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이돈형
내게 강 같은 슬픔 외
손톱만 한 슬픔을 앉혀놓고 바르게 살자 타이르는데 해맑게 웃는다
떠들어봐야 제 입만 아플 거라는 듯 슬픔이 방바닥에 슬픔은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라고 써놓고 빤히 올려다봐
웃어줄까 울어줄까
주위를 둘러봐도 혼자인 것은 없고 어쩌다 혼자라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처럼 제 몸에 무료만 칭칭 감고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업어 키운 슬픔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듯 눈 흘기는 저 능청에
나는 배알 없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되어 슬픔 없는 곳을 찾다가
이 악물고 온 이 삶이 슬픔 없었으면 김빠진 사이다나 앙꼬 없는 찐빵처럼 밍밍했을 것 같아
내게 강 같은 슬픔에게 손가락 걸며
오늘부터 일심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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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I
서너 달 어지럼증에
이 원인 저 원인을 찾다가 오늘은 뇌 MRI를 찍으러 갔다
바구니에 소지품을 담을 땐 기도 같은 마음이 생기고 기도하는,하던 용필이 오빠의 간절함도 느껴지고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통에 들어가 눕자 촬영기사가 헤드셋을 끼우며 슬금슬금 저 어둡고 캄캄한 세계로 인도하시어
절대 움직여서도 안 되고 눈을 떠서도 안 된다는 말에
착한 시체처럼 누워 있는데
왜 자꾸 이 통이 관 같은지 왜 자꾸 나를 두고 혼이 먼저 이 병원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지
어지러운데
스캔을 뜨는 내내 퉁퉁퉁거리는 소리가 이제 가면 언제 오실 거냐는 새로운 버전의 곡소리 같아 오긴 와야 해서 손가락 끝으로 날을 짚어보는데
인터콤으로 수고하셨다는 말이 들린다
맹세코 부활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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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형|2012년 《애지》로 등단했으며 김만중문학상, 선경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잘디잘아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