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때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만들고
세조 즉위를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꿈꾸다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바쳤던 사육신
성삼문(成三問) 선생을 기리는
유허지(遺墟址)
성삼문은 1418년 홍주(지금의 홍성군) 혹북면 노은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삼문(三問)인 것은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고
세번의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성삼문은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집현전 학자로 함께하다가 드디어
1446년에 훈민정음 반포에
참여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그는 이를 찬탈로 규정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그 때 죽어도 늦지
않다'
는 마음으로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
그 다음해인 1456년에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되어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처형되어 목숨을 마감하게
되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육신'(死六臣)이라
합니다.
죽임을 당한 후 성삼문의 일가는 멸족을 당했고
그의 시신은 팔도로 나뉘어져 보내지는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 후에 그의 시신의 일부와 일가족의 시신의 일부를
김시습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가묘을 세워 성씨지묘라고 비석을
세웠다.
그의 고향인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성삼문의 유품을 모아
그의 가묘를 만들게 되는데
숙종 때 이 곳에 우암 송시열이 친필로 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게 된다.
그 곳이 바로 성삼문선생 유허지(遺墟址)이다.
1691년 숙종 17년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관직이
모두 복권된다.
이 후 영조는 성삼문에게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려 그를
기렸고
1970년대에는 그의 처와 부모의 묘소가 있는
홍성군 일대가 성역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