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를 도둑맞고
다문화 사회에 대한 생각 1
몇 해 전의 일이다. 여름휴가가 시작되자마자 떠났던 태국 패키지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노독이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여 보이자 나는 여행 가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티셔츠와 남방셔츠가 각각 하나씩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남의 입던 옷을 훔쳐 갔을 리도 만무하고, 그 옷 두 개를 가방 안 제일 위에 잘 접어서 넣어둔 것이 분명히 기억났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무더위보다는 덜 했지만, 그곳은 일 년 열두 달 내내 더운 곳이라 여벌 옷을 여러 개 가져갔고, 사진도 많이 찍을 것을 고려해서 다양한 색상과 형태로 차별화된 좋은 옷만 골라서 가지고 갔다. 아직 여름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그중 두 개를 잃어버렸으니 좀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함께 여행하게 되면 여행지에서 떠나오기 전날 과음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러고 나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 허겁지겁 가방을 챙기다 보면 사소한 물건 하나둘 정도는 잃어버리기에 십상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가족들과 함께 다녀온 여행이었고, 돌아오기 전날 밤 마신 것은 작은 병맥주 두 병에 불과했다. 귀국하는 날 아침은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일찍 일어나서 소파나 탁자 위에 여기저기 널어둔 옷을 내가 직접 가방에 차곡차곡 개서 넣었던 기억이 너무도 뚜렷했으므로 그것을 분실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냥 이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 이틀쯤 지난 후였다. 카메라와 스마트폰에 찍어둔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며 정리하고 있을 때, 문득 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갔다.
― 이따 산호섬 해수욕장에 가면 포항제철이나 기아자동차 로고나 한국 상표가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삼 년 정도 대충 입다가 버린 옷을 수거해서 세탁한 후 이곳에 와서 팔면 사 입는 사람들이 많이 있답니다. ……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관광버스를 타러 갈 때마다, 버스 옆에 서서 기다리며 태연스레 담배를 피우고 있던 버스 조수의 모습이 생각났고, 손톱으로 긁어서 덧난 부스럼 자국이 두어 군데 남아 있는, 버스 기사의 그 거무튀튀한 빛깔의 두툼하고 짧은 손과 함께, 목덜미 옷깃 위쪽에 낡아서 길게 헤진 부분이 선명하게 확대되며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서 관광을 다녀올 때마다 그 두 사람은 늘 버스에 남아 있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올 동안에도 그들은 늘 버스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 아침에 우리가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들은 어디선가 버스를 타고 왔으며, 그날, 마지막 날도 버스 짐칸에 가방을 넣어둔 후 우리 일행 중 어느 누구도 이동하는 중간에 가방을 다시 꺼내 본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파타야에서 방콕까지 가는 도중 버스에서 내려서 여러 군데를 방문했고, 그들은 늘 버스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밤 9시가 넘어서 공항에 도착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여행 가방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누가 남의 옷가지나 화장품 등 자질구레한 물건에 손을 댈까 싶어 가방은 한 번도 잠가 두지 않았으니, 누군가가 버스 짐칸 문을 열고 손대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내 머릿속에 금방 그려졌지만, 아무래도 그 버스 기사와 조수 아이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인제 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깟 옷가지 두 개 때문에 그 가이드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만 잊어버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이, 그중에서도 유독 버스 조수로 따라다니던 그 청소년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어른거리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이는 열 네다섯 살쯤 되었을까. 학교도 안 다니는 녀석 같았다. 다소 마른 체격에 키가 훤칠하게 큰 편이었고, 거무스레한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아이였다. 내가 버스를 타러 갈 때면 그는 늘 버스 옆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였으나, 뭔가 살피는 듯 다소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힐끔힐끔 우리 일행 쪽을 쳐다보곤 했다. 예전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나쁜 짓을 하고 거짓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 그런 태도를 보이곤 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는 뒷마당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얼른 할 일을 끝내고 나가서 놀 생각으로 방바닥에 엎드려 서둘러 숙제를 했다. 학교 숙제를 다 마친 후 무심코 창문으로 앞마당 쪽을 내다보니, 웬 넝마주이가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을 양철 집게로 집어서 등 뒤의 넝마 통으로 마구 집어넣고 있었다. 엉겁결에 간 큰 도둑놈을 목격하자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서 창문을 열어젖히고, 도둑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는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쏜살같이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신발을 신고 대문 앞으로 가 보았을 땐, 그는 그새 어디로 도망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태국 아이의 모습 위로 느닷없이 지나간 우리 시대의 삽화 하나가 겹쳐 지나가자 비로소 그 사람들 ― 운전기사와 조수 ― 과 한마디 말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기억으로 떠올랐다. 일본이나 유럽에 가서 관광버스에 탔을 때는 버스 기사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서툰 그 나라 인사말이나마 몇 마디 자꾸 나누고자 했고, 친절하게 대해준 기사에겐 헤어질 때쯤 해서 작은 답례품이나 팁까지 건네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 태국인들과는 전혀 아무런 접촉도 없이 며칠을 보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여행 코스를 따라 버스로 이동하던 도중 우리 일행 중에서 그 두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고 따뜻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 그 두 사람은 어떻게 식사를 해결했는지, 또 그 길고 무료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소일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우리의 무관심이 새삼 낯설고 이상하게 여겨졌다.
도대체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그런 자연스러운 접촉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그 무관심은, …… 어쩌면 …… 무의식중에라도 …… , 우리가 그들보다 여러모로 더 낫다는 생각, 예를 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우월감 같은 감정이 반영되어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 ……, 하는 의혹이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올라오자, 내 마음은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쓸만한 옷을 분실했다는 불쾌함보다도, 그들을 만만하게 보고 등한시했던 우리들의 태도가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첫댓글 결국 못 찾으셨네요.
예부터 잃어버린 것이 죄라고 했지요. 이 사람 저 사람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귀중품은 잘 챙겼는데, 정작 큰 가방은 소홀히 했네요. 주의를 게을리하고 분실한 뒤 남을 원망해서는 당연히 안 되겠지요.
티셔츠와 남방셔츠는 추가 여행비가 된 셈이군요..
그 두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잃어버린 것은 일종의 편견에 대한 벌일 수도 있겠군요..ㅎㅎ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무심코 했던 자기 행동이 차별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달은 건 돈 주고 배울 수 없는 큰 공부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얻으신 거죠ㅡ
맞습니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꼭 귀중품이 아니라도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하나라도 분실하면 곤란한 법인데, 부주의 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도 자기 모순을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군요
여행지에선 들뜨기 마련이라 분실 다반사 ㅎ
귀중품은 잘 가지고 다녀서 잃어버린 적이 없었는데, 버스 짐칸에 내 손으로 직접 넣어둔 여행가방에서 물건이 분실되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아! 그런 일도 일어나는군요.
난 경험을 못해봐서.
해외여행의 좋은 팁 하나 얻어갑니다.
동남아에선 관광버스 밖에 나갈 때도 배낭에 소지품 넣고 나가면 안전합니다. 유럽에서 소매치기 안 당하려면 각별히 조심해야합니다. 여행가시기 전 유경험자 이야기 듣고 가시면 좋을 듯.....
여행 부가세를 내셨군요~
아깝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무디어가는 문화적 감수성을 깨우친 댓가치고는......