이 김 과장과는 직제 상 국(局)이 달라 업무적으로 연관성이 별로 없어서 잘 접촉을 하지 아니했으나 사무실이 이웃이어서 오가며 만나게 되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지냈다.
내가 곁에서 보건데 이 분은 다른 사람과 타협 할 줄 모르는 남다른 기질을 가졌는지 아니면 철저한 원칙론자인지 모르겠으나 위턱을 빼서 아래턱을 고이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 개성이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실례로 직원들에게 신세를 지기 싫다고 점심시간에는 홀로 밖으로 나가서 된장찌개나 순두부집에서 그 당시 300-500원하는 식사를 홀로 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술을 좋아는 하면서도 갓 결혼한 새 신랑도 아닌데 저녁때 직원들과 소주한잔 나누는 낭만도 없이 칼 퇴근을 하였다. 또 하나의 예로는 청 내에 과장친목회라는 모임이 있는데 과장들은 당연직 회원인데도 여기에 들지 않고 봉급에서 원천 공제하는 회비도 떼지 못하도록 하였다. 지금 같았으면 왕따의 1순위는 당연히 이 분이 차지했을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지나다가 보니 김 과장이 홀로 앉아 논어인지 대학인지 진서를 낭랑한 목소리로 읊고 있기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
과장친목회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분의 주장에는 논리가 정연했다. 자기는 박봉의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기도 빠듯하기에 봉급을 단 한 푼도 헛되이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국장들은 우리보다도 봉급도 더 받고 직위도 높은데 왜 회비도 받지 않고 월례회에서 식사를 공짜로 제공하며 또 타부서로 전출이 되면 순금 열쇠를 해 주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처사가 자기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 과장의 말에 일리가 있었고 확고하고 뚜렷한 철학에 내가 설득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인데. . . . .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중에 추석이 임박했다. 내가 청 내를 오가며 보니 이 분은 자리에 앉지 않고 종일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마당가에서 서성이는 이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왜 자리를 놔두고 다리 아프게 왔다 갔다 하십니까. “ 예 그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기관원들과 신문기자들 때문이요.”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나요.” 산업과장이라고 하니 떼돈이 들어오는 노다지과로 잘못 알고 추석을 앞두고 용돈을 달라고 모여드는데 줄 것이 있어야 주지요. “
청백리로 소문이 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파리 떼처럼 덤벼드니 줄 것이 없는 김 과장이야말로 마음고생이 많았을 뿐 아니라 생으로 벌을 서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뒤에 나도 산업과장을 맡았지만 그 당시 산업과장자리는 뚝섬일대가 공업단지이고 내로라하는 산업시설이 많이 있어서 모두가 선호하는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자리였다. 그 때에는 대 명절을 앞두고 대가성을 바라는 뇌물이나 청탁이 아닌 순수한 명절인사로 금일봉이나 그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샘플정도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전래해 오던 미풍양속의 전통에 따라 아무 이해 관계없이 보내오는 성금이나 성품은 모았다가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하고 기관원이나 언론관계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아름답게 그 자리를 잘 마무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기관의 장인 구청장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잘한 처사인지 판단하기 어렵겠지만 그 당시의 잣대로 재단할 때 내가 한 처사가 정도는 아니지만 정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한문에 해박한 선비풍인 김 과장은 시민봉사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민원사무 중에 호적업무는 물론 제 증명 업무에도 한자가 많아서 젊은 직원들이 업무처리에 지장이 많다는 걸 알고 이 실장은 직원들을 1시간 일직 08;00에 출근토록 해서 매일 1시간씩 한문공부를 시켰다. 이 소식이 청 내에 번지자 다른 과 직원들도 하나 둘씩 참가하여 방이 비좁아 다 수용을 못하니 대 강당에서 강의 하는 유명한 한문강사가 되었었다.
그럼으로써 직원들은 물론 김 과장도 보람을 느끼는 나날이 계속되는 와중에 12, 12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군부가 정권을 잡으니 새롭게 민심을 수습하려는 방안이 대두되어 공무원사회에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회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공무원 숙정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극비사항이라고 쉬쉬했지만 새어나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상부에서는 각 부서에 숙정 할 대상자를 직급별로 할당(割當)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서울시내 각 구마다 사무관이 50명 이상이 되지만 당시의 성동구청의 사무관 19명은 많은 숫자가 아닌데도 2명을 퇴출시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숙정대상 공무원 선발에 대한 지침이 은밀히 하달되었는데 첫째로 부정한 행위로 징계처분 받은 자, 처신이 올곧지 못하여 주변의 지탄을 받는 자 등의 내용이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래서 청장과 인사담당부서에서는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누구를 자르느냐, 염라대왕의 칼날처럼 한번 찍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당시 사정에 착수하기 전에 전 직원으로 부터 미리사직원을 받았다. 사직서를 낸 직원들은 마음이 조려서 전전긍긍하면서 편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수소문하려고 부산히 움직였다.
마침내 조마조마 하던 뚜껑이 열렸다. 열고 보니 엉뚱하게도 누구보다도 청렴하고 주변이 깨끗하여 포상은 물론 특별승진까지 시켜야 할 대상인 김 과장을 숙정 대상자의 한 사람으로 찍었다. 모두가 수긍이 안 되고 납득이 안 된다는 의외의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김 과장은 청렴결백하게 산다는 신념으로 직원들과의 회식자리나 술자리 등을 회피 한 것이 도리어 직원과 화합이 안 되는 물과 기름 같은 직장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평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장 송별연 등의 모임에 불참하는 외곬 수였기에 미운털도 박힌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있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라 누구 하나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고 고스란히 앉아서 당했다. 납득 할 수 없는 일에 멍 하니 먼 산만 바라보던 직원들이 사물함을 정리하여 택시에 싣고 과장을 모시고 답십리 산꼭대기에 있는 과장 댁을 찾아 가 보았다. 가서 보니 김 과장은 다 기울어가는 3칸 슬레이트집에 사는데 방 한 칸은 세를 주었기에 들고 간 보따리가 들어갈 곳이 없을 정도로 협소하고 가난한 실상을 보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게 험하게 사시는 줄을 몰랐다. 더구나 직원들이 사가지고 간 아이스크림을 넣어둘 냉장고가 없어서 다 녹아버리기에 할 수 없이 같이 간 직원들이 다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지 청백리의 말로가 이렇게 서글퍼서야 어찌 이 땅에 정직한 사람이 대접받고 정의가 살아있다고 말 할 수가 있으랴!
이 시점에서 김 과장의 쓸쓸한 퇴장 모습을 언급하려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회정화를 내세운 혁명정부에서는 이런 보기 드문 청백리에게 포상을 하고 격려해 줘야 사회정화의 깃발이 더 선명하게 펄럭였을 것이다.
그렇게 순리로 되었더라면 부정을 일소하고 사회정의가 바로서서 혁명정부의 시정방향이 정도를 향하여 잘 가고 있다고 모두가 박수로 격려하고 따랐을 것인데 너무나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