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상인 출신 무장(武將)이다.
약재 장사를 하던
부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교토에서 보내며
본명은 야쿠로(彌九郎)이며,
카톨릭 신자로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다.
그의 부하들도
카톨릭 신자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그가 장사를 하던 지역
영주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무사로 발탁되어
가신(家臣)이 되었고,
그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하시바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면서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領主)인 다이묘가 된다.
그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포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화 때문인지
자신의 이익 때문인지
어떻게든 임진왜란을
막아 볼려고 최선을 다 하였으나
불가항력임을 인지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가장 선봉에 서서 공을 세우자!
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청을 하여
군사 18,700명을 이끄는
제1군 선봉장이 되어
결국,
임진년(壬辰年)
1592년 4월 1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지고 말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 상륙을 시작으로
부신진성, 동래성, 상주성
탄금대성, 평양성까지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한양(漢陽)을
20일만에 집어 삼키며,
그 과정에서 가는 곳마다
죄없는 조선 백성들을
부산진성 3,000명
동래성 수천명을 포함하여
엄청난 학살과 도륙을
자행 하였다.
전쟁을 막고
살생을 막으려 했던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진중(陳中) 에서는
포루투칼 선교사와 밤마다
기도와
미사(Missa)를 드리면서
한편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학살과 도륙을 일삼았으니...
도대체 어느 것이
그의 진짜 얼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과 여러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남쪽에서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발걸음은
평양성에서 멈춰야 했었다.
거기에다,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까지 함락되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발광하여
여자는 제외하고
남자는 모두 죽여라 하며
또 다시 조선 백싱들을
학살과 도륙을 하였고
진주성으로
30만 대군이 다시 쳐들어 가니
진주 백성들을 먼저 피신 하라는
은밀한 편지를 보내 등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학살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살리려는...
이중적 소리를 내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이며,
또 전쟁중에는
많은 고아들을 거두어 키워
양자로 삼아
천주교로 입교 시키는 등...
임진왜란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능숙한 언변으로
명나라 심유경과
종전 협상에 적극적 나섰으나
조선 8도(道) 중 4도(道)를 갖고
명나라 황녀를 후궁으로 삼는다는
일본의 요구 사항과
조선으로부터 완전 철군과
다시는 조선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의 포로된 선조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 석방
명나라 요구 사항이
서로 거절로 협상이 결렬되자
또다시
본성이 되살아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심유경에게
이중적인 제안을 한다.
종전 협상이 결렬되면
우리 두 사람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명나라에서는
일본이 항복하였다 하고
일본에서는
명나라가 항복하였다 해서
대충 문서를 위장한다면
조기에 종전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 사기극은 얼마 못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발각되고
명나라 심유경은
벌써 목이 달아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할복을 명 받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의 만류로 목숨은 구하나
눈에 띄는 공을 세우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할복이
잠시 유보된 셈이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눈에 띄는 공을 궁리한 끝에
앙숙인 가토 기요마사를 미끼로
이순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는데...
여기에는
수 많은 설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을 상륙한다는 정보를
조선 조정에 밀고를 하고
이에 선조의 어명을 받아
이순신은
부산으로 출정을 하나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부산을 상륙한 후 이다.
이 사건으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면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 패권이 달려있는
세키가하라 내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서군 편에
참전하게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군과
격전을 치루었으나
지휘자의 능력 부재와
내부 배신으로 패하여 도주하였으나
4일만에 사로 잡혔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운털이 박힌
그는 조롱을 당하며
할복을 권유 받았지만
차라리 목을 베라고 거절한다.
그 이유가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고해성사 받게 해달라는 부탁도
거절 당하면서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되어 최후를 맞이한다.
이로써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문도 멸문 되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가토 기요마사를 따르게 되었고
그의 영토도
가토 기요마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쯤되면,
그의 라이벌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 둘은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얼굴만 보면 싸웠다.
가토 기요마사는
독실한 불자 이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바로 옆 다이묘로
영토 문제로 원래부터 사이가 안좋아
임진왜란시 전공(戰功)을 다투었으니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기만 하면 약장수로 놀렸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를
무식한 장군이라고 맞받아 쳤다.
이에 서로 감정이 격해
사생결단 칼부림까지 났으며
주변 동료 장군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동안 잔머리 굴리며
이중적인 행동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토록 무식하다며 조롱했던
가토 기요마사 보다도 못한 꼴이된 셈이다.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에서
두사람의 라이벌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침착하고 말이 통하는 캐릭터로,
가토 기요마사는
무식하고 단순한 캐릭터로 다루어
많은 사람들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더 인간적으로 보는 시각인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백성들을 학살과 도륙을
밥 먹듯이 일삼았고
어중간한 포지션으로
주위 사람들을 곤경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고초와
그의 가문도 멸문 되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다.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교활하고 이중적인
고니시 유키나가 보다
단순하고 무식한
가토 기요마사가 조금 나은듯 하다.
고노시 유키나가는
1558년 무오생(戊午生) 말띠!
가토 기요마사는
1562년 임술생(壬戌生) 개띠!
말띠와 개띠는
외형적으로
합(合)을 이루는 형국이나
말띠 속에는
사슴이 시퍼렇게 살고 있고
개띠 속에는
늑대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사슴은
한 곳에 먹이가 있으면
있을때까지
머물다 죽기도 하다가
천적인 늑대가 다가올때
도망가게 되어
오히려,
늑대가 사슴의 목숨을 구해주는
귀인(貴人)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말을 탄 사냥꾼이
늑대를 사냥하기도 하는...
그러나,
늑대는 사슴을 보면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이것이
오술(午戌) 합(合)이다.
甲辰年
六月 第一十七天
寓居泗川 灑落堂
律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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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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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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